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승무전(僧武戰).
본래는 그 이름답게 소림 내에서 내려오는 유서 깊고 전통적인 행사였다.
삼백 년 전을 기점으로 그 의의가 바뀌긴 했지만, 감히 소림이라는 이름 앞에 승무전을 신청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몇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한 것으로 주호 이전에 마지막으로 있었던 승무전은 무려 삼십 년 전이었다.
“…….”
남궁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무전은 숭산의 뒤편인 승무련(僧武演)에서 이루어진바. 학관의 대연무장에 뒤지지 않는 널찍한 크기로, 그 주위엔 승무전의 참관을 위한 소림의 고수들이 가득 자리했다.
어딜 가나 반질거리는 민머리가 가득한 그 광경은 제법 우스운 것이었지만, 그들에게서부터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세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소림의 고수뿐만 아니라 무언가의 용무로 소림을 방문하고 있던 내빈까지 객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삼십 년 만의 승무전과 검절의 이름은 그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한 것. 그 대부분 두 눈을 반짝이며 승무련의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릭.
주호가 먼저 그 위에 올라섰다.
가벼운 몸놀림과 표홀한 신법에 좌중은 나지막하게 감탄을 토했고, 일부 내공이 깊은 이들은 대략이나마 그 경지를 짐작했다.
뒤이어 올라온 이는 나한당주 지현이었다.
그는 좌중을 향해 짧게 포권을 하며 불경을 읊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선고했다.
“금일 이 자리를 만든 것은 근 삼십 년 만에 승무전의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강호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그렇기에 소림은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정도 무림의 정기를 우뚝 세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천과 감숙에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판국에 소림에서 이런 행사를 벌이는 것에 대해 잡음이 나올 수 있었다.
지현은 정도 무림의 정기를 운운하는 것으로 그것을 미연에 차단했고, 소림의 이름이 주는 무게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도전자는 검절(劍節) 주호. 방장께서 공인하신 사안으로 소림은 대환단을 대가로, 검절은 신검(神劍)을 대가로 승무전을 개최하는 바입니다.”
대환단과 신검.
어느 것 하나 쉬이 볼 수 없는 이름이 아닌가. 그렇기에 좌중이 웅성거릴 찰나, 주호는 검대에 매인 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강호에 신검이라 불리는 부류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바. 그렇기에 수많은 시선이 그가 쥔 검으로 몰려들었지만, 지현의 말과 달리 평범한 철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검은 본산에서 맡았소이다.”
그런 그들의 의문을 종식하려는 듯 지현은 짧은 말을 덧붙이고는 방장 혜능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쉬이익.
그와 동시에 열여덟 명의 무승(武僧)이 연무장 위로 솟구쳤다.
소림을 대표하는 이들인 십팔나한(十八羅漢)이었다. 원래는 백팔 명으로 이루어진 구성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명을 상대로 백 명이 넘는 인원이 나선다면 소림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지금 역시 열여덟 명이 나선 것은 마찬가지나, 단순히 수적 우위가 아니라 소림이 자랑하는 백팔나한진의 축소형인 십팔나한진을 상대로 하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십팔나한. 한 명 한 명이 최소 초절정 이상이다.’
백팔나한에 이름을 올린 것만 할지라도 소림을 대표하는 고수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승무전을 위해 선정되었다는 것은 백팔나한 중에서도 수위로 꼽는 고수라는 것이었다.
주호는 승무련 위에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만일 목숨을 걸고 벌이는 생사결이었더라면 촌각에 결과가 나올 싸움일 터.
하지만 승무전은 서로의 무를 겨루는 과정이다. 소림이 납득할 만한 강함을 보여주어야 했기에 살생은 허락되지 않았고, 손속에 과함이 없어야 했다.
‘더 골치 아프군.’
그래도 소림이 자랑하는 십팔나한진과 겨룰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겠냐고 생각하며 기수식을 취할 찰나, 승무련 위로 다른 인영이 난입했다.
“…시, 신승께서 어찌.”
“아무리 보아도 승무전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구도라서 말이야.”
승무전의 시작을 고하려던 지현은 신승(神僧) 혜선 대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하지만 신승은 단호히 고개를 젓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호와 십팔나한을 바라보았다.
“균형이 맞지 않아. 이건 자네로서도 힘든 싸움이겠지.”
“…그렇습니다.”
주호는 솔직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현과 십팔나한들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인바. 그렇기에 신승이 피식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무리 신승이시라 할지라도 승무전은 신성한 행사입니다. 소림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승무전에 형평성 따위를 운운하며 조율하려는 것은.”
“아, 미안하군. 검절의 편을 들려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어.”
신승은 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켜보던 좌중 역시 신승과 검절의 관계에 의아함을 품기 시작하던바. 하지만 신승은 짧게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십팔나한으로는 어림도 없다. 백팔나한이라면 모르겠지만.”
“…검절을 상대하기에 저희로는 역부족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백팔나한은 설사 천마(天魔)라 할지라도 대적이 가능한 진법입니다. 그런 것을 어찌……!”
“쯧쯧쯧.”
눈에 쌍심지를 켜며 반박해오는 나한승의 말에 신승은 가볍게 혀를 찼다.
“보아라. 외모가 젊다고 그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방장과 나를 제외하고 검절의 검을 받아낼 수 있는 이가 있겠느냐.”
“……!”
