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신승(神僧) 혜선 대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검절의 방문은 정말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거기에 오랜 친우인 하월벽의 서신까지 가져왔을 줄은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렇기에 신검을 거는 조건으로 승무전의 개최를 허락했지만, 소림의 보물을 쉬이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 더 타격을 줄 수 있을 줄 알았거늘.’
백보신권의 의의는 그 이름대로 백보 밖에서 맞추는 원거리 타격에 있지 않았다.
백보 밖을 울릴 정도의 강렬한 파동(波動), 그것이 백보신권의 의의였다.
보통의 고수라면 권기니 권강이니 하는 것들로 파동을 대체했겠지만, 그 경지가 극에 달한 자신은 그런 잡기(雜技)를 사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순수한 무예의 파동이 일으킨 여파는 주호의 왼팔에 버젓이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강권(强勸) 중의 강권이라 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신승은 다시금 정권의 자세를 취했다.
의지가 일어난다면 곧 움직임에 이를 것이니. 심즉동의 경지야 이미 옛적에 이룬 지 오래였기에 언제든 백보신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척.
주호가 피로 얼룩진 왼팔을 가볍게 털어내며 두 손으로 검을 쥐자 신승은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불심이 깊은 대사(大師)에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소싯적 투전불승(鬪戰佛僧)이라 불리며 소림제일의 투사라 칭송받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같은 입신지경이더라도 그 가운데 상중하가 있음을, 음……?”
신승의 눈가가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 활화산처럼 치솟아 오르던 주호의 기세가 단숨에 사라진 것이었다.
승무전을 포기한 것은 아닐 테니 무언가 다른 태세를 취한 것일 터. 하지만 그런 것에 호락호락 당해줄 만큼 자신은 무르지 않았다.
툭.
주호가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허공이 뒤틀렸고, 이전과 같이 기괴한 소음과 함께 공간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음.”
신승은 짧게 침음성을 토해냈다.
이전과 같은 현상이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달랐다.
찌이익─!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검 한 자루가 삐죽 솟아올랐다.
그것은 이내 공간 자체를 베어 갈랐고, 망설임 없이 신승에게로 쇄도했다.
“어림없다!”
백보신권의 유일한 약점은 그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초식을 펼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금 전과 같은 결과를 끌어내려면 아무리 신승이라 할지라도 준비과정이 필요한바. 주호가 그것을 파악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림의 절예는 백보신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꽈아악.
주먹 쥔 신승의 손으로 검지가 중지가 펴지며 거칠게 허공을 긁었다.
쉭쉭.
그러자 쇳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무언가가 허공을 꿰뚫으며 주호가 달려나가는 궤적 위로 박혀 들기 시작했다.
‘탄지신공!’
주호는 어깨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거친 기운에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을 튕겨 지풍(指風)을 날리는 것을 무공으로 승화시킨 신공. 더욱이 신승이 쏘아 보낸 것은 탄지신공 중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나선탄강지(螺線彈强指)로 감히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쾌속한 것이었다.
팅-!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맞아야 하는 것은 맞고 막아낼 수 있는 것은 막아냈다.
온몸이 선혈로 얼룩졌지만, 가까스로 치명적인 상처는 틀어막은바. 선승의 지척까지 이른 주호는 매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이전과 같은 상단.’
떨어져 내리는 검을 보며 신승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피하기엔 늦었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두 팔을 교차하며 부동(不動)의 구결을 되새겼다.
항마금강기(降魔金剛氣).
선명한 황금빛을 내는 호신강기가 그 전신에 가득 둘리며 주변을 광채로 휩쓸었다.
지켜보던 소림의 무승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불호를 읊었고, 다른 객인(客人)들은 그 고절한 경지에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주호와 신승이 격돌했을 때 거센 충격과 함께 자욱한 분진이 그 위로 피어올랐다.
강석(强石)으로 승무련의 바닥 위로 커다란 균열이 일고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도 모자라 막대한 기파가 객석까지 침범하며 들이닥치자 나한승들이 앞으로 나서는 것으로 그것을 해소했다.
“음.”
나한승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깊은 침음을 흘렸다.
승무련 위에서 일어나는 비무가 서로의 전력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단지 그 기파를 상쇄한 것만으로도 이런 충격이라니 새삼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이었다.
“…허어.”
신승은 탄식을 토해내며 입가를 비틀었다.
항마금강기는 소림 제일의 호신강기. 이름답게 마기에는 절대적인 상성을 지니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그 단단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격돌의 결과를 보아라.
주호가 내리찍은 검은 신승이 교차한 두 팔 사이에 막혀있다. 얼핏 보면 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 같지만, 실상은 조금 다른 결과가 닥쳐왔다.
주륵.
신승의 이마에서부터 새빨간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그 기운은 대체 무엇인가.”
항마금강기가 깨졌다. 그 사실보다 놀라운 것은 주호의 검에 은은히 서린 잿빛 기운이었다.
편협한 사술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입신지경에 이른 고수의 새로운 심득이 이루어낸 무공인가.
신승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 기운을 살폈지만, 아무런 특징을 찾아낼 수 없었다.
‘정(正)도 마(魔)도 아니야. 진원지기, 아니 자연지기와 닮아있군. 어찌 인간의 몸으로 저토록 중립적이고 순수한…….’
치우침 없는 완전한 중도.
소림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탈각의 경지가 아닌가. 입신지경에 다다라서도 그 편린조차 잡지 못했거늘, 설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보게 될지 몰랐다.
“보잘것없는 기공입니다. 승무전 중에 왈가왈부할 정도는 아니지요.”
주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리 대답했다.
