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질풍대가 마교의 함정에 걸려 큰 피해를 보고 얼마 뒤의 어느 날이었다.
사천과 감숙으로는 한창 전운(戰雲)이 절정으로 감돌았지만, 그 이외의 전역에서는 아직 평상시와 그리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아니, 일 말도 전쟁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사천, 감숙을 제외하고는 마인의 코빼기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전쟁이란 이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연합군에 참전하지 않은 문파에 있어선 그저 남 일일 뿐이고, 저만큼 모여 있으니 알아서 어찌 잘해주리라고만 생각할 뿐.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 같은 명문이라 할지라도 딱히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그 상층부나 마교와 직접적인 충돌이 있었던 이들이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대다수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름을 날릴 수 있을까 하는 저의가 지저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중원의 명문이라 하는 문파들의 앞으로 각기 다른 인원이 우뚝 섰다.
머리끝까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탓에 그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그들은 한날한시에 모두 같은 행동을 보였다.
구파일방 무당, 소림, 화산, 청성, 종남, 공동, 점창, 아미, 그리고 개방.
세가 연합은 소위 오대 세가라 칭하는 남궁세가, 제갈세가, 하북팽가, 사천당가, 그리고 모용세가까지.
“…무슨 용무입니까.”
각 문파의 입구를 지키고 선 무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설마 이곳까지 와서 행패를 부릴 사람이 있을까 싶은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인바.
하지만 그것은 곧 치명적인 피해를 유발했다.
구우우웅─.
느닷없이 나타난 괴한들의 전신에서 가늠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이 솟구친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울부짖었으니, 가히 개벽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세였다.
“…어, 어어.”
생전 처음 맞이하는 그 현상에 입구를 지키고 선 무인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정말로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인가. 인지를 초월한 격차는 머리를 얼어붙게 했고, 사지를 마비시켰다.
마침내 그것은 흉포한 살기와 뒤섞여 선명한 기세를 내뿜었으니. 뻗어진 주먹이, 검이, 도가, 창이 해묵은 은원을 타파하기 위해 울분을 토해내듯 눈앞에 자리한 모든 것을 소멸시키며 휘둘러졌다.
단 일수(一手).
그 한 번의 여파로 기나긴 역사를 자랑했던 명문의 얼굴이 무너지고 수십, 수백의 인원이 휘말려 단말마도 내뱉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그 직후 각 문파의 고수들이 황급히 뛰쳐나왔지만,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모두 할 말을 잃었을 뿐.
“흠.”
모든 문파가 미증유의 적에게 공격을 받고 있을 때, 무림맹의 정문 역시 우뚝 선 이가 있었다.
풍채는 커다란 바위를 닮은 듯했으며, 등 뒤에는 제 키보다 한 치가 더 큰 언월도가 매달려 있다.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부수기엔 아까운 건축물이구나. 하지만…….”
“아, 거참. 길 한복판에서 뭐 합니까. 지나다니는 사람 많은데.”
그런 찰나, 옆으로 걸어가다 팔을 부딪친 무인이 인상을 쓰며 톡 쏘아붙였다.
그 말대로 무림맹 정문에는 활발한 인파의 왕래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지원을 받고 방어선으로 보내는 것이 한가득하였으며 참전과 파견을 위해 출입하는 이들도 한 무리였다.
그 가운데 커다란 몸집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니 통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다른 이들은 그 커다란 풍채를 보고는 말없이 비켜 갔으나, 다른 이를 겁낼 필요가 없던 고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흠, 네 말이 맞구나. 길을 막은 내 잘못이지 하지만.”
“그러면 좀 비키시오.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은 반말이……!”
턱.
남자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자신을 향해 소리치던 무인의 머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무인의 머리가 수박처럼 산산이 조각나며 터져버렸고, 사방으로 그 살점과 피가 흩뿌려지며 자욱한 혈향이 피어올랐다.
“무릇 마황(魔皇)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런 것을 신경 쓰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을 터.”
그 주변을 지나던 이들은 잠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코끝을 찌르는 불쾌한 냄새에 두 눈을 크게 떴고, 이내 비명을 지르며 그 주위에서 물러났다.
“살인이다!”
“무림맹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것에 정문에 서서 차례를 관리하던 무림맹 무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쪽으로 달려왔다.
“흠. 첫 공격은 기선 제압을 위해 기습적으로 하라 했거늘 그것은 지키지 못하겠구나.”
스륵-.
마황(魔皇)은 제 뒤에 매여 있던 언월도를 풀러 손에 쥐었다.
동시에 두 팔뚝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오르더니, 이내 제 앞을 향해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
“허나, 차라리 잘 되었다. 좀생이처럼 기습이나 하는 것은 이 마황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니!”
“이보시오! 대체 무엇을……!”
“막아 보아라, 이백오십여 년 동안 중원의 무공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자꾸나!”
언월도의 끝이 세차게 회전하며 거센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황의 앞까지 다가간 무림맹 무사들의 몸을 이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크아악-!”
수 명의 무사가 순식간에 난도질당해 찢겨나가자 더는 그에게 접근하는 이가 없었다.
“으하하하하하하-! 더는 내 앞을 막아 세울 자가 없느냐! 무림맹주야! 쥐새끼처럼 숨어만 있지 말고 당장 나오너라!”
