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거대한 손바닥이 짓눌러왔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본 대로 말한다면 농담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겠지만, 아쉽게도 주호는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쿵.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승무련의 바닥이 움푹 파이며 깊은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그 하나뿐이 아니었다. 주호의 주위로 벌써 수십 개에 달하는 자국이 찍혀 선명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여기까지 하세. 자네의 간절함은 알겠지만, 더 이어나가야 의미가 없으니.”
신승은 엄숙히 승무전을 끝내겠다는 말을 고했다.
하지만 주호는 형형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고, 피딱지가 눌어붙은 손으로 검을 세웠다.
“신승께선 저를 꺾으셨습니까?”
“……크흠.”
신승은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가 보기에 더 이상의 승무전은 의미가 없었다.
같은 입신지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 상하는 명백한바. 여기서 더 싸워봤자 유혈이 낭자하는 것밖에 더 있겠나.
“소림에 대환단만 있는 것이 아니네. 그보단 못하나 소환단 역시 영험한 효능을 지니고 있지. 내 그것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주겠네.”
신승으로선 최대한 양보한 것이었다.
대가로 걸린 신검(神劍)을 소림이 취하는 것은 관례상 어쩔 수 없는 일. 그 가운데 대환단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간다면 주호의 낙담이 클 것 아닌가.
그렇기에 옛 친우에 대한 예우와 더불어 소환단이라도 챙겨주려 했건만, 주호는 제 의지를 나타내며 검을 내리그었다.
일 초식 일섬(一閃).
파각─.
승무련 바닥 위로 깊은 선이 그어진다. 침중한 눈으로 그것을 보던 신승은 한숨을 내쉬며 두 팔을 교차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천수관음이 수십 개의 팔을 모으며 자신에게로 닥쳐온 빛무리를 잡아냈다.
이전과 달리 그 팔을 쪼개지 못했을뿐더러 일말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파아아앗-!
이 초식 유성(流星).
절정에 달한 이기어검이 다시금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전과 사뭇 다른 기세로 한층 더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천수관음의 굳건한 존재감은 흐트러트리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생각해라, 생각해.’
주호는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가르치던 후기지수들에게도 누누이 했던 말이 아닌가. 싸움이든 비무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사고를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지형지물, 무공, 상대의 수준, 그리고 내외의 모든 요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활용해야 했다.
척.
천수관음의 일장을 얻어맞고 튕겨 나온 검을 잡아챈 주호는 두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맹렬히 머리를 회전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일, 이 초식이 전부 막혔다.
그렇다면 청룡신공? 일섬과 유성은 청룡검식의 상위호환과 같다. 숙련도의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천수관음을 상대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
가장 강한 위력을 지닌 멸천이나 파천의 초식 역시 비슷한바. 그렇기에 주호는 혼원일극신공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청룡신공과 적해의 조화. 엄밀히 말하면 그 균형은 완벽하지 않다.’
혼원에 일극이라함은 오할 대 오할로 완전에 이른 것 같았지만, 이토록 격렬한 싸움 가운데 신공을 운용하는 데만 심력을 쏟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느 한 쪽이 치우치거나 모자람이 계속되었으나, 신공은 이제껏 문제없이 발현되었다.
‘즉, 균형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할 때는 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그 요지는 균형이 아니라 조화. 서로 배합이 얼마나 되든 일극을 이루면 되는 것이었다.
꽈득.
주호의 양팔 위로 시퍼런 힘줄이 불쑥 튀어 올랐다.
청룡신공과 적해를 비유하자면 속도와 힘이라 할 수 있다. 신공 가운데 청룡기의 비율이 높아지면 미묘하게 기의 발출 속도가 빨라지는바. 그와 반대로 적해의 비율이 높아지면 휘두르는 검의 위로 무게가 실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천수관음조차 찢어발길 강력한 힘이었다.
“…윽.”
적해(赤海)의 기운을 운용하는 것엔 항상 위험이 따랐다.
