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삼 초식 나찰(羅刹).
주호는 천수관음과의 격돌에서 본능적으로 패배를 직감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무황의 계승자로서 그 특출남이 돋보이는 것은 입신지경의 직전까지다.
입신지경에 이른 것은 온전히 그의 능력인바. 그렇기에 다른 입신지경의 고수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신승이라 함은 그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소림의 일각 중 하나로 우뚝 솟은 이름. 그 간극을 좁히기엔 주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비무에서는 패배하더라도 승무전에서 승리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소림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신승이라면, 겸허한 태도로 모든 것을 수용한 자신 앞에서 무슨 모습을 보일까.
정도 무림을 걷는다는 것은 실리(實利)보다 중요한 신념이 있다는 것이었다.
소림의 거두, 신승이라 함은 그 제일 앞에 선 자. 진심으로 그의 감복을 끌어낸다면 정해진 결과를 뒤바꿀 수도 있을 터.
주호는 희박한 가능성에 모든 패를 던졌고, 그 도박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아닐세. 나의, 아니, 소림의 완패이네. 승무전의 승자는 자네여야 함이 옳네. 그것이 순리이자 올바른 이치일 따름이니.”
길게 한숨을 내쉰 신승은 진심으로 감화되었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방장의 대리로 승무전을 진행한 빈승의 이름으로 공인하는 것이니,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호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신검도 잃고 천우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마저 잃을 뻔했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그 끄트머리에서 발휘한 기지 덕분에 신승의 마음을 감화시킬 수 있었다.
‘다시는 하지 못하겠군.’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니.
강적 앞에서 모든 힘을 끌어다 일격을 넣어 쓰렸을 때보다 심력의 소모가 더욱 막대했다.
주륵.
주호는 비릿한 피 내음에 입가를 쓸었다.
이때까지 쌓인 내상으로 인해 내부가 진탕된 것인지 새빨간 선혈이 입과 코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바.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쓰러질 찰나, 객석 가운데 누구보다 빠르게 승무련 위로 몸을 날린 이가 있었다.
“…교관님.”
남궁연은 조심스럽게 주호의 신형을 받아들었다.
그가 흘린 피 때문에 제 앞섬이 핏물로 흥건해졌지만, 하나도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수고했다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어서 옮기게. 적어도 하루 이틀은 푹 요양해야 할 것이야. 그 정도의 싸움이었으니.”
신승 역시 주호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그전까지의 비무에선 괜찮았으나, 마지막 격돌에서 초식을 거두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외부의 충격과 더불어 내부의 반동까지 제 몸으로 감당해야 했으니 얼마나 그 여파가 강했겠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남궁연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신승의 눈짓을 받은 나한당주를 따라 승무련을 떠났다.
그것을 끝으로 삼십여 년 만에 진행된 승무전은 소림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
주호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하루 뒤의 정오였다.
정신은 일찍이 깨어 있었지만, 육체의 상태를 관조하느라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승무전의 여파로 얻은 내상이 적지 않기에 서둘러 그것을 치료하고자 했지만, 어째서인지 내부는 멀쩡할뿐더러 미약하게나마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교관님.”
주호가 단전 부위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킬 찰나, 침상 앞에 앉아 검을 닦던 남궁연이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이상할 정도로 가뿐하구나. 적어도 며칠은 요양해야 하리라 생각했거늘.”
“신승께서 소환단을 주셨어요. 아마 그 덕분이지 않은가 싶네요.”
“…소환단.”
대환단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림의 이름난 영약이 아니던가.
대환단을 내어주기로 한 상황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소환단을 내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승의 마음이 감화되었다는 것이리라.
“…….”
짧게 운기를 마친 것으로 그는 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남궁연은 그가 눈을 뜨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 옷가지를 가져왔고 주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네겐 신세만 지는구나.”
“아니에요. 여러 사람한테 교관님을 보필해달라고 부탁받았으니 열심히 해야죠.”
그녀는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며 제 의욕을 드러낸다. 그것에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어깨를 한 바퀴 돌리며 제 몸 상태를 평했다.
‘애초에 외상은 없었다. 소환단의 효능으로 내상까지 전부 치유되었으니 만전의 상태인가.’
지금 당장 이동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남궁연도 자신을 간호하며 쉬었다고 하니 이대로 대환단을 받고 떠나도 문제가 없을 터.
“검의 손질은 간단히 끝내놓았어요. 신승께서 소환단과 함께 주시더군요.”
“고생했구나.”
“뭘요.”
남궁연이 흐뭇한 얼굴로 신검을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주호는 검대에 단단히 결박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기다리고 있던 나한당주 지한과 마주칠 수 있었다.
“신승께서 이맘때쯤이면 깨어날 거라고 하셨지요. 나오신다면 곧바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보아하니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문 듯했다.
그렇기에 주호는 진심을 담아 포권했고, 지현은 아니라는 듯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지현입니다. 검절 대협을 모셔왔습니다.”
문 앞에 선 그가 자신들이 왔음을 알리자, 자연스럽게 출입의 허가가 떨어졌다.
