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마교 선봉대가 중원 연합군의 방어선에 공세를 가했다.
그 소식이 중원 무림을 강타했을 때 주호는 이미 일주일간의 무림맹 생활을 끝내고 학관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도 정천을 비롯한 여러 학관은 계획된 일정을 이어나갔지만,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자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강의를 비롯해 내외부 활동이 모두 무기한 미뤄졌고, 학관 내의 일부 관생은 각자의 문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문파 고수들이 하남으로 올라와 학관을 중심으로 예비대를 편성했다.
그 숫자가 물경 이천에 달할 정도였으니 안전한 곳에서 공적을 쌓고 싶어하는 자가 수두룩하다 할 수 있었다.
학관에 돌아온 주호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무림맹에서의 활약은 이미 강호 전 지역으로 일파만파 퍼진 지 오래.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이 그를 축하하며 인사를 해왔다.
더러는 일면식이 없는 이들조차 그와 친분을 쌓기 위해 들이닥쳤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끝낸 주호는 하루 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한 뒤, 제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후기지수들을 불러 모았다.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터텅 비어버린 일정에 반복적인 수련만 하고 있던차.
그렇기에 반색하며 그 부름에 응했고, 주호는 그들을 데리고 하남 성읍을 벗어나 산맥의 깊숙한 너머로 향했다.
“뭘 하시려기에 이렇게까지 멀리 나온 겁니까?”
선우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주호가 앞장서기에 묵묵히 따라나왔지만, 이런 벌판에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다른 이들도 같은 의문을 지닌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쯤이면 적당하겠군.”
곧 분지 형태의 널찍한 벌판에 멈춰 선 주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온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선우연 같은 이 년 차의 관생뿐만 아니라 제 동생인 주예향과 다른 셋도 동행한 차였다.
“무림맹에서의 소란은 알고 있겠지.”
“모를 수가 없지요.”
그 물음에 당천유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야말로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다. 검절의 활약상은 지나가던 꼬마도 귀에 피가 날 정도로 거론되는 것이었으니.
“그 싸움 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자 이곳에 오고자 한 것이다.”
인적이 드물고 넓은 장소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더라도 문제없을 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무림맹에 말해놓아 주변으로 오는 이들이 없게 조치했다.
“깨달음, 심득입니까!”
“과연.”
선우연이 두 눈을 빛낸다. 악비산도 깊게 고개를 끄덕였고, 후기지수들 역시 제 각자 잔뜩 들뜬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어왔다.
“심득이라, 뭐 엇비슷하겠군.”
주호는 씩 웃었다.
마황과의 싸움에서 심득을 얻어 검결을 만들어낸 것은 맞지만, 이들에게 가르쳐 줄 것은 그러한 종류의 깨달음이 아니었다.
‘실전 감각을 길러주려는 것이니.’
주호는 이때까지 이들과 수백 번이 넘는 대련을 진행해왔다.
그때마다 일정한 틀과 형식을 지니지 않으려 노력해왔으나, 숫자가 거듭될수록 대련의 모습이 정형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즉, 서로의 움직임이 눈에 익게 된다는 것이었다.
툭툭.
발끝을 몇 번 땅에 내디딘 주호는 후기지수들과 마주 섰다. 그러곤 주예향을 비롯한 일 년 차 관생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은 멀찍이 물러나 있거라. 이다음 차례에 상대해줄 터이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했지만, 남궁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제 친우들을 챙기며 멀찍이 물러났고 그들이 충분한 거리를 벌린 것을 확인한 주호는 제 앞에 선 여섯을 향해 말했다.
“따로 준비할 시간은 주어도 되지 않겠지.”
“…대련, 입니까?”
“그래. 각자 전력을 다하거라. 장소가 장소인 만큼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아니, 그럴 여유가 남을지 모르겠지만.”
주호가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선우연과 당천유는 주춤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고절한 심득을 얻어 자신들에게 전수해주려는 줄 알았지만, 다짜고짜 대련하자고 하다니.
“…뭐, 나는 이쪽이 더 반갑군.”
쿵.
악비산은 서늘한 안광을 내비치며 창끝을 바닥에 찍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호가 되돌아오면 대련을 하고자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리 기회가 생기니 그저 기꺼울 따름이었다.
“마침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잘 되었네요. 뭐해요? 다들 준비하지 않고.”
남궁연 역시 자연스러운 태도로 검을 들었다. 그러면서 아직 어두커니 서 있던 이들에게 눈짓하며 서두르라 재촉했다.
천후는 담담히 도를 휘감은 천을 풀었고, 철대환은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다는 듯 이미 권갑을 착용한 상태였다.
“빠지려면 빠지거라. 나는 상관없으니.”
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선우연과 당천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시킬 마음은 없다. 그렇게 말하자니 그 둘은 황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희가 언제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여서 당황한 거지.”
“그리고 심득이라 기대했는데 대련을 말씀하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사뭇 뻔뻔한 모습이었다. 그것에 작게 너털웃음을 터트린 주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의욕을 끌어내려면 초식 하나 정도는 걸어야겠지. 조건은 이때까지와 같다. 조금이라도 스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마.”
“…무르기 없기입니다.”
“이때까지 내가 허언을 한 적이 있었나? 그리고.”
주호는 시퍼런 귀화가 서린 눈으로 씩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단 한 번도 성공해내지 못했으면서 자신만만하군.”
“하하.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스릉.
선우연은 제 검을 뽑으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학관 내에선 아무래도 여러모로 신경쓸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공간이라면 원 없이 제 힘을 뿜어낼 수 있을 터.