그 말에 나한승은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검절의 무위가 드높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고작 이십 대 중반에 다다른바. 무림맹 쪽에서 활약을 펼친 것은 들었지만, 그 정도에 준할 정도란 말인가.
“방장께서 결정하신 사안이다. 형평을 따지기에는 상황이 우습지만, 같은 입신지경의 고수라면 부족하지 않겠지.”
신승이 씩 웃으며 주호를 돌아보았다.
“…입신지경!”
공인하는 듯한 그 말에 나한승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입신지경이라니, 저 젊은 청년이 말인가. 정말로 그렇다면 십팔나한이 물러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바. 그렇기에 고개를 돌리자, 주호는 머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운이 따랐습니다.”
“입신에 오른다는 것은 인간의 반열을 벗어났다는 의미. 불가에선 큰 뜻을 지니지요. 그것만으로도 존경받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나한승은 짧게 포권을 올린 것을 끝으로 후련한 표정과 함께 다른 이들과 같이 승무련을 내려갔다.
이제 그 위에 남은 것은 주호와 신승, 그리고 나한당주 지현뿐.
신승은 우두커니 서 있던 지현을 바라보며 턱을 까딱였다.
“진행하게.”
“…소림을 대표해 나한당주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승무전이 시작됨을 선포하는 바이오!”
지현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빠르게 그 말을 내뱉고는 훌쩍 뒤로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러면 충분하겠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신승이 상대라면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은연중에 생각은 하고 있었던 차이니, 오히려 기꺼울 따름이었다.
“숭산은 높디높으니, 그것을 넘어서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네.”
신승은 제자리에 서서 가볍게 두 손을 들어 올린 것으로 승무전의 준비를 끝냈다.
주호는 철검을 손에 쥔 채 오른발을 살짝 내밀었고, 서늘한 표정으로 답했다.
“애초에 그럴 각오가 없었더라면 소림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쉬익.
한 줄기 질풍이 둘 사이를 가른다. 어느덧 그 지척까지 이른 주호가 힘껏 허공을 베며 공간을 갈랐다.
일말의 망설임 따위 서리지 않은 상단 베기. 신승의 목을 쪼갤 것처럼 칼날이 휘둘러졌고, 그 날카로운 기세에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인가. 훌륭한 판단이지. 허나 입신지경에 이른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도 걸맞은지는.”
신승은 분명 한 걸음조차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검을 손쉽게 피해낸바. 주호의 관점으로서는 그의 몸이 허깨비가 되어 자신의 검을 흘려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것이 금강부동신법……!’
소림이 자랑하는 절예 중 하나인 금강부동신법.
단단함으로는 금강(金剛)이요, 지극히 절제된 움직임은 부동(不動)에 가까우니 닿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신기(神技)였다.
휘릭.
허공을 가른 기세를 이용해 몸을 회전시킨 주호는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날카롭게 발을 내질렀다.
이미 무공의 형식과 형태에 얽매이는 것을 벗어난 그에게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툭.
신승의 대처는 간결했다.
정수리를 쪼갤 듯 내질러진 발끝을 손등으로 툭 친 것으로 궤도를 바꾼 뒤, 발려진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가볍게 움켜쥔 주먹을 내밀었고, 닥쳐오는 상대의 기세를 이용해 그 가슴을 직격했다.
쩌엉─!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이 승무련 위로 진동한다. 주호는 그대로 허공에서 밀려나 원래 있던 곳에서 한참이나 더 뒤의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젊음이 좋군.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그걸 막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주호는 검등 위에 선명히 남은 신승의 주먹 자국을 보며 쓰게 웃었다.
가슴을 얻어맞을 찰나, 그는 검을 끌어당겨 그것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신검(神劍)이었더라면 흠집 하나 남지 않았겠지만, 일반 철검으로는 부러지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었다.
-와아아아!
객석에 자리한 이들이 큰 환호를 질렀다.
찰나에 이를 짧은 공방이었지만, 그 가벼운 움직임만으로도 그들의 가슴을 울리기 충분했던바.
신승은 썩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자세를 취했다.
“환호에 보답하는 것이 도리겠지. 이것도 한 번 막아보겠나. 본산의 절기인 백보신권(百步神拳)이라 한다네.”
“…백보신권.”
금강부동신법과 마찬가지로 소림의 절예. 백보 밖에서 상대를 타격할 수 있는 무공으로, 신권이라 불릴 정도로 고절한 권법이었다.
주호는 제 몸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백보 밖에서 검강을 날려 상대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공 자체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정도면 필시 예사로운 것이 아닐 터.
더욱이 신승이 펼치는 백보신권이라는 것만으로도 경계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후욱.
신승은 마보 자세로 두 다리를 벌린 뒤 두 팔을 돌리며 원을 만들었다. 그러곤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쥐더니 정권의 자세로 가볍게 내질렀다.
“……?”
다만, 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런 기파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권강이라도 내뿜을 줄 알았건만, 허공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기기긱─.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충격에 주호는 필사적으로 땅을 박차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그대로 일그러지며 거센 반향을 일으키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금 전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 공간 채로 몸이 짓뭉개졌으리라는 것이었다.
뚝…뚝….
걸레짝이 된 왼팔을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승무련의 바닥을 적셨다.
마치 누군가 거친 톱날로 사정없이 썰어버린 듯한 상처였다.
잠시 그것을 지켜보던 주호는 입가를 비틀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신승이지.’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합니다.]
싸움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