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심득(心得)은 보통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이다.
숨을 내쉬었을 때,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또는 강적과 맞붙어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
물론 후자 쪽이 압도적인 지분을 지닌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일상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심득이었다.
주호는 마황 채진철과의 격전에서 번뜩이는 심득을 얻었다.
최후의 경합에서 이기어검을 사용한 초식을 펼친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혼원일극신공을 바탕으로 펼친 검식. 그 묘리는 뇌리를 꿰뚫었고, 하나의 형(形)으로 자리 잡아 태(態)를 갖췄다.
그것은 주호가 원래 익혔던 청룡신공과 다른 별개의 무공. 그렇기에 처음부터 틀을 짜며 구성해야 했다.
참고한 것은 당연히 진신절기인 청룡신공이다.
신공의 기본이 되는 검법은 일 초식 청룡잠운(靑龍潛雲)부터 이어지는 흐름의 연환계.
청룡검식은 그와 반대로 각각 독립된 의념을 지닌 초식이다. 하지만 그 역시 검식이라는 큰 틀 안에 갇혀 하나의 원류를 지향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주호가 혼원일극신공으로 얻은 묘리와는 사뭇 달랐다.
단철량은 그것을 보고 마치 날것과 같다고 평한바. 주호는 그 말보다 자신이 만들어낸 무학을 잘 표현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무림맹에 체류하던 지난 사흘간 주호는 이것들을 가다듬는 데 집중했다. 부상을 핑계로 학관에 돌아가지 않는 것 역시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물론 청룡신공도 충분히 훌륭한 무공이다.’
강호에선 신공절학이라 치부될 정도로 수준이 높은 무공이었지만, 입신지경에 다다르자 필연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청룡신공은 한계가 명확했다.
팔성에 오른 지금 그것을 확연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무작정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단계에서 느린 만큼 대성했을 때의 잠재력은 대단할 터.
하지만 앞서 비슷한 입신지경의 고수들과 겨뤘을 때를 생각해보자면 청룡신공은 대부분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것은 무공 내적의 요소로 보완할 도리가 없는 부족한 점들.
무황도 그것을 알기에 혼원일극신공을 창제한 것이 아닐까.
정도(正道)와 마도(魔道)의 완벽한 중립. 그야말로 자연지기의 본신이라 할 수 있는 기운이었다.
문제라면 그 진기를 축적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촌각이라도 그것을 단전에서 움직임을 지연시킨다면 본래의 청룡기와 적해의 기운으로 나누어진바. 필요로 할 때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해 발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고치기 힘들어 보인다. 쌓을 수 없다면 신공을 운용하는 데 속도를 올리면 되는 일.’
혼원일극신공의 숙련도가 높아진다면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은 요원한 일로 보였다.
숙련도 부분은 익숙함의 문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일 터였다.
지금 당장 시급한 과제는 심득으로 구성한 초식의 완성이었다.
일 초식 일섬(一閃).
이 초식 유성(流星).
일 초식의 이름은 화산에서 그 검에 베이기 직전, 흑수마제가 중얼거렸던 말에서 따왔다.
이 초식의 이름은 단철량이 그 모습을 보고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유성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후에 더 좋은 명칭이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그보다 더 알맞은 것이 없었기에 결정을 내렸다.
일 초식 일섬(一閃)은 극한에 가까운 쾌검이었다.
그 묘리 자체는 청룡검식의 만검(萬劍)과 흡사하다. 만검의 만(萬)은 숫자가 아니라 공간을 뜻한바. 일정 영역 내에는 무조건 다다른다는 뜻이었다.
다만, 입신지경에 이르니 그 완전무결해 보이던 검결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검은 영역 내의 모든 방위를 제 사정권으로 삼는다. 그 초식 개념 자체에는 흠이 없었으나, 무공을 펼치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인지하고, 검을 휘두른다. 심즉동(心卽動)의 경지라 할지라도 아주 찰나, 극히 미세하다고 할 수 있는 지연이 있다.
물론 그보다 낮은 경지의 상대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죽을 터.
하지만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고수들의 경우에는 일격 째에 쓰러뜨리는 것을 실패한다면 이격 째 역시 실패할 확률이 다소 높을 것이다.
실제로 이제까지의 싸움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였기에 제법 설득력 있는 추론이었다.
물론 위력적인 초식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아마 멸천(滅天)을 제외한다면 주호가 익힌 것 중 가장 강한 초식일 터.
하지만 그 아주 작은 단점이 치열한 싸움 가운데 치명적인 악재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이 초식 유성(流星)은 일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묘리의 발현이었다.
일섬이 선이라면 유성은 점이었다.
모든 힘의 집약. 짐짓 기다란 궤적으로 이어지나, 그 실상은 일섬보다 더 폭발적인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마황과의 싸움에서 그랬듯 한 번 펼칠 때 막대한 진기가 소모되었다.
아직 제대로 된 구결을 구축하지 못해서 비효율적인 낭비가 많은 것이니 개선의 의지가 다분했다.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합니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그 초식들을 되새기는 것을 끝마친 주호는 천천히 제 기운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청룡기(청龍氣)와 적해(赤海)의 기운을 방대하게 끌어올려 경쟁하듯 서로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었고, 설사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여도 미묘한 차이로 그 균형이 무너졌다.
여기서 그는 마황과의 싸움에서 불현듯 깨달은 방법을 사용했다.