입신지경에 이르러 제법 그 주도권을 찾은 듯싶었지만, 의식적으로 그것을 운용하자 피부를 뚫고 나올 듯 경맥에서 미쳐 날뛰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
신승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 기괴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바. 하지만 그는 이미 승무전을 끝내기로 마음먹었고, 이다음 한 수로 결착을 내고자 했다.
주륵.
주호는 이를 악물었다.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물든 시야 앞으로 눈가를 타고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초인적인 의지로 그 반동을 견뎌냈고, 적해의 비율을 무려 칠할까지 높인 신공의 발현에 성공했다.
‘이보다 더 높은 비율로 조율할 가능성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
한데 모은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은 평소의 것과 달리 짙디짙은 잿빛을 띠었다.
이제까지 이어진 격전으로 실금이 잔뜩 퍼져 나간 검은 그 막대한 기운을 품은 것이 버거운지 기긱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마, 이 일격이 마지막일 터.
“아미타불.”
신승은 나지막한 불호와 함께 승무전의 끝을 알리는 손을 뻗어왔다.
불광대승신공(佛光大乘神功)
복마여래신장(伏魔如來神掌).
대천세계(大千世界)
여기까지 버틴 주호에 대한 경의를 담아 그가 할 수 있는 소림 최강의 절기가 발해졌다.
쉬이이이익-!
천수관음이 지닌 수십 개의 팔이 한점을 타격한다. 그 앞에 선 주호는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며 자신을 덮쳐오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삼 초식.”
고개를 살짝 흔들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을 씻어낸 주호는 왼발을 살짝 내민 채 몸을 굽혔다.
일 초식 일섬, 이 초식 유성에 이어 신승과의 싸움 도중 그의 간절함이 닿은 세 번째 초식의 발현.
설사 마귀에게 목숨을 팔아넘기더라도 절대 질 수 없다는 그의 의지는 검 끝을 타고 흐르며 하나의 형상을 이뤘다.
꽈득, 꽈드득.
전신의 힘이 검으로 쏠린다. 근육이 뒤틀리며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터지며 핏물이 흘러나와 검 끝을 타고 흘렀지만,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하늘에 정신을 집중했다.
“나찰.”
삼 초식 나찰(羅刹).
지금껏 그가 휘둘렀던 검들과는 달리 거칠기 짝이 없는 검결이었다.
일정한 묘리도 없었고, 중심도 잡히지 않았으며, 정도(正道)의 무공이라고 보기에 너무나도 패도적이었다.
츠츠츠츠-.
주호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주변을 뒤덮는 기묘한 기운에 신승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어찌 기괴한……!”
불광대승신공이 극성에 이르면 그 공능이 천수관음의 형태로 발휘되었다.
수십 개의 팔을 지닌 천수관음 앞에서는 그 어떤 마공이나 사공도 제대로 된 힘을 펼칠 수 없는바.
싸워본 적은 없지만, 설사 천마라 할지라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긴 힘들 것이리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끼이이이익.
마귀가 가소롭다며 조소를 흘리는 듯한 꺼림칙한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한층 더 짙어진 잿빛 기운은 천수관음의 상서로운 서기(瑞氣)를 침식한바. 신승은 일그러진 얼굴로 두 팔을 힘껏 뻗으며 일갈했다.
“갈-!”
감히 천수관음 앞에서 사이한 잡기를 부리다니. 인내심이 툭 끊어진 그는 주호를 향해 직접 몸을 날렸다.
그럼에도 주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나찰(羅刹), 제 몸을 불사른 분노로 하늘을 찢고 부처를 베어 가를지니.
“…….”
이윽고 둘의 신형이 교차했을 때 승무련은 고요한 적막에 잠겼다.
심지어 객석에 있는 이들도 단 한 사람조차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두 눈을 크게 뜸으로 승무전의 승자를 찾았다.
파각.
그런 적막을 깨트린 것은 주호가 쥔 검에 생겨난 균열에서부터 비롯된 소음이었다.
