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결심은 확고했고, 결단은 빨랐다.
애초에 학관의 일정이 정지된 상태라 교관의 업무도 별로 없던바. 총 이틀에 걸친 일을 끝으로 그는 휴직계를 신청했다.
“맹 쪽의 일인가.”
“마음 같아선 말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관주인 설우진과 수석교관 팽대환은 난색을 표했다.
딱히 주호가 휴직계를 낸 것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그의 안전에 걱정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무슨 우려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아마 학관을 떠나는 즉시 제 행적이 그들의 귀로 들어가겠지요.”
주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절의 위명은 중원 무림뿐만이 아니라 마교나 혈천신교 쪽에도 초유의 관심사일 터. 그러는 가운데 학관을 떠나 움직인다면 그 정보가 삽시간에 퍼질 것이 분명했다.
“목적지가 호북이라 하였지. 동행은 있는가?”
“가급적이면 혼자 가고 싶지만, 아마 여럿 달라붙을 것 같습니다.”
“예의 후기지수들 말인가.”
당연히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나온 팽대환의 대답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둘을 만나기 전 이미 남궁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에게 잠시 학관을 떠나 호북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천후의 표정과 그의 태도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라 판단했을 터. 서로 말없이 눈빛만 교환하는 것을 보아하니 따라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아이들과도 잘 말해보겠습니다.”
“뭐, 자네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나. 그래도 몸조심하게. 알다시피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팽대환의 조언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현재 중원 곳곳에서 마교로 보이는 이들의 흔적이 시시각각 발견되고 있었다.
일부는 무림맹을 비롯한 정도 문파들이 나서서 정체를 밝힌 후 소탕했지만, 그 나머지는 뒤를 쫓을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린바.
그렇기에 그 인근 문파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을 습격해오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교관님.”
설우진 그리고 팽대환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제 집무실로 돌아온 주호는 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남궁연을 방문했다.
제 친우들을 대표해서 온 듯 담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보낸다. 그 모습에 짧게 웃음을 토해낸 주호는 문을 열며 안을 가리켰다.
“차 한잔하겠느냐.”
“얼마든지요.”
잠시간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남궁연은 두 손을 모은 채 차를 준비하고 있던 주호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분명 언니랑 관련된 이야기야.’
티가 심하게 날 정도로 힘없어 보이는 천후의 모습과 얼핏 보면 잠잠하지만, 그 눈동자 안에 시퍼런 불꽃이 일렁거리는 주호의 모습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었다.
서로 얼굴을 본 것이 벌써 몇 달은 지난바. 그렇기에 막연하게 임무 중 심각한 상처를 입었거나 무언가 안 좋은 일을 당한 것으로 보였다.
“호북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그래.”
“사신문의 일인가요?”
“정확히는 우희의 일이지.”
“…선 공자나 당 공자는 힘들겠지만, 저는 나름대로 명색이 사신문의 협력자에요. 동행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언니 걱정도 되고요.”
남궁연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그럴듯한 이유 몇 가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해놓았다.
하지만 주호의 얼굴을 보자 그것이 쏙 들어갔고, 솔직하게 자신의 내심을 밝혔다.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매몰찬 거절이었다.
남궁연은 그것도 예상했던 바였기에 입술을 씹으며 말을 이르려 했지만,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문의 허락은 받아 놨다. 다 함께 가자꾸나.”
“다 함께요?”
남궁연의 두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으나, 다 함께 가자는 것 역시 살짝 이해가 가질 않는 이야기였다.
사신문은 그 특성상 은밀함을 기조로 삼는다. 그렇다면 정체를 아는 이들이 적을수록 좋은바.
자신은 주호의 편이니 괜찮다만,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어쩔지 싶었다.
“위천강 그 녀석이 있었으면 안 될 이야기였지만, 다른 이들은 괜찮다. 어디 가서 떠들 녀석들은 아니니.”
그 일면에는 사신문의 자부심도 섞여 있었다.
혈천신교가 사신문의 위치를 모르겠는가. 수백, 아니 어쩌면 천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 물밑에서 대립하던 관계다.
그런 가운데서도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으며 굳건히 자리했다는 자신감이 팽배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동행의 이야기가 일단락되었으니 남궁연은 조심스럽게 화제를 옮겼다.
천후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평소 비석과 같이 단단하던 모습과 달리 툭 건들면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상태에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짐작한 대로다. 우희의 몸이 병마로 인해 그리 좋지 않아. 어쩌면 올해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
남궁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병마라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토록 건강하고 활기 넘치던 사람이 어째서 병에 걸렸단 말인가.
그 의문을 눈치챘는지 주호는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태생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란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지.”
“방도는, 방도는 없나요?”
주호 정도의 고수라면 혹시 모른다. 그런 희망을 담아 바라보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볼 생각이다.”
주호는 메마른 침을 삼켰다.
독이 아닌 병인 이상 당소혜 때처럼 내공으로 그 나쁜 기운을 태워버릴 수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사신문에는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고수가 여럿 있다. 그들이 그것을 시험해보지 않았을 리가 만무한바.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은 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상태창.’
무형지독의 존재와 해법마저 밝혀낸 상태창의 존재 때문이었다.
