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동틀 무렵이었다.
저물어가는 어둠 위로 서리가 내려앉아 있는 가운데, 간단히 짐을 꾸린 주호가 방 밖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후.”
답답한 마음에 짧은 한숨을 내뱉자 새하얀 김이 새어 나온다. 아직 겨울이 도래하지도 않았건만, 싸늘한 공기는 너무나도 매정하게 그의 폐부를 훑었다.
하루 동안 푹 쉬고 떠나라는 하월벽의 말에 그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긴 했다.
일행을 불러놓고 간략히 사정을 설명했으며, 사신문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수련을 받기로 했다.
오로지 주호만이 짐을 챙긴 채 다시 하남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밖으로 나선 것이었다.
“저도 준비는 끝났어요.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
곧바로 움직이지 않은 것은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척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언제 출발한다고 이야기해둔 적이 없었거늘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남궁연 역시 짐을 꾸린 채 당당히 그 앞에 자리했다.
“연아. 내 어지간하면 동행을 허락했겠지만.”
“알아요.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그러면 이해해주겠구나.”
주호는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남까지는 마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며칠이 걸리는 거리. 하지만 홀로 이동한다면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행을 두지 않고 홀로 떠나려 한 것이었다.
“네, 그래서 함께 가려고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냐.”
“아니요. 잘 이해하고 있어요. 상황의 심각성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요.”
“그러면 왜…….”
여기서 설왕설래를 할 여유 따윈 없다.
슬슬 기분이 거슬리려 할 찰나, 남궁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해왔다.
“사실 저도 제가 짐이 되리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문주께서도 간곡히 부탁하셨거든요.”
“…문주님이?”
주호는 미간을 좁혔다.
하월벽에게는 친우인 신승에게 전할 서신을 건네받았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거늘 어째서 남궁연에게 동행을 부탁하였단 말인가.
“조급해하는 교관님 대신 시야를 넓게 봐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행선지가 소림이니 같은 명문인 남궁의 이름도 빌릴 수 있고요.”
“……후.”
주호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얼마나 여유가 없어 보였으면 문주가 손수 그녀에게 동행을 부탁했겠는가.
그들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고민이 들었고, 결국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대신 뒤처지는 것을 챙길 시간은 없으니 잘 따라오너라.”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는 각오하고 온 것이니.”
남궁연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하자 주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사흘 뒤, 하남 등봉시(登封市)의 숭산(嵩山).
그들은 정도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이 자리한 그 앞까지 다다랐다.
사실 도착은 하루 전날에 했지만, 이 지역에 접어들자마자 탈진해버린 남궁연 때문에 밤 동안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연신 죄송하다 말해왔지만, 사실 주호의 움직임을 따라온 것만으로도 장하다 할 수 있었다.
당초에 계획했던 것도 그 앞에서 하루를 머물며 매무시를 가다듬을 생각이었으니.
“몸은 괜찮으냐.”
“네, 어제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해주신 덕분에 전부 회복했어요.”
숭산을 오르는 와중 물어온 질문에 남궁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기력과 내력을 전부 쥐어짜며 달려왔기에 자칫 잘못하면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직접 나서서 그 몸을 보살폈고, 원활하게 진기를 수급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
남궁연은 태연한 척을 가장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주호를 슬쩍 곁눈질하며 그 얼굴을 살폈다.
사실 어젯밤은 그녀에게 있어서 잠들지 못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추궁과혈을 했다곤 하나 몸 곳곳을 스치는 그 손길에 절로 긴장했었다.
혹시나 그런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다른 쪽의 일로 마음이 심란한 것인지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래, 일단 언니 먼저 구하고 보자.’
이 순간에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 자신도 좋아하는 천우희가 빨리 병상을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는 마음이었다.
일의 경중은 충분히 구분할 수 있는 절제력은 지니고 있기에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욕구를 꾹 눌러 참으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참, 예약은 하셨나요? 무림인이 소림사에 들어가려면 하다못해 며칠 전에 서신을 보내야 하는데.”
“…몰랐다.”
이전에 몇 번 남궁세가의 사절로 소림에 방문했던 그녀와 달리 주호는 초행길이었다.
더욱이 경황 중이라 그런 것은 고려하지 못한바. 하지만 소림의 문턱에 다다르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긴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거 오늘 밤을 새워도 힘들겠는데요. 슬쩍 승려에게 가서 검절이라고 말해볼까요?”
“아니, 천하의 소림이다. 그렇게 한다고 한들 힘들겠지.”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행렬을 서 있는 이들 중 간간이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경지의 고수가 섞여 있었다.
그런 이들조차 줄을 서 있는 판국이니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기조를 세운 것이리라.
“…그러면 어떻게 하죠?”
남궁연 역시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궁의 이름이 먹히는 것은 그 내부로 들어간 뒤의 일이었다. 사절로 온 것이 아닌 이상 출입에 있어서는 그리 영향을 끼치기 힘들 터.
하지만 주호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시주께선 차례를 지켜주십시오.”
줄의 말미를 이탈해 그 앞으로 걸어가자 행렬을 관리하고 있던 스님이 엄숙히 경고해왔다.
