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주호의 이기어검과 채진철의 언월도가 충돌하는 순간 단철량은 팔을 뻗으며 주위에 있던 고수들에게 외쳤다.
“다들 물러나 피해를 최소화하게!”
무림맹 입구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수북이 깔린 잔해더미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무림맹 고수들은 그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자리를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파아앗-!
격전 중인 곳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기파가 터져 나오며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더 물러나면 무림맹 본관까지 타격을 받는 상황. 그렇기에 그 제일 앞에 있던 청룡단주 초위현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모두 어떻게든 막아낸다!”
누구는 도를 들고, 누구는 검을 들고, 각자 최선을 다해 그 앞에 섰다.
지축을 뒤흔들 정도의 여파였지만, 수십의 고수가 사력을 다한 덕분인지 그 피해가 무림맹 본관까지 번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대부분이 평균적으로 열 발자국 넘게 뒷걸음질쳤으니 저곳의 싸움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 간접적으로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
청룡단주 초위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벌겋게 변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격돌에서 흘러나온 기파를 막아낸 것만으로도 이런 반동이었다.
만일 자신이 저 가운데 있었더라면 단 한 수라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심지어 그 주변에 있던 이들도 헛바람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니.”
천외천(天外天).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다들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자리한 이들 제각기 무림맹의 고수란 위치에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가공할 싸움은 그 자부심을 의기소침으로 바꾸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아마 오랫동안 회자될 이야기겠지.’
검절(劍節) 주호.
초위현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 이름을 다시 뇌리에 새겼다.
쉬이이익-!
무림맹 고수들이 본단의 피해를 막아낼 때, 단철량 역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싸움에 난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향한 방향은 무림맹과 반대쪽으로, 도시 방면으로 이어지는 시가지 부근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하남 시내까지 그 여파에 휩쓸린다.’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들의 일검은 태산을 가르고 대해를 요동치게 하기 충분한 위력이었다.
주호 쪽에서 제법 상쇄해준 듯하지만, 피해가 새어나가면 황실에 개입할 여지를 줄 수도 있는 상황.
가뜩이나 산서에서 사도맹의 일과 전쟁 직전의 상황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은 가운데, 그런 구실을 줄 수는 없었다.
“맹주의 책임이라는 것이지.”
시가지의 입구를 등지고 선 단철량의 장삼이 펄럭인다. 막대한 기운이 그 전신을 타고 뿜어져 나오며 두 손으로 몰려들었고, 이내 소용돌이 형태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웅-!
단철량은 가볍게 두 팔을 뻗었다.
그것은 이내 닥쳐오던 기파와 충돌하며 거센 반향을 일으켰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지반이 무너져 내렸고, 자욱한 분진이 피어오르며 처참한 광경을 자아냈다.
하지만 단철량이 서 있는 곳부터는 아무런 피해 없이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후.”
단철량은 제 손을 툭툭 털어내며 허리를 폈다.
대련이나 수련 말고 본격적으로 움직여본 것이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기분 탓이겠지만, 괜히 허리가 쑤셔오는 것 같았다.
“손이 많이 가는 친구로군.”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전장을 바라보는 단철량의 눈빛은 대견스럽기 짝이 없다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
갑작스럽게 일어난 싸움은 언제나 그랬듯 갑작스럽게 끝을 맞이하는 법이었다.
마황 채진철은 고개를 들어 눈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자신에게 쇄도하던 이기어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암천의 수법으로 전성기의 칠 할가량 근접한 이 힘을 버텨낸 것을 보아 신검의 부류일 터.
그것은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그 주인인 주호 역시 가슴을 부여잡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훌륭하다.”
하지만 채진철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파각.
수백 년 전 휘둘렀던 애병(愛兵) 은 이미 스러져 가루조차 남지 않은 지 오래다. 그렇기에 신교의 병창에서 엇비슷한 것을 가져왔지만, 직전에 있었던 충돌의 여파를 이기지 못해 날이 부서지고 말았다.
더욱이 견디지 못한 것은 언월도의 날만이 아니었다.
츠츠츠즈-.
자루를 움켜쥐고 있던 왼팔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한다. 암천은 이미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해제된바.
다행히 소멸의 여파는 왼팔로 끝인 듯했지만, 더 싸움을 이어간다면 곤욕을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흠.”
채진철은 곰곰이 생각했다.
두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몸을 버릴 각오를 한다면 더 싸울 수 있으나, 그래서야 이득이 없지 않은가.
애초의 목표는 무림맹주를 죽이고 부가적으로 이 젊은 고수를 제압해 사로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이래서야 어느 것 하나도 성공하기 힘들어 보이는 상황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도록 할까.”
“어딜!”
주호가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신검이 다시금 솟구쳐 날카로운 기세로 허공을 꿰뚫었지만, 이전과 같은 빠름은 없을 따름이었다.
휙 고개를 꺾어 가볍게 그 공격을 피해낸 채진철은 씩 웃으며 말했다.
“피차 더 싸울 상태가 아니지 않느냐. 나는 아직 이 몸에 익숙지 못했고, 네놈은 주변을 신경 쓰느라 손속에 한계를 두었지. 다음에는 주변이 신경 쓰이지 않는 곳에서 제한 없이 싸워보자꾸나.”
“…….”
주호는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때까지의 싸움으로 내공 대부분이 소진되었다. 찰나 회복한 것 역시 모조리 끌어모아 기습적으로 이기어검을 펼쳤으나, 그마저도 가볍게 회피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어떻게든 호흡을 늘리고, 진기를 끌어모으려 애썼다.