혼자라면 당연히 불가능했겠지만, 다른 이들의 힘이 보태진다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기회를 노릴 수 있지 않을까.
“준비된다면 언제든 들어오너라.”
주호는 그 자리에 선 채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검을 뽑지도 않은 자세. 찰나 후기지수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쉬이익.
누구랄 것 없이 그 모두의 신형이 사라진다. 초격부터 전력을 쏟아낸 것이었다.
이제는 사뭇 자연스러워진 검기의 발현. 더 위의 경지로 올라가기에 자격이 충분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제법.’
일격은 제일 가까이 있던 선우연이었다.
살짝 붉은빛을 띤 검기가 선명한 빛을 발하며 궤적을 그린다. 이미 익히 보아온 매화 검법이었다.
그 검로는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질 정도. 그렇기에 주호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손등으로 그 경로를 차단했다.
“……!”
선우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주호가 자신들과 행했던 대련 가운데 맨손으로 상대한 것은 곧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검기가 서린 검에 직접 적으로 충돌해온 적은 없던바.
그렇기에 잠깐 멈칫했으나, 주호의 손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그극.
분명 맨손과 날이 세워진 쇠의 충돌이었지만, 마치 쇠와 쇠가 긁히는 듯한 거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불어 그 위에 서린 검기 또한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검의 중심만 흐트러졌을 뿐이었다.
“잡념이 많구나. 실전이었더라면 벌써 세 번은 죽었다.”
퍽-!
속삭이는 듯한 말과 함께 무심한 발길질이 뻗어 나와 선우연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촌각에 불과한바. 하지만 다른 이들이 그 지척으로 쇄도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쉬이이익-!
악비산의 창이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꿰뚫는다. 그 뒤로는 남궁연의 검이 사각을 파고들었고, 반대편에선 철대환이 몸을 낮춘 채 특유의 기묘한 신법으로 밑을 파고들었다.
‘천후는 나서지 않나.’
아직 노릴 때가 아니라 판단한 것일까. 그 적절한 판단에 속으로 칭찬하며 주호는 제 몸을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회전시켰다.
탁.
먼저 허리춤을 찔러오는 창대 끝을 콱 붙잡았다.
악비산은 이미 그러리라 예상한 듯 손안에서 창대를 회전시키며 그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주호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역회전을 넣는 것으로 기세를 상쇄했다.
“흡!”
악비산은 그 즉시 힘으로 밀어내는 것은 무리라 판단한 것인지 두 다리를 땅에 굳건히 박은 채 창대를 위아래로 힘껏 털어냈다.
그러자 창대가 출렁이며 날 끝의 방향이 주호를 향해 꺾이며 그 목을 노려왔다.
“제법 신묘한 수법이다. 허나.”
그쪽엔 검을 휘둘러오던 남궁연이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악비산의 창끝이 그녀를 향하게 만든 것이었다.
캉-!
남궁연은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막아냈다.
즉시 물러나 태세를 가다듬어야 하나, 아니면 재차 몰아붙여 위기에 빠진 악비산을 도와야 하나.
찰나간 고민이 들었지만, 이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으윽!”
주호는 창대를 그대로 들어 올리자 악비산은 지지 않겠다는 듯 두 손으로 그것을 부여잡은 채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훅-!
그 커다란 몸이 창대에 매달려 허공에 들린다. 순식간에 뒤집힌 천지(天地)의 방향에 악비산이 입을 벌렸을 때, 주호는 씩 웃으며 말했다.
“때로는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창을 놓고 방도를 구했더라면 다른 이들과 연계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겠지.”
휙!
주호는 악비산을 창째로 던져버렸다.
그 방향은 바로 지척에서 자신을 향해 쇄도해오던 철대환을 향해 있었다.
그는 설마 악비산이 날아올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엉겁결에 그 몸을 받아들었다.
“으아악!”
하지만 그 몸엔 주호의 막대한 공력이 실려 있었고, 둘은 이내 한몸이 되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자, 그럼.”
주호는 손을 툭툭 털어내며 등 뒤를 바라보았다.
남은 이는 두 명.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남궁연과 아직 담담한 표정인 천후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저, 내가 먼저 가겠소. 뒤를 받쳐주시오.”
“알았어요.”
천후가 선공을 자처했다.
불그스름한 도신을 지닌 홍령도 위로 시뻘건 불꽃이 피어오르며 맹렬한 기세를 피워냈고, 이내 천후는 직선으로 땅을 박찼다.
“흠.”
주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 손을 들었다.
같은 후기지수 중 가장 출중한 기세를 지녔으면서, 가장 출중한 성장을 자랑했다.
지닌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우희의 제자.’
다른 이들이 초일류의 완숙 언저리에 도달해있는 것과 달리 천후는 벌써 절정 초입에 도달했다.
지금이라면 작년 비동을 막 빠져나왔을 때의 자신과 싸운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터.
쉬익.
주호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허공에 내리그어진 홍령도의 궤적을 피해냈다.
그러곤 넓게 손을 뻗어 도신의 옆면을 후려쳤지만, 천후는 그 여파를 가볍게 흘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그 빈틈 사이에서 남궁연이 시퍼런 검기가 서린 검을 찔러왔다.
그녀 역시 천후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바.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다음으로 성취가 높았다.
벽에 다다른 모습을 보니 조만간 경지를 딛고 올라설 터.
작년 하위에 머물던 수준을 생각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쉬아아악!
주호는 활짝 펼친 손바닥으로 찔러 들어온 남궁연의 검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연유에선지 저항하지 않았고, 그대로 주호의 지척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주먹 하나만큼으로 줄어들었을 때, 남궁연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를 그리며 열렸다.
“…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