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방안에 가득한 알싸한 약재 향이 코끝을 찌른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에서 신선한 공기가 들락거리고 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런지 그리 의미는 없었다.
“…….”
주호는 말없이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침상을 내려다보았다.
더없이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때로는 찌푸리고, 때로는 정색하는, 하지만 그 어떤 모습도 아름답던.
천우희는 파리하다 못해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있었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 마로 만든 면사를 얼굴 위에 씌운다면 죽었다고 해도 납득이 갈 정도의 상태였다.
“닷새 전까지는 그래도 의식이 있었건만, 이제는 눈도 뜨지 못하더군.”
그 뒤에 서 있던 사신문주 하월벽은 침중한 안색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막역한 사이인 것은 이미 옛적에 알고 있었다.
천우희를 손녀로 여기고 있던 자신이 이렇게 참담한 심정일진데, 그와 연인 사이였던 주호는 어떻겠는가.
주호는 침상 앞에 주저앉아 조심스럽게 이불 밑에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혹여나 자신이 온 것을 깨닫곤 눈을 뜨지 않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짓궂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실낱같은 맥박과 보통 사람보다 낮은 체온은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해주었다.
“저에겐.”
피부로 와닿은 냉정한 현실에 주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저에겐 너무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어찌하여…….”
“…미안하네. 우희의 선택이었어. 그녀의 병세를 아는 이는 문 내에서도 두셋에 불과하네. 당찬 아이였지 않은가. 동정을 받기 싫어했네. 끝까지 의연한 모습으로 있고 싶어 했어.”
하월벽이 위로해보지만, 주호에게는 닿지 않은 말이었다.
잠시간 그대로 천우희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호는 그의 뒤쪽으로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노인에게 물었다.
“…방도는 없는 겁니까.”
“어쩌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알지 못하네. 이 아이의 병을 발견한 지난 이십 년간 할 수 있는 방도는 모두 해보았어.”
약선(藥仙)은 회한이 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세대 이전의 고수로 주호 역시 옛적에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의원이었다.
그런 약선조차 두손 두발을 다 들 정도였으니 정말로 방도가 없다는 것일 터.
“할 수 있는 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이라네. 그마저도 석 달을 넘기기 힘들 것이야.”
약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정도 지경에 이르렀으면 차라리 사혈(死血)을 짚어 편히 보내주는 것이 순리이자 도리였다.
하지만 익히 들어온 청룡의 성정을 보아 끝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바. 결과가 예정된 슬픈 미래에 그저 서글플 따름이었다.
“대환단, 대환단은 어떻습니까. 대환단으로 부족하다면 자소단이나 태청단이라도…….”
고개를 든 주호는 핏발선 눈으로 약선을 바라보았다.
직접 소림이나 무당에 찾아갈 심산이었다.
화산에는 은혜를 입혀둔 것이 있으니 그것과 더불어 검절의 이름으로 상응하는 보답을 추후에 해주겠다는 약조한다면 가능성이 있을 터.
소림과 무당은, 주지 않는다면 비무라도 신청해 얻어올 생각이었다.
예전에 얼핏 듣기로는 그와 비슷한 관례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의 무공이라면 설사 소림의 방장이 직접 나선다고 하여도 그리 밀리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신문에 영약이 없겠는가. 자소단은 몰라도 대환단과 태청단은 이미 썼네. 그렇기에 우희가 이때까지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하늘이 정해준 수명을 거스르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이야.”
약선은 어찌 보면 냉정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단호히 말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나 힘든 법. 단지 그 자신은 나이를 먹었기에 조금 더 많은 죽음을 보았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구나. 시간만이 해결해줄 문제니.’
하월벽과 약선이 시선을 보내자 주호는 고개를 돌려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둘에게 말했다.
“잠시, 혼자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어여 비켜줍시다.”
하월벽은 약선의 어깨를 밀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다시 고요해진 방안. 참담함에 일그러졌던 주호의 얼굴 위로 진지함이 깃들었다.
‘상태창.’
허공에 생겨난 푸른 창이 천우희의 상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의 전신을 축소한 듯한 그 모습 위로는 내부에서 흐르는 피와 진기의 흐름까지 보여주며 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상 징후가 탐지되었습니다.]
“치유 방도는?”
[기록에 없는 병세입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오랜만의 불러온 상태창은 맹렬한 기세로 천우희의 몸을 살폈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를 조사하려는 듯 짙은 푸른빛이 그 몸을 훑었고, 뜻을 알 수 없는 문자를 기록하며 줄을 거듭해갔다.
이윽고 그것이 한참이나 밑에 다다랐을 때.
삐빅.
잠시간 멍하니 천우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주호는 그 이질적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결과가 나온…….”
사실 아무리 상태창이라 할지라도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에 반신반의했다.
그 약선도 지난 이십 년간 찾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최후의 희망으로 매달린 언덕이지만, 착잡하기 그지없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눈앞에 표시된 상태창의 내용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기본적으로는 구음 절맥과 유사하다. 변형이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 가장 큰 가능성은 그 체질과 중간에 들어온 영약의 영향이 큰 것으로 예상되는바. 여파를 가늘고 길게 만든 탓에 쌓인 독소가 한 번에 체내를 휩쓸어…….”
