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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217화 (217/300)

#217화

뿌연 운무가 산세에 내려앉았다.

동이 터올 무렵인 이른 시각 간간이 먼저 잠에서 깨어난 새들만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두 명의 인영이 그 길을 오르고 있었다.

“…….”

남궁연은 묵묵히 앞서나가는 주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에 청포석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녀의 신경은 오로지 주호가 어젯밤 했던 말에 쏠려 있었다.

-내일 산을 오르자꾸나. 그러면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산을 오르면서 할 이야기가 무엇일까.

혹, 서로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

자신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으나, 주호 쪽은 살짝 부담스러울 수 있다.

혹시라도 거절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천 언니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서 실연의 상처로 주저앉기는 싫었다.

‘아니,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남궁연은 짐짓 부루퉁한 표정으로 주호의 등 뒤를 노려보았다.

우두커니 지켜만 보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아 그간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설마 저 얼굴로 이성에 대한 경험이 없지는 않을 터이니 이쪽의 마음을 모르지 않을 터.

만일 이상한 헛소리를 해온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찌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

주호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등 뒤로 닿는 시선을 의식했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살짝 심란해 보이는 기색이었지만, 비동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조금 더 뭔가 다른 것에 신경이 팔린 듯 검으로 쿡쿡 찌르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괜히 말하기 껄끄러워지는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녀를 내려 보내고 혼자 비동에 들어가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 어느덧 산중턱에 이르렀고, 주호는 그 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교관님?”

“어젯밤에 말했었지. 할 말이 있다고.”

“…네.”

남궁연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결연한 얼굴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이 앞은 무황의 비동이다. 네 오라버니가 묻혀 있는 곳이지.”

“…네? 뭐가 묻혀 있어요?”

하지만 그 직후 주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녀는 슬며시 인상을 썼다.

예상을 벗어나는 생뚱맞은 이야기인지라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할 터.

그의 말을 되물은 남궁연은 잠시 입안에서 그것을 곱씹더니 이내 무서운 기세로 고개를 들었다.

“제,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무황의 비동, 오라버니.

이미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고, 소림에서 안휘로 넘어오며 자신들이 당도한 이곳의 위치를 어렴풋이나마 가늠했다.

“…설마.”

남궁연은 곧 한 가지 가설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한 그녀의 시선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주호는 몸을 돌려 산 중턱에 자리한 절벽과 마주 섰다.

웅웅─.

그가 가볍게 팔을 들어 올리자 심상치 않은 기파가 휘몰아치며 산세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남궁연이 무엇을 하려는가 싶어 물으려 할 찰나, 절벽 위로 저적 금이 가며 그 일부가 통째로 뜯겨 나왔다.

“오랜만이군.”

뜯겨나간 절벽의 여파로 인해 토사가 쏟아져 내렸지만, 주호는 가볍게 손을 휘저음으로 그것들을 모조리 날려 보냈다.

그렇게 자욱한 먼지도 가라앉았을 때, 그는 우두커니 서 있던 남궁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들어갈 수 있겠느냐.”

한 점의 빛조차 들지 않는 길이 절벽 안쪽으로 펼쳐져 있다. 남궁연은 잠시 그 너머를 바라보다 주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면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어째서 그가 무황의 비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알고 있는지.

또 어째서 자신의 오라버니의 죽음을 알고 있는 것인지.

남궁연은 이 입구가 열렸을 때부터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주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전부 말해주마.”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숨길 것이 무에 있겠는가. 그러자 살짝 한숨을 내쉰 남궁연은 비동의 입구 앞에 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복잡하네요.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제법 충격이 커서…….”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라고?”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기나 하죠.”

남궁연은 말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주호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품에서 야명주를 꺼내 들었고 은은한 빛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사 년 만에 비동으로 발을 내디뎠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본래 주가장이라는 상계 가문의 출신이었단다. 무공에 대한 열의도 넘치고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태생의 차이란 쉬이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더구나.”

“…들었어요. 약관이 되던 해에 출가하셔서 강호에 뛰어드셨다는걸.”

이미 옛적에 주호를 조사하며 알게 되었던 이야기였다.

그 이후로 강호 뒷골목을 전전하다 무림맹 말단 무사로 입맹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세간에서 유명한 사실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지.’

고수란 단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무가에서 어릴 적부터 여러 영약을 먹이고 수련을 일삼으면서 철저히 관리하겠는가.

그런 노력 끝에 시간과 경험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고수란 존재였다.

그러니 다들 주호가 뒷골목을 전전했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았다. 더욱이 무림맹주인 단철량과 사형제지간으로 알려지며 그 의심에 무게를 더했으니 옛적부터 무공이 출중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세간에서 무어라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알려진 것은 모두 사실이지. 난 흑도의 뒷골목을 전전했고 비루한 무공을 지니고 맹에 입문했다.”