이전까지의 격돌로도 한계에 다다라 있던 검이 조금 전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채 수명이 다한바.
그렇기에 그 끝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며 산산이 조각났다.
“…아!”
그 때문에 지켜보던 대부분이 신승의 승리를 점쳤다.
검절의 위세가 높고 승무전에서 보여준 신위가 충분히 놀라울 만하나, 신승은 그 수십 년도 더 전부터 소림의 고수로 이름을 알려왔다.
쌓아온 역사의 깊이가 달랐기에 당연한 결과라 여겨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소림의 방장인 혜능 대사만이 침중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던 제 사형을 바라보았다.
신승은 잠시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더니 길게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곤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고, 마찬가지로 무심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주호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 초식의 이름이 무엇인가.”
“…나찰, 나찰(羅刹)입니다.”
“나찰이라.”
신승은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어찌 그렇게 소림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위에 담겨 있던 선명한 의지는 크게 와닿았으니.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기다랗게 찢어진 도복의 소매를 가다듬고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끝에서 왜 검을 거두었는가. 자네의 기세는 제법 매서웠다네. 끝까지 승부를 보았다면 공멸(共滅)은 무리더라도 내게 적잖은 상처를 입힐 수 있었겠지.”
허나 주호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껏 그토록 사력을 다해 싸움을 이어왔으며 어째서 최후에 승부를 포기했는가.
그 물음에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뒤늦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승무전(僧武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서로 무를 겨루는 장이니 그 정도는 충분하였지요.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생사결밖에 더 되겠습니까.”
신승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그리 이야기했지만, 무심코 머리에 열이 올라 진심을 발휘했다. 아마 그대로 격돌했었더라면 서로 큰 내상을 입고 물러났을 터.
“그리고, 마교와 전쟁 중이지 않습니까. 신승께서 저와 양패구상하셨다고 알려지면 어떤 식으로든 정도 무림에 타격이 있을 테지요.”
“거기까지…….”
거기까지 바라보았는가.
단지 소림의 행사인 승무전을 바라보았던 신승은 주호의 말에 진심으로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 제 패배입니다. 대환단을 얻지 못하고 신검을 잃은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승부는 공정해야 하는 법이지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주호는 짐짓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했다.
좌중은 깔끔한 자세로 패배를 받아들이는 그 모습에 과연 검절답다며 환호했지만, 어렴풋이나마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신승은 감격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검객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신검(神劍)을 대가로 걸었으며 이토록 겸허한 자세로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이라니.
‘난세에 신성(新星)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자자할 법하구나.’
가히 대협의 풍모가 아닌가.
애초에 이 싸움은 공평하지 않았다.
승무전은 예로부터 상대가 누구든 나한승이 상대하는 것이 원칙. 그간은 입신지경의 고수가 도전한 적이 없어 쭉 그 규칙이 유지되었지만, 이번만은 검절이란 고수의 특례로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아무리 검절이 불세출의 고수라 할지라도 이미 완성된 무인인 신승을 이기는 것은 무리인바.
즉, 승패의 결과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호는 단 한 번의 불평조차 입에 담지 않았고, 끝에서조차 겸허한 태도로 결과를 수긍했다.
‘완패로구나.’
신승은 한숨을 흘렸다.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눈앞의 조그마한 이익, 소림의 대환단을 주지 않기 위해 정도 무림의 거인(巨人)이라는 이런 행태를 보이다니.
그는 짤막하게 불호를 중얼거리곤 자신에게 포권한 주호를 향해 말했다.
“…아닐세. 나의, 아니, 소림의 완패이네. 승무전의 승자는 자네여야 함이 옳네. 그것이 순리이자 올바른 이치일 따름이니.”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좌중이 시선을 모으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승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이것은 방장의 대리로 승무전을 진행한 빈승의 이름으로 공인하는 것이니,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주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대로 결과가 흘러가 참으로 다행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