광기어린 웃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맹렬하게 휘둘러지던 언월도가 하늘에서부터 수직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그것이 땅에 닿았을 찰나.
파아앗-!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폭발적인 기세로 쏘아지며 무림맹의 정문을 강타했다.
어지간한 공격도 막아낼 철옹성 같던 그 벽은 순식간에 파괴되었고, 그 여파로 수십의 인명이 휩쓸려 한 줌의 핏물이 되었다.
“…아, 아아.”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누군가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 말을 더듬으며 인세(人世)에 없었던 공포를 바라보았다.
마황은 그런 그를 보며 씩 웃어주곤 언월도의 끝으로 땅을 짚었다.
“늦게도 나오는구나. 굼벵이처럼 느려 터져서 어디 써먹을 때라도 있겠느냐.”
“이, 무슨……!”
소란을 눈치채고 달려온 무림맹 고수들이 허망한 표정으로 무너진 잔해 위에 섰다.
부상자는 없었다.
휘말린 이는 전부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을 뿐.
“참으로 악독하고 패악한 손속이로다.”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무림맹 소속 고수들이 그 앞에 섰다.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무위도 가늠할 수 없지만, 먼저 기습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
마황은 씩 웃으며 다시금 언월도를 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들며 자신에게 닥쳐온 이들에게 휘둘렀을 찰나.
쩌엉-!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광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호오?”
마황은 자신의 도를 막아선 인영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가 성성하고 피부 위에 주름 하나 없는 것이 고작해야 약관 중반은 지났을까 싶은 외모였다.
‘반로환동한 것은 아닌 듯한데…….’
그렇다면 어찌 이렇게 강렬한 기세를 보일 수 있는가. 마황은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에 서린 시퍼런 불꽃에 짐짓 감탄을 토해냈다.
“난세(亂世)는 영웅을 탄생시킨다고 하지. 설마 이렇게 빨리 마주할 수 있을 줄은 몰랐군.”
애초에 목적은 무림맹에서 날뛰는 것으로 맹주를 끌어내 쳐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젊은 나이에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를 보게 되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호승심이 시뻘겋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좋다! 내 이백 년 전 못다 한 꿈을 이곳에서 이룰지니!”
파가각-!
언월도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며 신검의 날 위로 샛노란 불똥을 튀어 올렸다.
굳이 그것과 정면승부 해줄 이유는 없었기에 주호는 훌쩍 뒤로 물러난바. 그러자 어느새 그 옆으로 다가온 단철량이 슬쩍 물었다.
“내가 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맹주님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주십시오.”
“…괜찮겠는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단 한 번 검을 맞댔지만, 그 충격이 팔을 타고 넘어 어깨까지 저리는군요. 엄청난 신력(神力)의 소유자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래도 노인네보고 고생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이래서 자넬 좋아한다네.”
단철량이 웃음을 토해내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맹주님. 저희라도 합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근처로 무림맹의 고수들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단신으로 저 정도의 위용을 내는 것은 불가능한바.
상대의 경지가 인지를 벗어났다는 이야기였지만, 단철량은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도록 하세. 강호에 새로운 신성(新星)이 나타나는 기념비적인 자리일 테니.”
주호는 그 자리에서도 저 멀리 단철량이 제 수하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신성이라.’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다만, 단철량을 물리고 자신이 나선 것은 딱히 욕심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림맹이나 사신문에도 걸려들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습격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상대의 전력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는 소리. 그런 상황에서 무림맹 최고 전력인 무림맹주가 섣불리 나서 싸우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보다 더 최악은 없었다.
‘또한 이보다 든든한 뒷배는 없으니.’
자신 쪽은 설사 위기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뒤에 있는 단철량이 나서줄 터.
단순히 인과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지만, 그 무게는 천지 차이였다.
“젊은 고수여, 이름과 별호를 듣고 싶다.”
“…검절(劍節) 주호.”
“주호라. 간단하고 좋은 이름이로다.”
잠시간 그것을 곱씹던 마황은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본인은 신교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로 마황(魔皇)이라 불렸으며 마도(魔道)를 걷는 자로서 유일하게 천마를 뛰어넘었던 자.”
파각-!
언월도가 기습적으로 휘둘러진다. 마치 세상이 절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짧은 파열음이 일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주호는 어렵지 않게 그 일격을 받아내었다.
“채진철이라 하느니라.”
마황(魔皇) 채진철은 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는 이 젊은 고수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외모는 시원시원하게 잘생겼고, 검도 제법 좋은 듯해 보였으며, 결정적으로는 자신의 공격에도 조금의 움츠림 없이 완벽하게 막아내기까지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자로 삼고 싶군.’
호걸(豪傑)이라 하기에 충분한 인재였으나, 서로 걷는 길이 달랐다.
정상이 아닌 지금의 몸으로 쉽사리 제압하기도 힘들 것 같고, 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반쯤 죽여 놓고 데려간다면?’
제법 좋은 생각이지 않은가.
자신이 익힌 무공보다 이 마황의 무공이 더 뛰어난 것을 체감하게 해준다면 가르쳐달라고 매달려 올 수도 있을 터.
“청룡검식-.”
하지만 마황의 두 눈은 나지막하게 들려온 주호의 말에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무황(武皇)의 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