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남궁연으로서는 살짝 섭섭한 마음을 표한 것이었다.
무림맹에서 일주일씩이나 머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 자신도 남궁세가의 소가주로 드는 귀가 여럿 있었으니. 하지만 돌아온 직후 정도는 먼저 찾아올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교관으로서 바쁜 것을 알기에 참고 기다렸거늘, 부른 것이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니.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주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야말로 허를 찔린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 일순간 그 몸이 경직되자 남궁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휘리릭.
그녀는 악비산과 달리 망설임 없이 검을 놓고는 자루를 밀어낸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했다.
그러곤 제 검을 잡고 있던 주호의 팔을 따라 안으로 파고들었고, 쭉 뻗은 일장을 내질렀다.
“……!”
잠시간 그녀의 말에 정신이 팔려있던 주호는 반응이 살짝 늦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의 허점을 노리기에는 많이 모자랄 따름이었다.
탁.
주호는 남궁연의 팔목을 잡고 그녀의 몸을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마음 같아선 이마에 딱밤이라도 놔주고 싶었으나, 대련 중이었기에 꾹 눌러 참으며 그녀를 허공에 높이 내던졌다.
휘릭.
하늘 높이 날아간 남궁연이 균형을 잡으며 바닥에 내려설 찰나, 홀로 남은 천후가 짓쳐들어왔다.
제법 매서운 기세로 그 본인은 마치 생사결을 벌이듯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시뻘건 불꽃에 휩싸인 홍령도가 순식간에 연격으로 내질러진다. 머리, 목, 가슴, 왼쪽 어깨, 오른쪽 옆구리. 어디 할 것 없이 모두 치명적인 급소들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주어야지.”
주호는 씩 웃으며 두 주먹을 움켜쥔 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심상치 않은 기파가 허공에서 요동쳤고, 곧 그를 중심으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파악-!
천후는 그 즉시 도를 회수했다.
그러곤 옆면으로 제 몸 앞을 가렸지만, 이내 그 기파에 휩쓸려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던 선우연의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흠.”
주호는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익숙함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만일 이 자리에 그들과 같은 경지의 고수가 있었더라면 자신의 기세에 짓눌려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을 터.
하지만 이미 옛적부터 그 압박감에 익숙해져 있기에 그리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그리 늘어져 있을 거지?”
주호는 몸을 돌려 각각의 방향으로 쓰러진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씁, 쪽팔리게.”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선우연은 제 무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학관에 있을 적에는 그래도 대충 비등비등한 싸움을 보였다. 하지만 이곳에선 정말로 작정했는지 그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괜찮겠지만, 형편없이 나가떨어진 것이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후배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네. 공격하기도 전에 밀려났으니.”
“…받아줘서 고맙네.”
침중한 것은 철대환과 악비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악비산은 창째로 집어 들려 제 친우에게 내던져지지 않았던가. 그래도 조금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직전에 그 자존심이 산산이 조각났다.
“제대로 가지. 실전처럼 말이야.”
“실전이라.”
“불구대천의 원수라 생각하자 이 말이군.”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사람 일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린 법이니.”
천후의 말에 각자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를 불태운다. 옆으로 조금 떨어져 있던 남궁연은 살짝 한심스럽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쪽보다 까마득히 위에 있는 고수인데 다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죠. 조금 전 천 공자가 했던 것처럼 죽일 기세로 들어가야 겨우 그 끄트머리에 닿을까 말까 할 테니.”
잠시간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이할 정도로 긴 공백에 남궁연이 갸웃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떨떠름한 표정을 한 선우연이 물었다.
“소저, 혹 교관님께 무언가 서운한 것이라도…….”
“쓸데없는 잡설은 이제 그만하고 준비하죠. 교관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시니.”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나온 말이었지만,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선우연을 비롯한 다른 후기지수들은 모두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의 공격을 준비했다.
“이제야 좀 해볼 만하겠군.”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좌중을 살폈다.
천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적을 만난 것처럼 적의와 뒤엉킨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천히 여섯 갈래로 벌어지며 이쪽을 포위해왔고, 눈 깜짝할 새에 땅을 박차며 쇄도해왔다.
제일 먼저 도달한 것은 철대환이었다. 일격은 수라쇄혼권으로, 주호가 그것을 피해내자 손이 활짝 펼쳐지며 타격해왔다.
‘무영철쇄장.’
그의 상태창에 기록된 무공이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묵직한 무게를 지닌 장법. 맞게 된다면 어지간히 단단한 바위도 가루가 되며 부서져 나갈 것이 분명한 위력이었다.
쩌엉-!
주호 역시 손을 활짝 펴 그것에 대응했다.
청룡신공의 무공인 청룡장(靑龍 掌)의 초식. 두 손바닥이 부딪치자 귀청을 찢을 듯한 광음과 함께 서로의 소매가 나풀거렸다.
“…큭.”
내력에서 밀린 철대환이 신음을 흘리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쳤다.
정면 대결을 하고도 다른 이들과 같이 날아가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칭찬할 만한 결과였다.
‘어디 출신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작년 실전의 이해 사급 교관으로 있을 당시, 천우희의 부탁을 받은 천후를 제외하고는 후기지수 중 잠재력이 특출난 이들로 인원을 선별했다.
