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12화 (212/300)

#212화

“맹주께선 잘 지내고 계시는가.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직접 뵌 지는 일 년이 넘어가니 말일세.”

“정정하십니다. 방장께도 안부를 전하라 하셨지요.”

“허허, 감사하기 그지없군. 검절의 위명도 근래 잘 듣고 있다네. 과연 소문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군. 그 젊은 나이에 그러한 경지에 올랐으니 말이야. 본산의 제자들이 보고 배워야 하겠어.”

“과찬이십니다. 근래 아직 부족함을 느껴 정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호오, 혹시 그 예의 무림맹에서의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인가.”

“예. 자신을 마황(魔皇)이라 칭하는 마두였습니다. 이름은 채진철이라 했지요.”

“마황 채진철이라. 들은 적 있는 이름이다. 분명 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천마를 뛰어넘은 고수라고.”

잠자코 있던 혜선 대사가 처음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유달리 마교에 대해 적개심이 강하다고 하더니 그 반응을 보아 제법 유력한 사실인 듯했다.

“그래서 검절과 남궁세가의 후계자께서 본인을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혜능 대사는 부드럽게 그것을 물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단지 맹주의 전언으로 생각한 듯싶었지만, 주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맹의 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부탁?”

검절과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소림에 개인적으로 부탁할 것이 무어란 말인가.

혜능 대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을 찰나, 주호는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먼저 이것을 신승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 말인가?”

잠자코 흘러가던 상황을 지켜보던 혜능 대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는 검절이나 남궁은커녕 맹주와도 별 인연이 없던바. 그렇게 떨떠름한 얼굴로 서신을 받아들였고, 봉인을 풀러 천천히 그것을 읽어나갔다.

“…이건.”

혜능 대사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주호는 긴장한 모습으로 그를 살폈고, 이내 떨리던 눈이 꾹 감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구나, 벽이의…….”

사정을 모르는 혜선 대사가 의아한 얼굴로 제 사형을 재촉한다. 잠시간 여운에 빠져 있던 혜능 대사는 이내 감정을 거두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싯적에 은혜를 입은 이가 있습니다. 그가 연락을 보내 이 청년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으니 어찌 거절할 수 있는지요.”

“그런 사정입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응당 보답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노력을 아끼지 않겠네.”

“대환단 입니다.”

호기롭게 내뱉어진 장담에 주호는 짤막한 대답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 여파는 작지 않은바. 혜선 대사의 움직임이 굳었고, 혜능 대사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만큼 대환단이 소림에서 지닌 의미는 큰 것이었다. 둘은 잠시간 침묵하더니 서로 시선을 보내더니 이내 침중한 낯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말을 바꿔서 미안하네만, 내 은혜를 입은 것은 맞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네. 그걸로 소림의 보물인 대환단을 요구하기엔 이치가 아니지 않는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소림의 행사를 부탁드릴 수는 있겠지요.”

모호한 주호의 말에 혜선 대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승무전(僧武戰)을 이야기하는 겐가. 그것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없던 일이네. 그리고…….”

쿵.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입신지경에 다다른 두 고수가 내뿜는 압박감은 가히 천재지변이나 다름이 없는바. 그런 막대한 영향을 끼치면서도 아무런 여파를 보이지 않는 것은 신기(神技)에 가까웠을 따름이었다.

“대환단을 얻고자 한다면 도전하는 이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걸어야 하네. 설마 무조건 승리를 장담하니 걸지 않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주호는 부드럽게 기운을 뿜어내 몸을 떨고 있는 남궁연을 감싸 안았다.

승무전이니 무언가를 걸어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전부 처음 듣는 것. 하지만 침상에 누운 천우희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모든 고민을 버렸다.

툭.

그는 검대에 매인 검을 풀러 자신 앞에 내려놓았다.

그 초탈한 모습에서 의도를 짐작한 남궁연이 놀라 숨을 들이켰을 찰나, 주호는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검(神劍)입니다. 이름은 청룡이라 하지요. 들어는 보셨을 터입니다.”

“…청룡신검?”

과연 소림의 방장과 신승이라는 이름답게 견식이 넓은 것인지 곧바로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주호는 천천히 검신의 일부를 빼냈고, 그 위로 청룡신공의 진기를 주입했다.

우웅─.

청명(淸明)한 검명이었다.

어찌 한낱 쇠붙이 주제에 이토록 맑은소리를 낼 수 있을까.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든 혜선 대사는 천천히 신검을 살펴나갔다.

“…분명합니다. 내 과거에 신검을 본 적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이 검이 신검이 아니라면 그 어느 검이 스스로 신검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확신을 지닌 채 고개를 끄덕이는 사형의 모습에 혜능 대사는 나지막하게 불호를 읊으며 두 눈을 감았다.

청룡신검은 강호 삼대 신검으로 불리는 것 중 하나. 그 값어치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한 것이었다.

더욱이 검객에 있어 검은 생명과도 같은 법. 그것이 신검에 이를 수준이라면 어찌나 귀한 것일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주호는 선뜻 그것을 대가로 걸겠노라 말했다. 그 눈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터.