그의 목표는 승무전의 대가로 따라올 대환단이다. 신승과 무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사양할 바가 아니었으나, 우선순위가 뚜렷한 상황에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렇지, 내 실언을 했네.”
탓!
신승은 그 말과 함께 거칠게 주호의 검을 뿌리치는 것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닦아내곤 천천히 심호흡했고, 소림 무공에 제일 근간이 되는 부동심을 되찾았다.
‘그 말대로다. 승무전을 두고 다른 것에 눈이 팔린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망신.’
만일 주호가 더 강자였더라면, 이 싸움이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었더라면 치명타를 입고도 남았을 터의 틈이었다.
“아미타불.”
신승은 나지막하게 불호를 읊는 것을 끝으로 흔들렸던 정신을 다잡았다.
항마금강기가 깨진 것은 무공의 모자람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다.
소림의 무공은 완전무결. 그것을 뇌리에 새기며 천천히 구결을 따라 진기를 운용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떠오르며 이전과 같이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불광대승신공(佛光大乘神功).
마치 그 뒤로 거대한 부처가 자리 잡은 것처럼 거대해진 존재감에 주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이.’
소림을 대표하는 고수인 신승의 진면목. 가히 전율이 오를 정도로 심후하고 천지를 가득 채우는 듯한 기세였다.
절그럭.
짧게 숨을 뱉어내는 것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주호는 검을 다잡았다.
신승이 부처의 힘을 빌려 입신지경의 반열에 이르렀다면 자신은 그를 꺾기 위해 나찰(羅刹)이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약해졌던 마음은 날숨과 함께 내뱉어버리곤 제 검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리고 그 앞에 서자, 신승은 제 뒤에서 비치는 후광과 달리 지극히 고요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받아보아라. 감히 말하건대 이것이 소림의 전부일지니.”
일개 개인이 소림의 전부를 말한다. 보통이라면 광오하다고 할 법했지만, 그것이 신승이라면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렸다.
촤아악-!
신승이 합장하자 그 뒤에 있는 부처가 팔을 뻗는다. 그때까지 잠잠했던 상태창은 그 움직임이 하나의 무공이 발해지는 기수식임을 알려왔다.
복마여래신장(伏魔如來神掌).
여래가 태곳적 지상에 군림하는 수십만 악귀를 때려잡았을 때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소림 최강의 절기.
찬란히 빛나는 그 손바닥을 눈앞에 둔 주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걸 버텨낸다면.’
승무전의 승리는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가리라.
하지만 천지를 짓누르는 그 압력을 인간의 피륙으로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면,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그조차 베어버린다면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맹렬한 기세로 몸집을 부풀려 나간다. 시작은 한 줄기로 미약하기 짝이 없었으나, 청룡신공과 적해의 기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하나의 근원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종래엔 그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힘이 단전에 깃들었으니, 주호는 이를 악물며 검을 바로 세웠다.
검 끝으로 베고자 하는 의지를 날카롭게 벼렸고, 오직 그 일념을 담아 출수했다.
일 초식 일섬(一閃).
입신지경에 올라 심득을 얻어 만들어진 주호만의 무공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찬란한 빛이 모여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선을 이었고, 그것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부처의 손을 갈랐다.
저저적─.
막대한 내기가 흩어지며 허공이 울음을 토해냈다.
승무련이 부서지거나 바닥이 진동한다는 따위의 여파는 없었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실수한다면 그 거대한 힘에 짓뭉개져 피륙 덩어리가 되어버릴 그런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복마여래신장의 초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신승은 짤막하게 불호를 내뱉었다.
그러곤 광채를 더했고 하나 남은 팔이 재차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이 초식 유성(流星).
주호의 검에서 떠나간 검이 새하얀 빛무리를 그리며 솟구쳤다.
절정에 달한 이기어검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좌중은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며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호흡조차 잊은 채 집중했다.
하늘 위로 솟구친 검은 이내 그 이름대로 한 줄기 유성이 되어 떨어져 내렸으니.
쉬아아아아악!
부처의 남은 팔이 수십 갈래로 도륙나며 그 파편이 흘러내렸다.
불심이 깊은 무승들은 그 참혹한 광경에 두 눈을 감으며 연신 불호를 읊은바.
하지만 신승은 여전히 고요한 표정으로 주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두 초식이 자네의 최선이라면, 대환단은 허락할 수 없네.”
단순히 대환단 때문이 아니었다.
승무전이 소림에 지닌 무게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아아아앗-!
절정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광채가 한 단계 더 빛을 발하며 찬란함을 더했다.
그러자 두 팔을 잃은 부처의 등 뒤로 수십 개에 달하는 팔이 나타났으니.
“…천수관음(千手觀音).”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주호는 입술을 씹었다.
태곳적 악귀를 때려잡은 신화를 재현하려는 것인지 그 웅장함은 이루어 말할 것이 없었다.
객석은 이미 그 거룩함에 감화된 뒤였다. 무승들은 연신 불호를 읊었고, 불자(佛子)들은 바닥에 엎드려 계수배를 올렸다.
“항복을 선언하게. 그리한다면 부처의 자비로 끝까지 가지 않겠네.”
신승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것은 친우의 서신을 가져온 이에 대한 마지막 배려. 하지만 주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비를 구하기엔 제 처지가 여유롭지 않습니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는 것인가.”
죽지는 않겠지만, 필시 얼마간 요양해야 할 큰 상처를 입을 것이 분명할 터.
하지만 주호는 이미 귀를 닫은 채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했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바.
부처를 잡기 위해서라면 나찰(羅刹)이 될 각오는 이미 옛적에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