분석된 내용은 주호가 보기에도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즉, 구음 절맥은 제법 호전되었지만, 그것이 치유되며 새로이 파생된 병이 눌러앉았다는 것이었다.
“…치료 방법은.”
대환단, 그리고 청포석(靑葡石)의 가루를 달인 물이었다.
전자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고 후자는 세간에 생소한 것이었지만,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청포석. 분명 비동에 있던 것이었지.’
푸른빛이 감도는 단단한 돌이었다.
다른 영약들을 풀어 설명해주던 것과 달리 아무런 설명이 적혀 있지 않았기에 한쪽에 내버려 두었다.
그런 청포석의 가루가 절맥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니.
벌컥.
주호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곤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하월벽과 약선의 기척을 찾아내곤 그 뒤쪽으로 순식간에 닥쳐갔다.
“자, 자네 무슨 일인가.”
그 갑작스러운 발진에 약선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월벽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화색이 깃든 주호의 얼굴을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설마…….”
“청포석, 청포석의 가루를 달인 물입니다. 대환단과 그것을 함께 복용시키면……!”
“청포석?”
약선에게도 생소한 이름인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이내 서서히 그 입이 벌려지기 시작하더니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 그건 미친 짓이네! 청포석에 분명 멸균(滅菌)의 효과가 있는 것은 맞지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네! 어지간한 정신으로는 버틸 것이 아니야!”
“희석하면 됩니다.”
“희석을 무얼로 하는지는 알고 있는가!”
“피 아닙니까. 생혈(生血), 살아있는 피. 제 몸에 주입해 희석한 다음 그것을 달이면 되는 문제입니다.”
“…미친 게로군 미친 것이야.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네. 그리고 자네가 청포석을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백여 년도 더 전의 약품이네. 이젠 만드는 곳도 만들 곳도 없어!”
“아니, 한 곳 알고 있습니다. 주먹만 한 크기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성성한 눈빛을 내며 말해오는 주호의 광기 어린 모습에 약선은 신음을 금치 못했다.
피로 희석한 청포석을 달여 마신 뒤, 대환단을 먹인다면 분명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엄청난 고난이 수반되리라.
“…일단 내 앞으로 대환단과 청포석을 가져오게.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지.”
“알겠습니다. 문주, 혹 사신문에 남은 대환단이 있습니까.”
“끄응.”
하월벽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주호가 저리 확신을 지닌 채 말할 정도면 제법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일 터.
약선 역시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곤 했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없네. 우희에게 쓴 것이 마지막이었어. 대신 태청단은 두 알이 있네만.”
문제는 더 이상의 대환단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급의 태청단에는 여유가 있지만, 주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대환단이어야 합니다.”
“소림이라도 털어야 하는가.”
“입구 쪽에서 소란을 일으켜 주시겠습니까. 제가 안으로 들어가 대환단만 빼내 오겠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공적으로 몰리기 딱 좋은 행동이군.”
하월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호의 눈을 보아하니 자신이 응하지 않으면 홀로라도 나아가 일을 저지를 생각인 듯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소림은 강호의 그 어떤 문파보다 사신문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니.”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사신문이라기보단 개인적인 관계네. 소싯적 강호에서 활동할 때 인연이 닿은 적이 있었거든. 현 방장의 사형인 혜선이라고 아는가?”
“신승(神僧) 말입니까?”
신승(神僧) 혜선 대사.
현 소림 방장의 사형으로 당대 소림의 정점이라 알려진 고수였다.
소림답지 않은 화끈한 성정으로 누구보다 마도(魔道)를 증오했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고 옳다구나 하며 참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오래된 인연이니 이 늙은이의 청을 무시하진 않겠지. 곧바로 대환단을 달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야기 자리는 만들어낼 수 있을 걸세.”
“교섭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방도가 있는가.”
“소림의 규율 중에 방장이 지정한 대상과 비무해 성과를 보인다면 대환단을 준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음.”
하월벽은 침음을 흘렸다.
그 역시 옛적에 들어본 적이 있었던 이야기로, 진위가 궁금해 신승에게 물어보았던 기억도 있었다.
그때의 대답이 아마…….
‘궁금하면 직접 해보라는 것이었지.’
하월벽은 현재 입장상 사신문을 비우기 힘들었다.
함께 인원을 보내주고 싶어도 어차피 소림에 들어가는 것은 주호와 더불어 한둘이 끝일 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사 싸우게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 지지 않겠습니다.”
자신이 물러난다면 천우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절대 그럴 수는 없기에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네. 내 서신을 써줄 터이니 하루만 기다리게나.”
“하루는 너무…….”
담담히 자신을 바라보는 하월벽의 시선에 주호는 입을 다물었다.
서신을 쓰는 데에 하루나 걸릴 리는 없다. 상황의 경중을 모를 리 없을 터이니 자신보고 머리를 좀 식히라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홀로 보내기엔 조금 걱정스럽군. 백호에게 말해 동행을 부탁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러면 좋겠지만, 문의 일로 바쁘시지 않습니까. 현재 우희의 일까지 끌어안으신 탓에 이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신 것으로 압니다.”
백호가 있다면 든든하겠지만, 그마저 빠져 버린다면 사신문의 움직임에 치명적인 공백이 발생하게 될 터.
“홀로 다녀오겠습니다. 달포 이내로 돌아오지요.”
그러니 밑 준비를 부탁한다. 그 무언의 시선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약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