짧은 시간 침묵하던 혜능 대사는 이내 두 눈을 뜨며 물었다.

“진심이로군. 허면 어째서 대환단이 필요한지 물어도 되겠는가.”

“…살려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제 목숨이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지요. 그러니 한낱 검 따위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한낱 검 따위가 아니거늘.

그렇기에 더욱 심금을 울리는 말이었다.

큰 전쟁이 일어난 가운데 소림의 입장에선 대환단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어찌 무를 수 있을까.

잠자코 신검을 바라보고 있던 혜선 대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저는 친우의 부탁도 있고, 거부하지 못하겠습니다. 방장께서 결정하시지요.”

“이미 답이 나온 듯한데 구태여 입에 담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소림의 방장, 혜능 대사는 신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의기를 높게 사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대환단을 준비할 테니 곧바로 승무전을 진행토록 하지. 신검은 이쪽에서 보관하겠네.”

“알겠습니다.”

승무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신검이 품에서 빠져나가자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이미 병장기의 수준에 구애받는 경지는 넘어선 지 오래. 아쉬울 뿐이지 크게 영향은 없었다.

“일단 여독을 풀게. 자네도 시간이 필요할 터니 저녁 이후로 사람을 보내겠네.”

“알겠습니다.”

이쪽의 상황이 시급한 것을 이해한 듯 이례적인 속도로 승무전을 준비해준다고 하였다.

주호는 짧게 포권하는 것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있던 남궁연 역시 황급히 그 뒤를 따랐고, 이내 마중 온 나한당주에 의해 잠시 여독을 풀 방으로 안내되었다.

“…남궁 소저의 방은 다른 곳이 있습니다만.”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나한당주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 말해달라는 것을 끝으로 자리를 비웠다.

“…….”

침상 끝에 걸터앉은 주호는 심란해 보였다. 남궁연은 그런 그의 옆에 앉아 슬며시 손을 붙잡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될 거예요, 교관님이라면. 승무전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이때까지 해오셨던 것처럼 어렵지 않게 승리하시겠죠.”

“…그렇게 만들어야겠지.”

그 결연한 표정에 남궁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호법을 서주겠느냐. 승무전이 있을 때까지 힘을 비축해놓아야겠다.”

“알겠어요. 그러실까 봐 따라 들어온 거니까요.”

나한당주는 자신들이 남사스러운 짓을 하지 않을까에 대해 살짝 의심한 듯했지만, 첫 경험이 소림이어서야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

그런 것은 자신 쪽에서 사양이었기에 가볍게 콧방귀를 끼곤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시작한 주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남자에게 빠졌는지.’

훤칠한 인상의 미남이었지만, 그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남자들은 많았다.

그럼에도 눈길 하나 빼앗기지 않은 채 오로지 주호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

그녀는 문득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승무전을 열어 대환단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이쪽에서도 내걸어야 한다니.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들었지만, 주호가 망설임 없이 제 검대에 매인 신검을 풀러 내려놓자 놀란 마음이 들었다.

그녀 역시 검객으로 제 검을 소중히 여기는바. 어떤 거래의 조건으로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주호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설령 신검을 잃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교환을 조건으로 내걸었더라면 마찬가지로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을 터.

남궁연은 그런 주호가 멋있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만일, 만일 내가 언니와 같은 상황이라면 그래도 망설임 없이 신검을 내걸어 줄 수 있을까?’

잘못된 마음인 것은 안다.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시험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짓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바.

하지만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심히 궁금할 따름이었다.

“…….”

그렇게 얼마나 내공을 운기 하는 주호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굳게 닫혀 있던 눈이 뜨이며 시릴 정도로 깨끗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눈을 피하세요?”

자신이 부담스러운 것인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슬쩍 눈을 피하는 주호의 모습에 남궁연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기에 저돌적이다시피 할 정도로 대놓고 물어보았고, 이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입가에.”

“입가에?”

입가에가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녀는 본능적으로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들어 입을 훔쳤고.

“…….”

언제 흘렸는지 모를 침을 닦아낼 수 있었다.

일순간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침을 흘렸지? 아니, 흘렸다면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지? 설마 그의 얼굴을 보고 입맛이라도 다셨던 것일까.

화아악-! 하며 얼굴이 달아올라 홍당무가 됨과 동시에 그녀는 허둥지둥하며 변명했다.

“자, 잠깐 졸았어요. 추태를 보여서 죄송하네요.”

“…괜찮다. 운기 하는 데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으니.”

졸았던 것 치고 너무나도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주호는 구태여 그것을 꼬집지 않았다.

그렇게 남궁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 채 얼굴을 가다듬고 있을 찰나, 그의 시선이 방 밖으로 향했다.

“왔는가.”

똑똑-.

장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주호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문이 절로 열렸고, 그 뒤에 서 있던 나한당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승께서 준비가 끝나셨다며 오시길 청하셨습니다.”

승무전(僧武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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