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먼 거리를 훌쩍 뛰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주호의 신형이 바닥에 내려설 때까지 일말의 소음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
어둠은 잠잠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었을 때 그 가운데 찍히는 수두룩한 붉은 점들을 볼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는가.”
침묵 사이로 날카로운 살기가 마치 칼날처럼 팽배해있다.
마치 자신이 뒤쫓아오리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당황한 기색 없이 은은한 달빛 사이로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더럽고 추악한, 살의로 얼룩진 밤의 공기가 폐부를 훑으며 형용하지 못할 불쾌감을 자아냈다.
괴물을 잡으려면 그 자신도 괴물이 되어야 하는 법. 아쉽게도 애초에 노리던 목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렇다 한들 결과가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오늘.”
어둠 가운데 뜨인 그의 두 눈동자에는 시뻘건 기운이 휘몰아쳤다.
어째서인지 진신절기인 청룡신공를 사용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또한, 이런 잡스러운 일에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신마(神魔)의 기운인 적해를 끌어올린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단숨에 죽기를 바라거라. 그리하지 않는다면 지옥을 볼 터이니.”
허공을 움켜쥔 그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애초에 주호는 살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근래 천우희의 일과 더불어 여러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인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마침 그것을 발산한 좋은 기회가 닥쳐왔으니 그로서는 거리낄 필요가 없었다.
척.
그 서슬 퍼런 기세에도 불구하고 마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모두 시커먼 안광을 뿜어내는 것이 자신들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신감에서 나온 발로로 보였다.
물론, 터무니없는 착각일 따름이었다.
퍽.
제일 선두에 있던 일류 고수의 머리가 깨어져 나간다. 어느새 그 위로 도약한 주호가 무릎으로 백회를 짓누른 것이었다.
그 단순한 움직임조차 놓쳐 버린 마인들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자욱한 혈향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주호의 몸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았고, 이내 다시금 자리를 박차 허공으로 솟구쳤다.
“한 번에 쏟아 부어!”
하지만 그들이 받은 명령은 이곳을 침입한 적들을 말살하는 것.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일류를 비롯해 초절정 고수까지 수십이 자리한 이상 팔다리 하나 정도는 앗아갈 수 있으리라.
“버러지들이.”
주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평소였더라면 처참히 뭉개진 시신에서 뿜어지는 혈향이 거슬릴 리만도 하건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흥겹기 그지없다.
원래는 한 명 한 명 각개격파하며 그 수를 줄여나가려 했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혈기(血氣)에 마음이 바뀌었다.
탁.
바닥에 내려선 그의 주위로 수십의 고수가 일시에 들이닥친다. 대다수가 일류 고수지만, 그 뒤로 절정 고수가 열, 초절정 고수가 셋이나 있었다.
청룡단과 백호단이 함께 나선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정리할 터.
허나 주호는 그들의 개입을 허락지 않았다.
쉬익.
가장 가까이 떨어져 내리는 검을 향해 그는 무심히 손을 뻗었다.
마인의 얼굴로 희열이 깃든다.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육체가 무쇠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이상 검기가 깃든 검을 맨손으로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입신지경에 이른 고수는 인지를 벗어난 존재인바. 곧 주호의 손은 날카로운 검신을 움켜쥐었고.
파각.
이내 산산이 부숴버렸다.
“……어?”
마인은 무심코 헛바람을 내뱉었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맨손으로 병장기를 빼앗거나 밀어내는 공수입백인……?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가볍게 손을 내밀어 자신의 검을 움켜쥐는 것으로 가볍게 부쉈을……. 갈비뼈가 전부 함몰된 마인의 생각이 이어진 것은 거기까지였다.
우드득.
뒤이어 다른 한 명의 목을 분지른 주호는 축 늘어진 그 시신을 손에 쥔 채 깊은숨을 내쉬며 주춤거리던 마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으으.”
이전과 같이 당당한 기세는 없다.
모두 사신(死神)이나 야차(夜叉)를 보듯 침음성을 흘리며 뒷걸음질쳤을 따름이었다.
“나오지 않는 것인가. 마교의 이름을 달고 수하의 뒤에 숨어 있다니, 겁쟁이가 따로 없군.”
주호는 피식 웃으며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직 이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들은 한 명도 나서지 않은 상태. 앞의 수하들이 전부 죽어야 나설 생각인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감히.”
모욕을 받은 마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는 제 옆에 있던 수하들에게 눈짓하더니 이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과연. 검절(劍節)이라 칭할 만하다. 검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무위라니. 본인은 신교의…….”
“쫑알쫑알 시끄럽군.”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을 자른 주호의 모습에 마인은 벼락과 같이 검을 뽑아 내질렀다.
그 찰나에 물 흐르는 듯한 발검으로 검강까지 발현시켜 목을 베는 실력은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가히 무림맹 청룡단주인 초위현과 자웅을 겨뤄볼 만한 수준으로 마교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을 터.
하지만 그것을 맞이하는 주호의 태도는 간결했다.
휘릭─.
검을 뽑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이전과 같이 가볍게 손을 내밀며 손가락 끝을 날카롭게 세웠고, 휘둘러지는 검에 맞섰다.
‘어리석은 만용!’
마두는 두 눈을 번뜩였다.
검기 서린 검을 부수는 것은 자신 역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그보다 더 강대한 기운이 서린 검강을 상대하는 것은 만용에 불과했다.
헌데…….
“…어, 어떻게.”
콰직.
마두가 휘두른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그저 주호가 내지른 손날에 따라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꺾였을 따름이었다.