철대환은 그들 중 유일하게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때는 현무의 후계자로 추천해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출신을 대략 눈치채고는 잠시 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쉬익-!
그가 잠깐 상념에 빠져 있던 사이 선우연의 검이 날카롭게 휘둘러졌다.
십 할 전력을 다한 매화 검법으로 짙은 매화 향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것을 보니 절초인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의 초식인 듯하였다.
꽈드득.
주호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막대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고, 순식간에 매화만리향의 초식을 집어삼키며 그 기세를 와해시켜버렸다.
“큭!”
듣도 보도 못한 현상에 선우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면서도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주호는 여유를 주지 않으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지만, 이내 양쪽으로 쇄도하는 악비산과 천후에 두 팔을 좌우로 뻗었다.
스륵─.
왼손으로는 찔러 들어온 창의 끝을 휘감으며 끌어당겼고, 오른팔로는 제 옆을 노리는 도신을 슬쩍 밀어내며 궤도를 바꿨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의 묘리였다.
결국 서로가 공격하게 되는 꼴. 하지만 둘은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멈추지 않은 채 도와 창을 충돌시켰고, 그 반동을 이용해 방향을 바꿨다.
“어림없…….”
주호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두 팔을 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천유는?’
이전 격돌에서 자신과 맞부딪치는 이는 다섯. 그렇다면 당천유는 어디 있는 것일까.
본래라면 그 존재를 놓칠 리 없겠지만, 무공 수위와 감각을 이들에 맞춰 조절하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주호는 그제야 제 머리 높이 이른 당천유의 신형을 볼 수 있었다.
“그 상황이라면 쉬이 피할 수 없겠지요!”
태양을 등지고 날아오른 당천유는 씩 웃으며 손에 든 것들을 내던졌다.
동시에 도와 창을 충돌시킨 것으로 방향을 바꾼 둘이 땅을 박차며 거리를 벌린다. 주호 역시 떨어져 내리는 것들을 피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여유는 없었다.
픽-!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서부터 수많은 암기가 터져 나왔다.
수백, 아니 수천에 달할 정도의 우모침(牛毛針)과 더불어 독접을 비롯해 당가의 것으로 명성을 알리는 암기들이 우후죽순으로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전부 막는 것은…….’
본래 실력이라면 콧바람으로도 막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대련을 위해 정한 실력의 범주 내에선 버거운 일이었다.
“인정하마. 당가의 화우(花雨)는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들었다. 어째 그들의 가장 강한 전력인 천후를 앞세웠다고 했더니 이런 수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그렇다면 이쪽도 보여주지.”
당가가 지닌 최강의 무공이 만천화우라면, 이쪽 역시 최강으로 맞서는 것이 도리.
“…어.”
주호의 전신으로 휘몰아치는 시퍼런 기운을 본 당천유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청룡신공 멸천(滅天).
청룡신공 가운데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초식. 곧 지축이 흔들리며 그를 중심으로 거센 기파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천유는 그것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허공에 암기를 흩뿌리고 그것을 박차 몸을 날리는 기예를 보였다.
하지만 애써 펼쳐낸 만천화우의 꽃들은 그 기세에 휘말려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보여줄 테냐.”
모두가 물러난 가운데, 남궁연만이 오롯이 그 앞에 자리했다.
이전과 같이 말로 자신을 현혹하려 해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렇게 정신을 다잡으며 시선을 보내자, 남궁연은 씩 웃으며 검을 들었다.
“놀라시지 마세요.”
그녀는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당천유가 했던 것처럼 몸을 가볍게 해 그 위에 체류했다.
마치 선녀가 강림한 것처럼 우아한 모양새였지만, 그 손에 들린 검은 곧 무지막지한 파공성과 함께 허공을 뒤덮었다.
“…이건.”
창궁무애검법.
아니, 무언가 달랐다.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남궁연의 움직임을 살폈다.
초식의 형 자체는 창궁무애검법과 같이 유려하다. 지닌 의념도 같았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 초식이었다.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냈다?’
창궁무애검법은 그 자체로 완성된 무공이다. 대성에 이르러 초식을 줄이고 축약한다면 모르겠지만, 완성된 무공에 새로운 초식을 추가하는 것은 주호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연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 그렇기에 검이 휘둘러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건.”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당천유처럼 뛰어오른 것만이 아니라, 당천유가 암기를 흩뿌린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수십, 아니 어쩌면 세 자리 수가 넘는 검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떨어져 내렸다.
“만천검우(滿天劍雨).”
남궁연이 조용히 중얼거린 그 말 그대로 검기의 비가 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스릉─.
주호는 대련이 시작한 직후 처음으로 검을 쥐었다.
시퍼런 검기가 그 위로 서렸고, 이내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빗물을 베어 갈랐다.
하지만 사람이 하늘을 촘촘히 메우며 떨어져 내리는 비를 전부 피할 수 없는 법.
탁.
남궁연은 곧 바닥에 내려섰다.
이윽고 비가 그치며 청명한 하늘이 다시 드러났을 때, 그녀는 주호의 소매가 살짝 잘려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