아주 실낱같은 기운을 서로 한 가닥씩 뽑아 엮어내고 그 가닥 수를 점차 늘려나갔다.
처음엔 어느 세월에 그것을 다 하고 있는가 싶었지만, 한 번에 마구잡이로 운용하는 것보다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신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사흘간 그것에 얼마간 숙달된바. 주호는 이제 처음보다 서너 배는 더 빠른 속도로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척.
시각은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신시(申時)가 조금 지날 무렵. 오전부터 회의로 들볶였던 단철량이 다시 다른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주호는 홀로 맹주의 연무장 가운데 섰다.
쉬익.
신검이 움직인다. 과정은 없었다.
그저 휘둘러졌다는 결과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을 뿐. 일순간 검신이 사라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극한에 다다른 쾌검이었다.
주호는 검이 휘둘러진 순간부터 끝까지 그것을 응시했다.
그 자신이 자아냈고, 그 자신이 휘두르는 검이다. 적어도 본인은 전부 파악하고 있어야 함이 옮았다.
극쾌(極快).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시작과 끝맺음을 정확히 인지한 후 만들어지는 검결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강한 힘이 지나가면 공간에 굴곡이 일어나며 시야의 왜곡이 발생한다. 그 편차가 세상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만검을 극한으로 운용했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왔지만, 일섬(一閃)은 출수하는 순간 이미 만검의 극한에 다다라 있었다.
즉, 일섬의 최솟값은 만검의 극한.
그러나 그 효용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활용도 역시 무궁무진했다.
“…….”
그다음 주호는 신검을 놓았다.
그러자 그 유려한 검신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고, 가느다란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사실 강호에 이기어검으로만 펼치는 초식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각자 익힌 무공과 묘리를 이기어검에 담아 풀어낼 뿐, 굳이 그런 초식을 만드는 수고를 할 이유가 없었다.
단 한걸음에 수십 장을 뛰어넘을 수 있으니 쏘아 보낸 의미가 퇴색됐으며, 그 본인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 더 확실하고 깔끔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니 구태여 이기어검을 쓸 필요가 있느냐.
단적으로 단철량 역시 그렇게 말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주호의 생각은 달랐다.
초고수 사이의 보편적인 인식이 그러하다면, 이기어검으로 펼치는 초식인 유성은 의외성을 주는 비장의 한 수가 될 터.
쉬아아악─!
신검이 거센 파공성을 일으키며 연무장을 자유롭게 가로지른다. 예전이라면 내공의 소모가 두려워 함부로 할 수 없었지만, 입신지경에 올라 진기의 수발에 제한이 없어진 지금은 숨 쉬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웠다.
“음.”
문득 그의 뇌리로 무언가가 스쳤다.
단지 일말의 호기심이었다. 그렇기에 신검을 제 앞으로 불러들였고, 천천히 그 위에 발을 올렸다.
어검비행이었다.
신검 위에 올라탄 주호는 마치 옛 구전에 나오는 절세 고수처럼 천천히 연무장 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높이 날면 담 위로 다른 이들이 볼 수 있어 적당히 고도를 낮춰 조절까지 했다.
그렇게 얼마를 즐겼을까.
“…재미있는가?”
“…….”
연무장의 문가에서 들려오는 웃음기 짙은 물음에 주호는 움찔하며 무안한 표정으로 그곳을 돌아보았다.
언제 등장했는지 모를 단철량이 그곳에 서서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탁.
그 앞에 내려선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언제부터 보고 계셨습니까.”
“자네가 연무장을 돈 지 세 바퀴가 지나기 전부터였다네.”
“거, 참 무안하게…….”
“뭘, 그 나이대 청년다운 모습이 보기 좋았네. 내가 자네 나이대였더라면 저잣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어검비행으로 다녔을 터지.”
“하하하.”
그 말에 주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무심코 그 모습을 상상한 것이었다. 그저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만으로도 농밀한 주목을 받을 터다.
이기어검이란 초고수들 사이에서만 그저 그런 것이지, 다른 경지에선 꿈에도 바라는 절기가 아니던가.
검강만 일으켜도 수위에 꼽히는 고수로 대우받는 판국에 이기어검이라면 놀라 기절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생각은 해보았는가.”
몇 시진 전 단철량은 그에게 은밀한 부탁을 전했다.
그것은 단 노인이 아닌 무림맹 맹주로서 무인 주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전선에 가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작금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고수는 주호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거의 하나의 상징처럼 불리는바. 특히 사흘 전의 싸움으로 그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니 전선에 합류해 모습을 드러낸다면 연합군의 사기가 크게 치솟아 오를 터.
물론 지금 당장 가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데에다 연합군의 편성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적재적소(適材適所)
주호 같은 인재를 함부로 낭비할 수 없으니 적절한 시기를 보아 출전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입신지경의 고수 한 명은 크나큰 전력이니.’
때에 따라 그 한 명의 존재 여부로 싸움의 승패가 갈리곤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입신지경의 고수와 그에 오르지 못한 고수. 서로 간의 차이는 입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방대했기에.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되었네. 자네를 움직일 때쯤이면 아마 나도 동행하게 되겠지. 그때는 잘 부탁한다네.”
“하하, 그래도 맹주 직은 맡지 않을 것이니 저에게 미룰 생각은 접어두십시오.”
“…티가 많이 났는가?”
“많이 났습니다.”
“이거야 원.”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주호의 모습에 단철량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