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놀랍구나.”
신검을 수납한 주호는 너풀거리는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한 치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은 길이지만, 선명한 자국이 남아있다.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곤 하나 자신의 호신기(護身氣)를 뚫어내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 그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남궁연은 상기된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어떤가요?”
“스스로 만들어낸 초식이더냐.”
“네. 만천검우(滿天劍雨)라 해요. 당공자의 만천화우를 보고 심득을 얻어서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요.”
남궁연은 짐짓 자랑스럽다는 가슴을 펴며 말해왔다.
주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선우연을 비롯한 다른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남궁 소저가 내 무공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정확히는 당가의 무공이지.”
“언제 이런 무공을…….”
다들 놀람을 표해내는 것을 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알지 못했던 듯싶었다.
“창궁무애검법이 그 자체로 본가의 훌륭한 무공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요.”
“그렇지.”
“하지만 다른 절기들을 보면 손색이 있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죠. 호사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밋밋하다고 할까요?”
남궁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창궁무애검법은 일류의 무공이지만, 그 이상은 바라보지 못했다.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무공은 창궁무애검법도 섬뢰검법도 아닌 천뢰제왕신공. 세가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으로 그 이름과 같이 신공반열에 속하는 것이었다.
“남궁의 소가주로 인정받았지만, 천뢰제왕신공을 익히기 위해선 아직 경지가 낮아요. 그러니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죠.”
정확히는 주호의 옆에 서기 위한 발돋움이었다.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을 덜어내거나 보완하는 것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불가능한바. 하지만 그 끝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라면 충분히 해볼 법한 도박이었고,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인정하마. 동년배 중 그 초식을 받아낼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것이다.”
천후나 위천강 정도면 겨우 받아낼 수 있을까. 악비산도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래도 정면에 선다면 큰 피해를 입을 터였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기대하던 칭찬을 들은 남궁연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 말대로 이제 막 출발선에 섰을 따름이다. 아직 보여줄 것이 많았고, 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했다.
“…….”
그 뒤에 서 있던 후기지수들 역시 지지 않겠다며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
일주일이 지났다.
사천과 감숙에서는 마교와 연합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며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보자면 양측의 사상자가 천여 명에 불과한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학관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남은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련하거나 전세를 주제로 토론했다.
물론 주호 일행은 변함없이 학관에서 하남 밖에 있는 산기슭을 오가며 실전 감각을 기루고 지닌 무공을 손봤다.
무복 위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지만, 그만큼 각자의 눈빛이 생생해졌다.
“…….”
그리고 모든 일정이 끝난 어느 날의 저녁. 주호의 집무실이 자리한 건물 앞에서 서성거리던 이가 한 명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천후는 입술을 씹으며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 위를 올려다보았다.
본래라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함이 맞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과 청룡의 관계를 생각해보자면 차마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천 공자?”
그렇게 얼마간을 그 앞에서 머물렀을까,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남궁 소저.”
먼저 만남을 지니고 있던 것일까. 살짝 상기된 표정이던 남궁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의 얼굴에 의문을 드러냈다.
“교관님은 안에 계시오?”
“네, 방금까지 저랑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어요.”
“그렇군, 감사하오.”
“무슨 일이 있나요?”
그 말에 천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뒤 어떻게 해야 상담이라도 받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주제인지라 난처할 따름이었다.
“…말하기 민감한 주제라 곤란할 따름이오.”
“그러니 교관님을 찾아온 거겠죠. 이야기가 잘 풀리길 바랄게요.”
“고맙소.”
남궁연의 격려를 등에 업은 천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야기가 잘 풀릴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만, 언제까지 어영부영한 모습으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끼이익.
그가 주호의 집무실 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들어오라는 뜻에 천후가 그 안으로 발을 내디디니, 탁자 앞에 앉아있던 주호가 마시던 찻잔을 내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 맞은편에 빈 찻잔이 놓여 있다. 조금 전까지 남궁연이 앉아있던 자리일 터. 천후는 살짝 고개를 숙이곤 입을 열었으나, 이내 입술만 벙긋거리고는 침묵을 고수했다.
“……?”
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깊은 호수와 같이 담담한 태도를 보이던 천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공에 대한 깨달음? 아니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앉지.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여유는 있을 테니.”
주호는 남궁연이 마셨던 잔을 치우곤 새로운 잔을 꺼내 그 앞에 내려놓았다.
찻주전자는 식은 지 오래였지만, 가볍게 열양지기를 일으키자 다시금 연기를 뿜어내며 달궈졌다.
쪼르륵, 자신 앞에 따라지는 그것을 보며 천후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따뜻한 그것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혹시 근래 스승님께 연락받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달포 전쯤이 마지막이었다. 폐관 수련에 든 것으로 알고 있거늘, 혹시 다른 임무였느냐.”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말했다.
정보가 유출될 것을 우려해 행선지를 속이는 일은 여럿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닌바. 그가 유의 깊게 지켜본 것은 제자인 천후의 태도였다.
‘설마 위기에 몰렸다든지.’
그간 간간이 연락이 지연되는 때는 있었지만, 달포씩이나 침묵하는 일은 없었다.
“…스승님께선.”
주호의 시선을 받은 천후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와병 중이십니다.”
“…와병?”