마황의 존재는 규격 외. 지금의 상태도 충분히 무지막지하건만, 아직 제 몸에 익숙지 않은 상태라 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만날 때는 필시 이보다 더 성가신 적이 될 터. 지금 처리해야 함이 옳았다.
“누가 보내준다고 했던가.”
“……!”
채진철은 그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것보다 먼저 벼락처럼 몸을 돌리며 자루만 남은 언월도를 들어 올렸다.
쿵-!
주호가 한계에 다다른 것을 파악한 단철량의 참전이었다. 허공을 꿰뚫으며 휘둘러진 그 일격에 채진철은 하나 남은 팔로 애써 응전했지만, 압도적인 기세를 흩뿌렸던 이전과 달리 형편없는 모습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끄응.”
종래엔 자신이 부순 잔해더미에 파묻혀 신음을 토해낸바. 몇 번 발버둥 치더니 몸을 일으키곤 재투성이가 된 머리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거, 맹의 정문을 박살 낸 건 미안한데 강호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지 않은가. 맹주를 죽이는 것도 실패했고, 그 앞에 가로막혀 꼴사나운 모습인데 여기서 쓰러지면 면목도 없거든.”
“본인이 맹주일세.”“…무림맹주 검선(劍仙) 단철량.”
단철량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채친절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허어. 역시 그렇군. 어쩐지 범상치 않아 보인다고 했어. 내 비록 기력이 쇠하였다곤 하나 이 정도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무림맹주 정도밖에 없겠지. 헌데, 맹주들은 모두 같은 핏줄인가. 옛 기억에도 다 백발이 성성하고, 전부 학자 같은 분위기였거늘 이번 대 역시 비슷하군.”
몸이 박살 난 지금 저만한 고수를 상대할 도리가 없다.
더욱이 주호처럼 이제 막 입신지경에 오른 것이 아닌, 세상 풍파를 충분히 겪은 노고수가 아닌가.
같잖은 수법이나 몇 마디 말 따위로 회유할 상대가 아니었다.
“마황의 이름으로 후배님에게 삼가 부탁하건대, 보내줄 생각은 없는가.”
“…….”
단철량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채진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교 놈들이 너는 꼭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진 못하겠군. 뭐, 무림맹주 정도 되는 이에게 끝을 맞이한다면 부끄러운 결말은 아니니 괜찮을 터지.”
생각은 짧았고, 결단은 빨랐다.
어차피 추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바. 차라리 마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후까지 불태울 생각이었다.
“잠깐 실례.”
휘릭.
그 순간 채진철의 앞으로 한 신형이 유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떨어져 내렸다.
단철량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전까지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적어도 어쭙잖은 존재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반면 갑작스럽게 난입한 괴한의 얼굴을 알아본 주호는 두 눈이 찢어져라 크게 떴다.
“네놈은!”
“오랜만이로군. 헌데 추한 모습은 여전하구나.”
궁기(窮奇) 천아성.
강호 출도 후, 그에게 처음으로 압도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던 숙적이었다.
“…….”
궁기를 바라보는 주호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역시 입신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의 경우가 특별한 것일 뿐, 원래 경지는 궁기가 더 높지 않았는가.
‘다시 싸운다면.’
그때처럼 맥없이 밀리진 않으리라. 그런 선명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채진철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자네는.”
“애초에 한구석에서 대기하고 있었소이다. 마황께서 실패하실 경우를 대비해.”
“신용 받지 못한 것인가. 서글픈 운명이로군.”
“신용이라기보단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런 것이오. 마황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쓰러지면 안 되니 말이오.”
궁기는 고개를 들어 스산한 눈으로 단철량을 바라보았다.
“충돌은 원치 않는다. 지금 싸워봤자 피차 좋은 일은 없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리고 내 입장에선 미연에 싹을 잘라두는 것이 좋네만.”
단철량은 입가를 비틀었다.
주호의 격한 반응을 보아 혈천신교 측의 고수일 터. 같은 입신지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 수준은 천차만별. 그는 열 초식 이내 궁기의 목을 치고 마황의 숨을 끊어낼 자신이 있었다.
“뭐, 그렇게 대답할 줄 알고 준비한 것이 있는데.”
궁기는 씩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굳이 그러지 않고도 전음을 보낼 수 있으나,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다분한 것이었다.
“…….”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인지 단철량의 얼굴이 침중한 기색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날카롭게 벼렸던 기세를 거두며 제 검을 거뒀다.
그 모습을 본 궁기는 피식 웃으며 채진철의 신형을 들쳐 매었고, 슬쩍 고개를 돌려 주호를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때를 고대하지.”
“…….”
주호는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단철량이 어째서 그들을 순순히 놓아준 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궁기와 마황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고개를 돌려 단철량을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방 먹었군. 이곳에서 싸움이 일어남과 동시에 시내에 숨어든 제 수하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할 것이라 하더군.”
“…빌어먹을 새끼들.”
비겁한 외통수에 주호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전음을 내뱉은 것도 주변에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모종의 협상이 결렬되어 그런 여파가 일어난 거로 생각하기 위해 의도한 행동일 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일차적인 원흉은 혈천신교가 되겠지만,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무림맹 역시 책임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상처뿐인 승리로군요.”
주호는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몸을 이끌어 신검을 주워들었다.
격한 전투였지만, 날 하나 상하지 않은 것을 보니 신검이 왜 신검(神劍)인지 새삼 느껴졌다.
그렇게 투명한 검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단철량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왜 상처뿐인 승리인가. 무너진 벽과 건물은 다시 세우면 그만이라네. 잠룡이 은거를 풀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알리는 것에는 충분히 남는 장사였지.”
그 말에 주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로라하는 무림맹의 고수부터 말단 무사까지.
모두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