턱.
멍하니 있던 마두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그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우악스러운 힘에 황급히 발을 내디디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보다 주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꽈드득.
“으아아아아악-!”
그의 어깨가 팔 통째로 뽑혀 나왔다. 뼈는 끊어지고 근육은 찢어져 덜렁거렸고,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턱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쳤다.
주호는 그 중앙에 일 권을 내질렀다. 그러자 가슴이 움푹 파이며 뒤로 날아갔고, 받아내려 했던 수하 몇을 덮치는 것을 끝으로 절명하고 말았다.
툭.
주호는 쥐고 있던 주인 잃은 팔을 바닥에 내던졌다.
아직 신경이 살아 있는 것인지 손끝이 경련하며 맥동했지만, 그 위를 가볍게 짓이기며 여전히 서늘한 안광을 내뿜었다.
두둑.
주호는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제법 많이 죽인 것 같지만, 아직 남은 숫자가 수십에 달한다. 밤이 깊었으니 얼른 이들을 정리해야 다시 원활하게 사신문을 향해 이동할 수 있을 터.
그렇기에 한 걸음 앞으로 나설 찰나,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 왔다.
“…자네.”
“…….”
백호 양인철이 우려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음이 심란한 것은 알겠네만,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네. 우리가 살육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주호가 입신지경에 이르러 적해의 기운을 정복한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서린 섬뜩한 기운은 명백히 좋지 않은 것.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입신지경에 이르러 지독한 심마(心魔)나 주화입마에 든다면 쉬이 감당키 어려운 일이 되리라.
“…말씀에 따르지요.”
양인철의 우려와 달리 주호는 가볍게 두 눈을 감았다 뜬 것으로 적해의 기운을 완전히 가라앉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 더 걱정스러운 것은.
“수고했네.”
양인철은 그저 주호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
사흘 뒤.
호북 무한의 천와산(天窩山).
주호 일행을 실은 마차는 사신문이 자리한 천와산 인근까지 도착했다.
계절은 어느덧 추계에 접어든바. 산천의 초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울긋불긋한 빛깔로 물든 자연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이곳이 사신문이란 신비 문파가 자리한 곳입니까.”
선우연은 살짝 긴장한 눈치로 천와산의 전경을 올려다보았다.
주호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 그들에게 사신문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일러둔 상태였다.
사신문(四神門).
물밑에서 암약하며 마교나 혈천신교가 꾸민 음모와 모략을 맞아 치열하게 싸우는 신비 문파.
“어릴 적에나 들었던 이야기거늘 설마 진짜로 존재했을 줄은.”
당천유 역시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철대환이나 팽우혁, 그리고 남궁휘나 당소혜 역시 마찬가지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따라간다는 게 이것이었나.”
슬쩍 철대환이 악비산에게 물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주호를 따라가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는가.
산동악가의 적을 둔 상태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어렵겠지만, 신비 문파의 소속으로 활동한다면 그리 저해될 일은 없었다.
“난 이미 그곳의 무공을 사사하였다. 근래 빠르게 발전한 것도 그 영향이 크지.”
악비산은 씩 웃으며 제 창을 툭 쳤다.
그는 이미 백호의 계승자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아직 천후와 비교하자면 조금의 손색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 성장세를 본다면 머지않아 턱 끝까지 추격해갈 터.
“이곳부터는 걸어서 가야 한다. 모두 내리도록.”
주호의 말에 따라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천와산을 올랐다.
완연한 추계(秋季)인지라 날씨도 화창하고 천와산의 모습도 절경이라 하기에 문제가 없다.
그렇게 그들은 나들이 가는 분위기로 발걸음을 내디뎠고, 얼마 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 앞으로는 사람의 침입을 물리는 절진이 펼쳐져 있다. 평상시엔 살상력이 없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모두 앞사람이 내디딘 자리를 따라 걷도록.”
“예.”
신비 문파의 절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에 선우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향아.”
“네, 오라버니.”
주예향은 주호의 부름에 그 옆으로 달려가 손을 잡았다.
아직 그녀의 실력으로 진법의 정확한 자리를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바. 그렇기에 주호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야 했다.
“…….”
그 뒤에 서 있던 남궁연은 살짝 부러운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나아갔을까, 계절답지 않은 뿌연 운무를 너머로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오랜만이네요.”
제일 먼저 주호와 함께 들어온 주예향이 새삼스럽다는 시선으로 그 앞을 바라보았다.
웅장한 성벽은 예전과 다름없이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다. 뒤이어 진법을 넘어온 다른 이들 역시 각기 다른 감탄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산 위에 성이라니.”
“이 너머에 사신문이 있다고?”
특히 선우연과 당천유의 호들갑은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남궁휘와 팽우혁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고, 그 너머로 한 무리의 인원이 그들을 반겼다.
“장로님.”
“오랜만일세.”
일전 적해의 기운을 봉인하는 데에 크게 일조해주었던 사신문 일장로 곽무혁이 친히 나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반가움을 표했다.
“강녕하셨습니까.”
“뭐, 내 나이대가 다 그렇지 않겠나. 골골대며 갈 날만 기다리는 것이지.”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나저나 어떤가, 그쪽은. 백호에게 듣기로는 의도적으로 기운을 움직일 수 있다고 들었거늘.”
주호 일행을 안으로 안내하며 곽무혁은 은밀히 물었다.
아마 이곳으로 오기 전 학가장에서 보인 모습 때문에 그런 것일 터.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조금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흠.”
“…그나저나 우희, 그녀는 어디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