“구음절맥의 한 종류로 보이는 불치병입니다. 그것도 증상만 비슷할 뿐 병명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증상이지요.”
첫발을 내디디는 것은 어려웠지만, 입이 열린 천후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십 대 중반을 넘기는 것이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작신공의 공능과 더불어 그 의지로 이때까지 현역으로 활동하셨지요. 하지만…….”
불꽃이 꺼져갔다.
아무리 신공이라 할지라도 하늘이 점지해준 명운을 거스르기는 힘든 것이리라.
그 노력을 어여삐 여긴 것인지 장작을 지피며 몇 년이란 유예를 주었지만, 순리를 역행할 수 없는 노릇. 천우희라는 이름의 불꽃이 꺼지기까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천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굵은 눈물이 그 얼굴을 타고 흐르며 무릎 위에서 꽉 쥔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천우희는 그에게 있어서 누구보다 깊은 관계에 있던 존재였다.
때로는 어머니 같았으며, 때로는 누나 같았고, 때로는 사모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렇기에 그 의지를 따라 주작의 념(念)을 이었고, 그 계승자의 역할을 완수해냈다.
“스, 스승님께선 교관님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덧없는 이 인생을 평생을 혼자 살아가리라 맹세하셨다.
누구와도 정을 통하지 않을 것이며, 이 빌어먹을 절맥을 자신의 대에서 끊는 걸로 만족하신다고 하였다.
…그런 분께서 처음으로 남자를 눈에 담으셨고, 마음에 품으셨다. 어찌 애틋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조심스레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던 천후조차 감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으니.
간간이 주호와 어울리는 남궁연의 모습을 볼 때마다 드러나는 서글픈 미소는, 절로 가슴을 아려오게 하는 것이었다.
천후는 벌게진 눈으로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
주호는 아무런 말없이 그것을 집었다. 천우희의 필체는 알고 있다. 그 자신이 휘두르는 주작도처럼 시원시원하고 정열이 넘치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서신 위에 쓰인 글씨는 참으로 빈약하고, 기력이 쇠해 있었을 따름이었으니.
잠시간 그 위를 쓰다듬던 주호는 천천히 읽어나갔다.
길게 쓸 여유도 없던 것인지 내용도 간단했다.
그에게 알리지 말되, 만일 들킨다면 이렇게 전해라. 만일 나를 보기 위해 사신문으로 돌아온다면 눈을 감기 전까지 널 보지 않을 것이다.
“…….”
소리 없는 탄식과 함께 서신이 구겨지며 그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가 그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달포마다 하루,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져가. 목까지 올라오면 그걸로 끝이고. 어릴 적부터 쭉 앓아온 병이고, 고칠 방법은 없어. 애초에 병명도 모르는걸. 지금도 그저 주작신공의 힘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거고.
-일 년 사이에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그 증상이 올라왔어.
-그런 내가, 사랑놀음 같은 걸 할 수 있겠어?
서글픈 미소는 뇌리에 박혀 있다.
그 이후에 말했던 자유로운 영혼이니 뭐니 하던 것은 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한 농이었을 터.
그때 천우희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주호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또…….”
숨죽여 훌쩍이고 있던 천후는 주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또 누가 알고 있느냐.”
“…후기지수 중에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문주님과 장로님들 정도입니다.”
“…….”
주호는 고개를 든 채 두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최소한의, 정말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해주었다면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 자신에게는 무황의 전신인 상태창이 있었다.
고작 삼류 무사인 자신을 입신지경의 고수로 탈바꿈시킨 신묘한 힘. 이것의 능력을 빌리면 천우희의 절맥을 치료할 방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터.
물론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포기하는 것은 모든 방법과 수단을 갈구해낸 뒤 해도 늦지 않는가.
“…스승님께서는 아마 지치신 걸 겁니다. 사실 교관님과 만나기 전까지는 그리 감정이 풍부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같은 사신문 내에서도 남들과 그리 교류하지도 않으셨지요. 그저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실 뿐이었습니다.”
달포마다 돌아오는 억겁의 고통. 그것을 평생 앓아왔으니 그 정신이 마모되고 스러진 것일 터. 더는 저항하고 발버둥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말이었다.
“그런 스승님께서 당신을 만나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으셨습니다. 행복하셨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천후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엎드렸다.
“부디 스승님의 가시는 길을 지켜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괴로운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저 역시 가슴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한다면…….”
적어도 웃으며 눈을 감으실 수는 있을 것이다. 천후는 목이 멘 탓에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
장내는 고요했다.
천후는 감히 주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자신에게 숨긴 배신감,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과 그 끝이 머지않았음을 바라보는 절망.
“…나는.”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이 열렸다.
천후는 그가 스승의 가는 길을 지켜봐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적어도 마지막 가는 길은 행복하게 해드리라. 그런 각오로 스승의 명을 어기고 이곳에 온 것이니.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내는 것이었다.
“나는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예? 어, 어째서.”
그 순간만큼은 천후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배신감이 컸던 것일까, 아니면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는 깊이의 사랑이었던 것일까.
일순간 오만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가라앉았을 때, 주호는 시퍼런 귀화가 어린 눈으로 천후를 바라보았다.
“고작 병마 따위가.”
한마디, 한마디.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 따위는.”
미칠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으니.
“추호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을 따름이다.”
그 선명한 의지에 천후는 두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