다른 이들 역시 무슨 짓이냐는 시선을 보내왔을 때, 주호는 품 안에서 슬쩍 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맹(盟)」
옥 위에 새겨진 그 글씨는 무림맹의 칙사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스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옥의 색을 보아 가짜로 보이지는 않는바. 설마 소림의 앞에서 무림맹을 사칭할 이가 있겠나 싶었다.
설사 가짜로 판별된다고 하여도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만일 터.
“…시주께선 따라오시지요.”
“배려에 감사드리오.”
그가 앞장서자 주호는 재빨리 뒤를 따라 걸었다.
주변에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지만, 주호와 남궁연 둘 다 얼굴이 가려질 정도로 삿갓을 깊숙이 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다행이로군.’
주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단철량이 준 패가 먹히지 않는다면, 은은한 기세를 발산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초절정의 상위, 그리고 입신지경의 고수들만 느낄 정도의 것으로 방장 정도의 존재라면 알아차릴 수 있을 터.
다소 소란은 있겠으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선 어떤 수단도 사용할 생각이 있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알겠습니다.”
주호와 남궁연이 안내받은 곳은 나한당이었다. 인도를 끝낸 스님은 합장하며 자리를 떠났고 둘은 잠자코 그곳에 앉아 찾아올 이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묵직한 기세를 지닌 장년 한 명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미타불. 소림의 지현이라 합니다.”
[상태창]
이름: 지현
별호: 정명권(正明拳)
직업: 나한당주
나이: 마흔다섯
소속: 소림
무공: 백보신권
경지: 초절정 (五/十)
호감도: 中中
무림맹의 이름을 빌렸기 때문인지 나한당주가 직접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지현의 겉모습은 영락없이 불심이 깊은 스님의 그것이었지만, 전신에서 은은한 기세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남궁연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질 정도로 높은 위세였으나, 주호는 한점의 동요 없이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정천과 더불어 맹에 적을 두고 있는 주호라 합니다. 급한 와중이라 결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검절(劍節)! 맹에 이런 출중한 고수가 다 있나 싶었더니 소문이 명불허전입니다, 허허. 그러면 그 옆의 분은…….”
“남궁연이라 합니다. 일전에 뵌 적이 있었지요.”
남궁연은 얼굴을 가린 삿갓을 벗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허어, 이것 또 의외의 얼굴이.”
지현은 주호와 남궁연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목적을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한당주로서 여러 이야기를 듣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두 분께서 이곳에 오신 것이 제법 막중한 사안인 듯합니다.”
용건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주호는 짐짓 망설이는 척을 해 보인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장을 뵐 수 있겠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어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직접 뵙고 전해드려야 할 이야기 같습니다.”
“으음.”
지현은 신음을 흘렸다.
소림의 어지간한 대외 업무는 나한당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방장까지 도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바. 평상시라면 어렵다며 자신 선에서 거절했겠지만, 이번에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맹주의 전언을 지닌 것인가.’
아니면 맹과 소림의 비밀스러운 합작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최대한의 은밀함을 요구하는 것. 나한당주인 자신에게조차 밝히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간 기다려주시겠소이까.”
“부탁드립니다.”
지현이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자, 남궁연은 참아왔던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여기까진 어떻게 오긴 했네요.”
“맹주께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야.”
무림맹의 위세를 사사로이 이용했다.
내키는 대로 사용하라며 패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대상이 소림이라면 단철량 역시 적잖게 부담을 받을 터.
하지만 주호는 앞서 말했듯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었다.
“신승은 하루 대부분 방장과 함께 소림의 정세를 살핀다고 하였다. 방장을 찾아가면 신승 역시 볼 수 있겠지.”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얼마간 조용히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나한당주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되돌아왔다.
“방장께서 들라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례적인 상황이라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다행이로군요.”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포권을 올리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소림의 가장 깊은 곳, 방장이 기거하는 곳을 심의당(深意堂)이라 하였다.
천천히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저릿한 기세가 온몸을 휘감아오기 시작한다. 슬쩍 주호가 고개를 돌리니 남궁연은 이전과 달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지현입니다. 맹에서 나온 손님분들을 모셔왔습니다.”
지현은 그렇게 말한 후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주호가 먼저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고, 남궁연이 뒤따라 들어왔을 때 그 안에 먼저 자리하고 있던 두 고승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소림의 방장 혜능 대사.
그리고 소림의 제일 고수인 신승(神僧) 혜선 대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주호라 합니다.”
“남궁연입니다.”
이미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을 터이니 소개는 짤막하게 끝냈다.
“앉게나.”
“감사합니다.”
만남을 허락하는 말에 주호는 그 앞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남궁연 역시 같은 모습으로 잔뜩 긴장했는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그리 딱딱한 태도로 있지 않아도 된다네. 소림은 들인 손님을 환영하는 법이니.”
소림의 방장, 혜능 대사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주호는 그 찰나 혜능과 혜선 대사의 파악을 끝냈다.
방장인 혜능은 얼핏 보면 온화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거목과 같다. 필시 성정이 단단할 터.
신승 혜선은 딱딱한 바위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 눈으로 숨길 수 없는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이야기 들은 대로 성격이 거셀 것으로 보였다.
‘쉽지 않겠구나.’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뱉은 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