고금제일인이 남긴 유산이다. 삼류 무사를 입신지경의 고수로 만들 정도의 능력이니 절맥 따위는 어렵지 않게 치유할 방도를 찾을 터.
최악의 경우 자신의 내공을 전부 쏟아 부어서라도 그 목숨을 연명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이틀 후.
두 대의 마차가 익숙한 모양새로 학관을 나섰다.
주호 그리고 남궁연을 비롯한 원래 예정된 후기지수뿐만이 아니라 주예항과 당소혜, 그리고 팽우혁과 남궁휘까지 포함된 인원이었다.
처음 주호는 동생을 제외한 이들을 거부하려 했으나, 어떻게 안 것인지 각자 가주에게 서신을 보내 허락까지 받은 상태였다.
구태여 자신에게 부탁하는 글까지 적혀 있었으니 쓴웃음을 지으며 그 청을 받아들였다.
마차는 곧 하남 성읍을 빠져나가 호북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근방은 요 몇 주간 그들이 실전 감각을 기르기 위해 격렬한 비무를 벌였던 장소였다.
다들 창밖을 바라보며 힘들었던 그때를 회상하고 있을 찰나, 남궁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교관님!”
“괜찮다.”
달려가는 마차의 주위로 몇 개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품은 고수. 하지만 주호는 이미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술 더 떠 마차의 문을 열었다.
휘릭.
누군가 말의 안장을 박차고 몸을 날려 마차의 안으로 들어왔다. 절정에 달한 그 몸놀림에 다들 움찔했을 찰나,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로군.”
“단주를 뵙습니다.”
청룡단 부단주 장산철이 씩 웃으며 포권을 했다.
구릿빛 피부에 반들반들한 대머리, 그리고 그 험상궂은 인상에 장내에는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이거, 제가 분위기를 망친 것이 아닐지.”
“괜찮다, 원래 소개할 생각이었으니. 다들 주목하도록. 내 수하인 장산철이다. 이번 여정에서 우리의 호위를 맡아줄 것이다.”
“호위 말입니까.”
선우연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주호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과 예전은 다르지.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다. 나 혼자라면 모르겠으나, 전부를 신경 쓰는 것은 힘든 일이니.”
일백의 청룡단은 이미 옛적에 하남 시내에 들어온 뒤였다.
그 시기는 주호가 무림맹의 정문에서 마황 채진철과 맞서 싸우기보다 조금 더 전으로, 이때까지는 달아난 마황과 궁기의 흔적을 쫓는 데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이 호북으로 이어진 것을 보고는 함께 이동할 계획을 세웠고, 호위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합류한 것이었다.
-적들의 위치는 이미 특정해놓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력은 이전과 다름없나?
-예. 일류 고수가 오십, 절정이 열, 초절정이 둘입니다. 궁기와 마황으로 보이는 고수의 모습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 사이, 주호는 장산철의 전음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신문으로 가는 경로의 중간으로 하남에서 도주한 이들의 흔적이 이어졌다.
궁기와 마황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궁기가 단철량에게 혈겁을 빌미로 협박한 하남 시내에 숨어든 마인 무리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확인할 수 있었다.
‘연막인가. 아니면 미끼인가.’
도착하는 시기에 맞춰 다른 곳에서 임무 중이던 백호도 그곳으로 합류하기로 하였다.
자신과 백호라면 충분히 궁기와 마황을 상대해낼 수 있을 터.
-예정대로 한다. 백호께 시일을 잘 맞춰달라 연락을 넣도록.
-존명.
“그러면 저는 이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호와 전음하는 동시에 마차에 탄 후기지수들의 이야기를 받아주던 장산철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짓고는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 홀로 달려가던 말 위로 되돌아갔다.
이제 그들은 소수의 인원만 호위로 두고 은밀히 뒤로 따라붙을 터.
창밖을 바라보는 주호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사흘 뒤 호북 양명(陽明).
본래는 학가장이라 불리며 오래전 낙향한 문사가 머무는 장원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도 외진 곳에 있어 사람의 왕래가 적었는데, 이번에 입주한 이들은 마을과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인적이 뚝 끊겼고, 마을 사람들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외지인들을 경계하면서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한밤중. 학가장의 내부는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몇 명의 인원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다니며 살피긴 했지만, 양상군자라도 든다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없는 것 같군.”
주호는 학가장의 내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턱을 쓰다듬었다.
청룡단이 관측한 대로 그곳에서 궁기와 마황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텐가.”
“그래도 이놈들을 등한시할 순 없지요.”
이곳으로 오는 도중 합류한 백호의 물음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정면으로 나설 터이니 백호께선 뒤를 봐주시지요. 혹시 모를 때에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주호의 말에 백호는 속으로 침음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담담한 듯 보이나 그 눈동자에 짙은 살기가 어려 있다. 설마 봉인해두었던 적해(赤海)가 풀려난 것인지 의심이 들었지만,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할 터이지.’
주작과는 정을 통하던 사이가 아니었는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을 터.
백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을 찰나, 주호는 언덕 위를 박차 몸을 날렸고 이내 학가장의 중심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