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무황(武皇)의 무공?”
자신을 마황(魔皇)이라 칭한 마두의 입에서 나온 중얼거림에 주호의 검결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신검은 멈추는 일 없이 맹렬한 기세로 휘둘러졌고, 채진철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제 언월도를 끌어당겼다.
쩌엉─.
귀청을 울리는 광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제 몸이 아니기에 내상 같은 것은 없었지만, 언월도를 타고 흐르는 충격 때문에 자루를 쥔 두 팔 위로 살짝 균열이 생겨났다.
“…….”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그가 자신이 펼치는 무공의 기원이 무황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인가.
‘설마 활동 시대가 무황과 겹친다든지.’
마황이라는 휘황찬란한 별호를 생각해본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바. 그런 의문에 대해 답을 하듯 채진철 역시 언월도의 끝을 바닥에 찍으며 말했다.
“한 마리의 용을 그리는 듯한 그 검술. 스쳐 지나간 것이지만, 본 적이 있다. 네놈은 설마…….”
주호는 대답 없이 검을 들었다.
이제는 자신이 무황의 전승을 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거리낄 일이 없었다.
다소 파란은 일겠지만, 몸을 사려야 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감당할 실력이 충분했다.
그가 무황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말거나 검을 비스듬하게 겨누며 어떻게 해야 쓰러뜨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지닌 무학은 나보다 깊고 완력도 강하다. 청룡신공으로 상대하려면 승부를 보기 힘들 터.’
주호는 흑수마제와의 일전 이후 꾸준히 혼원일극신공을 연마해왔다.
하지만 정도와 마도의 기운을 함께 다룬다는 것은 촌각이 급박한 실전 가운데서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일.
차차 시간이 흘러 숙련도를 쌓고 익숙함을 더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아쉽게도 자신이 싸워야 할 적들은 그런 것까지 기다려줄 정도로 아량이 넓지 않았다.
‘그렇다면 틈이 있을 때……!’
채진철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틈을 타, 그는 단전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적해(赤海)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한 작업. 이제는 제법 이질감 없이 움직인 그 혈기(血氣)가 청룡신공의 기운과 같이 백회로 향하며 서로 실낱같이 꼬이기 시작했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실패하는 어리숙한 모습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기운을 가다듬었고, 마침내 하나의 신공을 완성했다.
“…….”
가만히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진철은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일렁이는 잿빛, 휘몰아치는 파멸의 소용돌이. 제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짓이기는 압도적인 격.
이전까지의 무공으로는 살짝 아리송한 감이 있었지만, 저건 확실히 무황의 무공이 맞았다.
“으하하하! 설마 이 시대에 다시 깨어나 무황의 계승자와 만나게 될 줄은!”
그의 외침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가 사방으로 퍼진다. 주호는 뒤쪽에 있던 무림맹 무인들이 동요하는 기척을 느꼈지만,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기운을 벼리는 데에 집중했을 따름이었다.
“이건 나도 손대중할 수는 없지. 원래라면 맹주를 상대하기 위해 아껴 놓았던 것인데.”
씩 웃은 채진철은 왼손으로 단전 부위를 움켜쥐었다.
힘줄이 불쑥 솟은 손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그 몸이 들썩했고, 이내 시커먼 무언가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점차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종래엔 그것이 검은 선으로 길게 이어지며 뚜렷한 흔적을 남겨 마치 누군가 그 전신에 기괴한 형태의 문신을 새겨 놓은 듯한 모습이 되었다.
“…후우.”
채진철은 뇌리를 가득 메우는 고양감에 어깨를 들썩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암천(暗天)이라는 이름의 수법이었다.
자신을 되살려준 혼돈이라는 사내가 알려준 것으로, 얼마간은 생전에 가졌던 무력과 비슷한 수준의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말했다.
‘사실은 일 할이라도 운용할 수 있는 폭이 높아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의 효용이었다.
그 말대로 정말 전성기에 근접하는 힘이 전신에서 충만하게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
주호는 갑작스럽게 뒤바뀐 채진철의 기세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혼원일극신공을 끊임없이 운용했다.
온몸에 가득 생겨난 검은 선, 그리고 갑작스럽게 증폭된 기세. 어디선가 비슷한 현상을 들었던 기억이…….
‘아.’
일전 천우희가 사도칠패의 척살을 위해 감숙 부근으로 향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혈천신교의 칠혈성 중 한 명인 적혈마검과 싸웠을 때, 갑작스럽게 그 몸 위로 시뻘건 핏줄이 튀어 오르더니 갑자기 그 기세가 몇 배는 강대해졌다고 했다.
작금의 상황은 그녀가 말해주었던 때와 엇비슷한 것. 그 몸을 뒤덮은 색이 시뻘건 색이 아니라 짙은 흑색이라는 것이 차이점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싸워 볼만할 것이다.”
채진철은 제 주먹을 꽉 쥐며 씩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본격적인 싸움을 알리는 전조였다.
핏─.
그의 커다란 신형이 일시에 허깨비처럼 모습이 사라진다. 그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고수들조차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로 쾌속한 보법이었다.
“흡-!”
짤막한 기합성과 동시에 언월도가 이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파공성을 울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극.
어깨 위로 신검을 들어 사선으로 기울인 주호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흘려냈다. 청룡신공만을 사용했더라면 제법 버거웠을 공격이었지만, 혼원일극신공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콰아아아앙-!
주호의 뒤로 엉망이 되어버렸던 무림맹의 정문이 다시 한 번 그 여파를 여실 없이 뒤집어썼다.