주호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은 여러 이유로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남궁연에게까지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었기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무황의 비동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지. 본래라면 이곳으로 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실력이었으나, 생에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단다. 그렇게 단 노인 덕분에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었지.”

“단 노인이요?”

“아, 맹주인 단철량 어르신이다. 그분과는 사형제지간이라 알려졌지만, 사실은 정체를 숨기기 위한 연막이었지. 그냥 옛적부터 자주 술 대작하곤 하던 사이였다.”

“…아.”

“가끔 무공에 대해 조언해 주곤 하던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노인이라는 것은 짐작했으나, 설마 맹주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몇 년 만에 돌아와 단 노인과 마주쳤을 때 상태창에 쓰인 그 내용에 얼마나 놀랐던가.

“하여튼 맹주님의 덕분으로 이곳에 왔고, 일련의 과정을 전부 겪었다. 비동혈사라는 이름이 과장되지 않을 정도로 거친 싸움이었지.”

주호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물밀듯 닥쳐오는 마인들, 어둠을 밝히던 화롯불은 바닥에 엎어져 사방으로 번져나가고, 매캐한 탄내보다 자욱한 피 내음이 더욱 진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마인들의 추격을 피해 비동 안쪽으로 몸을 날렸지. 그 직후 사도맹에서 벽력탄을 터트려 비동 입구를 막았다고 하더구나. 그때의 난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으니 그저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춰 선 주호는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삼 년이란 시간 동안 파 내려갔던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비동의 중심과 더불어 수많은 봉분이 그들을 반길 터.

주호의 시선은 마치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묻는 듯했다. 그렇기에 남궁연은 손에 흘러나온 땀을 외투에 닦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슬픔은 여전하지만, 저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까요.”

주호를 만나기 전까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면 자신을 어여삐 여겨주던 오라버니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괴롭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지만, 언제까지 떠나간 이에게 얽매여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약하지 않았고, 우유부단한 성격 또한 아니었다.

“가죠.”

“…알겠다.”

힘있게 토해진 그녀의 말에 주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지점부터는 주위에 자리한 풍경이 살짝 바뀌었다. 주호가 검으로 파낸 길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했던 비동의 구역. 단단한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고, 곳곳에 박힌 야명주 조각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어둠을 밝혔다.

“…아.”

남궁연의 시선이 그 끄트머리에 있던 수많은 봉분에 닿았다.

길을 따라 쭉 이어진 그 행렬 앞에는 각자 무덤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병장기와 소지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 정도 문파의 고수들이군요.”

“누구 때문에 혈사가 일어났는지 생각한다면 봉분을 세워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테지. 그래도 사자(死者)에 대한 예우로 안식은 편히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비동을 나간 뒤로는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를 부수고 다녀 월영사신이라는 이름까지 붙었지만 말이다.”

“…알아요. 그때 교관님과 저희가 처음 만났죠.”

남궁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한 달이 떠올랐던 그날 밤의 기억은 아직 생생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봉분의 앞으로 시선이 가던 차에 그녀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다.

“…네 오라버니인 검절 남궁경 대협의 묘다. 흔적을 보니 마두 셋과 동귀어진하셨더구나. 그 각각이 이름을 알리는 고수로…….”

옆에서 주호가 무어라 이야기해왔지만, 남궁연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무릎을 꿇고 다 낡아서 헤진 검집을 들어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극.

녹이 잔뜩 낀 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자신의 기억에 있는 그것이 맞았다. 남궁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울지 않으려 했건만, 속에서 감정이 복받쳐오며 시야가 일렁거렸다.

옆에 있던 주호가 슬쩍 자리에서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녀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고, 천천히 손을 뻗어 가지런히 개인 피 묻은 옷가지와 더불어 자리한 오라버니의 소지품을 매만졌다.

“…….”

다시 만나게 되면 할 말이 많았지만, 어째서인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금 손을 뻗어 봉분을 쓰다듬자, 축축한 흙의 감촉이 여실 없이 그 위로 느껴졌다.

“…무황의 비동이라곤 하나 터가 좋지 않다. 나중에 조용히 가주께 연락해 이장하자꾸나.”

남궁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는 그런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손을 잡고 그 위에 묻은 흙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미안하구나. 더 일찍 말할 수도 있었는데…….”

“알아요. 교관님도 준비가 되어 있으시지 않으셨겠죠. 그 이전에도 큰 소란이었으니.”

남궁연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살짝 섭섭했지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했을 테니.

“…그래도 사 년 만에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남궁연은 천천히 눈가를 매만졌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그곳으로 아직 여물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다. 그것을 닦아낼 찰나, 그녀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탁.

주호는 침중한 얼굴로 남궁연의 신형을 부축해주었다.

손안에서 느껴졌던 축축한 흙과는 달리 전신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남궁연은 조용히 그 품에 안겼고, 이내 소리 없는 흐느낌이 그녀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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