남궁연을 대동한 주호가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니, 이전에 왔을 때처럼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방장과 신승을 볼 수 있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배려해주신 덕분에 전부 회복했습니다.”
“다행이군. 마침, 내 명목으로 남는 소환단이 있어서 말이네.”
“…소환단도 귀한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괜찮으셨던 겁니까.”
주호는 적은 우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신승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을 따름이었다.
“대환단과 달리 소환단은 만들기가 그리 어렵지 않네. 그리고 그것은 내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던 것이니 어떻게 사용할지는 내 마음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설사 방장인 저라 할지라도 그것에 관해선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 순리입니다.”
방장 혜능 대사 역시 허허 웃으며 말하니 주호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사정이 급하다고 하였지. 그렇다면 바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신승의 눈짓을 받은 혜능 대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제품에서 목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든 주호는 천천히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 고고히 자리하고 있던 황금빛 환단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대환단.”
옆에 있던 남궁연이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라 할지라도 대환단은 보기 귀한 것. 상태창을 이용해 그것이 진품임을 확인한 주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목함을 봉인했다.
“귀한 것이니 잘 써주리라 믿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긴말은 하지 않았다.
주호는 깊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미련 없는 발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뒤따라 나간 남궁연 역시 같은 모습인바. 그것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방장은 제 사형에게 말했다.
“헌데 설마 거기서 패배를 인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 아이가 그랬듯 빈승도 승무전의 의의를 다시금 되새겼을 따름입니다.”
승무전의 본래 취지는 소림과 외부의 무(武)를 겨루는 것. 무언가를 거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싸움이 아니었다.
거기에 그 본인에게 풍기는 대협의 풍모는 자신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던바.
신승은 자신이 아직 일개 무승이었을 적을 떠올렸다.
불가에 귀의했지만, 그 역시 한 명의 무인(武人)이었다.
힘을 겨루며 더 높은 경지를 지향했고, 정도(正道)를 걸으며 불의를 참지 않았다.
“참으로 빈승의 젊을 적과 똑 닮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는.”
“외모만 빼면 그렇군요.”
“…소림의 방장씩이나 되는 분이 겉가죽으로 사람을 놀리다니.”
“하하. 소림의 방장이니 허언은 할 수 없을 따름이지요. 그래도…….”
혜능 대사는 주호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손에 쥔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대환단 하나로 강호의 신성과 소림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균형추는 맞춘 것 같습니다.”
***
소림을 나와 하산한 주호는 곧바로 여정을 서둘렀다.
목적지인 안휘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길도 잘 정비되어 있기에 이틀에 걸친 질주 끝에 안휘에 들어섰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을 어귀에 자리한 객잔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연찮게도 다른 상행과 길이 겹친 탓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주호가 곤혹스러운 태도로 머리를 긁적이자, 그 옆에 있던 남궁연이 품에서 전표를 꺼내 망설임 없는 태도로 점소이에게 내밀었다.
“그거라도 주세요.”
“옙.”
원래 값보다 두 배는 더 받은 점소이는 횡재했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준비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주호가 슬쩍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삿갓으로 쓰고 있던 삿갓으로 입가를 가리며 변명했다.
“노숙을 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도 남녀가 한 방에 묵는 것은…….”
“이상한 짓, 하실 건가요?”
일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순수한 눈동자였다. 주호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 남궁연의 뒤를 따라갔다.
밤은 이미 깊었다. 내일은 이른 시각부터 움직여야 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바.
침상을 양보받은 남궁연은 슬쩍 고개를 들어 창가에 앉은 주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그는 벽에 기대 우수에 젖은 얼굴로 하늘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만 지나면 보름이 차오르는 날로, 지금은 어딘가 살짝 찌그러진 형태였다.
“왜 그러느냐.”
잠시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남궁연은 나지막하게 뱉어진 목소리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아니에요. 그냥, 심란하신 것으로 보여서요. 언니는 괜찮을 거예요. 대환단도 얻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그녀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요?”
주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산세를 바라보았다.
남궁연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지만, 이곳은 사 년 전 무황의 비동이 발견된 것으로 인해 크게 소란이 일었던 구역이었다.
주호 역시 무림맹의 일원으로 함께 자리했고, 목숨을 건 사투 끝에 무황의 비동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된 지금 묘한 운명이 느껴졌으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오라버니도 이곳에 묻혀 있었지.’
비동의 조사대.
그중에는 당시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자신보다 먼저 검절로 불리던 남궁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호는 이미 내부에서 남궁경의 시신을 보았고, 그의 무덤까지 만들어주었다.
제 오라버니가 비동혈사로 목숨을 잃은 것은 남궁연에게 있어 씻지 못할 상처로 자리 잡고 있을 터.
마음 같아선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홀로 비동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남궁연은 그것을 알 자격이 있었다.
“내일.”
“…….”
“산을 오르자꾸나. 그러면서 긴 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 말에 남궁연의 몸이 흠칫했다.
무슨 착각을 한 것인지 이불 사이로 보이는 한 쌍의 눈동자에 어렴풋한 기대감과 동시에 설레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니 어서 자도록 하여라.”
“…네.”
짤막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얼마 뒤, 고요한 방 안으로 그녀의 옅은 숨소리만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