무너졌던 지반이 재차 주저앉고 성벽을 이루고 있던 잔해는 이제 가루가 되어 그곳에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
파각.
내질렀던 언월도의 끝을 회수해 재차 벼락같이 찔러간 채진철은 그 자루를 쥔 자신의 손 위로 피부의 껍질이 갈라지며 균열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계는 반각 정도인가.’
사자(死者)의 육신이기에 내공에 제한받지 않는 것은 좋았으나, 아무리 튼튼한 가공을 했다 하여도 한낱 피륙에 불과했다.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받아내려면 그 원래 육체가 필요한바.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것까지는 무리였기에 아쉬움이 컸다.
“그렇다 할지라도!”
강자와의 싸움은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보다 반 세대 전 천하제일로 불렸던 무황의 계승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풍천(風天)-!”
언월도의 자루 끝부분을 잡은 그는 맹렬한 기세로 그것을 휘둘렀다.
한 호흡에 수십 번에 달하는 참격이 주변을 휩쓸었고, 먼 곳에서 그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고수들조차 그 공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헛바람을 토해내며 재차 뒤로 물러났다.
“…….”
오직 단 한 명.
주호만은 그 폭풍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날카롭게 치켜뜬 두 눈으로 신검을 들었고, 닥쳐온 언월도의 날을 모조리 쳐내며 자신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만검(萬劍).”
슈아아악─!
그가 신검을 역수로 쥐며 강하게 내리찍자, 채진철의 풍천과 같이 바닥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검결이 앞으로 쇄도했다.
“극에 달한 쾌검인가.”
찰나라 말할 수 있는 순간에 자신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공격에도 채진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언월도를 들어 그것을 막아내었지만, 주호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파바바밧-!
하늘 높이 뛰어오른 그에게서부터 시퍼런 강기가 줄기줄기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나하나가 쉬이 볼 수 없는 기운이 담긴 것으로,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이는 지켜보고 있던 고수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휘리릭-!
채진철은 제 앞에서 언월도를 회전시켜 도막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주호가 쏘아 보낸 강기에 출렁이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고, 끝내 제 주인의 상처 없이 모든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무황의 이름 치곤 실망인데.”
채진철은 손에 쌓인 충격을 훑어버리며 씩 웃어 보였다.
지금 보여준 정도만 할지라도 한 시대를 풍미하기에 충분한 고수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가 처음 무황과 마주했을 때 받은 충격과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따름이었으니.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버거워 보이던데.”
“허어. 어딜 봐서 그렇단 것이지.”
“방금까지의 기세였더라면 도막 따위는 치지 않은 채 맨몸으로 막아냈을 터인데, 마황이란 이름답지 않게 몸을 사리는군.”
“…….”
그 말에 채진철의 눈이 씰룩였다.
도발하는 말임을 안다. 자신을 자극해 평정을 잃게 하고 그 빈틈을 파고들려는 것일 터.
다른 때였더라면 그 같잖음과 어리석음이 재미있어 호탕하게 웃어넘겼겠지만, 마황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있어 자부심과 같았다.
마도 역사 처음으로 마도지존이자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와 싸워 승리해 쟁취한 것이 아니던가.
“…좋다. 어디 한 번 언제까지 그리 날뛸 수 있나 보자꾸나.”
그렇지 않아도 시시각각 흘러가는 시간에 암천의 유예가 반각조차 남지 않은 상황. 슬슬 결착을 내어 주호를 반쯤 죽여 놓은 뒤, 그 신형을 납치하는 것을 끝으로 이곳을 유유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열받았군.’
주호는 씩 웃으며 신검을 들었다.
전부터 마황, 마황거리는 것이 제 별호에 제법 자부심이 있는 듯싶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살짝 찔러본 것인데 설마 이리까지 격한 반응이 나올지 몰랐다.
곧 그 거대한 전신으로 농밀한 살기가 팽배하게 휘몰아치며 선명한 의지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도 곧 이 싸움의 끝에 도달할 것이리라는 것을 깨닫고 긴장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보냈을 찰나.
툭.
주호는 돌연 손에서 검을 놓았다.
지켜보는 이들은 다들 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왜 검을 놓아버리는 건가.
설마 힘의 차이를 놓고 항복을?
그런 의문이 좌중 가운데 깃들었을 때,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다들 경악을 토해내었다.
“…이, 이기어검.”
제 주인에서 놓인 신검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허공에 체류하며 유려한 궤적으로 움직였고, 제 주인의 의지에 따라 검 끝을 채진철에게로 겨눴다.
우웅─.
완숙에 달한 어검술의 묘리가 펼쳐지자 신검 위로 작열하는 빛이 깃들었다.
그것은 점차 회전하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은 파공성을 내며 제 몸집을 부풀렸다.
“이기어검이라. 그것이 네 절초인가. 좋다.”
채진철은 날카롭게 치뜬 눈으로 언월도의 자루를 다잡았다.
작열하는 빛이 서린 주호의 신검과는 달리 언월도에는 그의 전신에 서린 시커먼 선과같이 짙은 흑색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도지존(魔道至尊)인 천마를 꺾었던 도이니.”
천지가 어둠으로 물든다. 귀신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파열음이 사방에 내려앉았고, 그의 언월도가 묵직하게 휘둘려졌다.
‘선수필승!’
슈아아아악─!
회전이 한계까지 이르러 이내 하나의 별이 되어버린 신검이 주호가 힘껏 내뻗은 팔에 따라 한 줄기 유성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눈부신 궤적이 기다랗게 허공을 갈랐고, 이내 그것은 힘껏 언월도를 내지른 마황과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