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곤륜파 장문인 태허진인 및 문도 일천여 명 마교 선봉대 기습으로 전사(戰死)」
“으음…….”
무림맹주 검선(劍仙) 단철량은 회의 도중 대지급으로 들어온 보고를 듣고는 신음을 금치 못했다.
곤륜파 문도 대부분은 전쟁을 대비해 그들이 터전인 청해에서 공동파가 자리한 감숙에서 거점을 구축했다.
물론 문파에 남은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곤륜파의 장로 및 나이가 많은 도사들은 끝까지 그곳에 남기를 자처했고, 자신들의 죽음으로 곤륜의 정기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장문인인 태허진인까지 그곳에 남아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사뭇 충격이 컸다.
회의장은 곧 소란스러워지며 각 문파를 대표해 자리한 요인들이 갑론을박을 펼쳤다.
“선전포고가 없었습니다. 아직 추이를 지켜보아야…….”
“곤륜파 장문인인 태허진인께서 등선하셨소이다. 곤륜의 문도 일천여 명도 사망했고. 더 무엇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맹주,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저들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낸 이상 더 시간을 끌었다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모릅니다.”
본래는 지금 당장 군세를 모아 마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백중지세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돌아가자 온건파는 할 말이 없어졌고, 강경파만이 두 눈을 시뻘겋게 붉힌 채 열변을 토했다.
‘이때까지와는 다르구나.’
단철량은 깊어진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중원의 긴 역사 가운데 마교는 항상 마도천하를 천명하고 전 무림에 선전포고를 담은 첩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고, 먼저 선공을 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맹주!”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장내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 단철량은 천천히 입을 열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림맹주의 이름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겠소. 전 무림 문파에 도움을 구하는 무림첩을 발부하시오. 호북, 안휘, 강호, 절강, 강서, 호남, 복건, 광동, 귀주, 운남의 문파는 사천으로. 하남, 요녕, 하북, 산동, 산서, 섬서, 영하의 문파는 감숙으로 지원을 보내주시오. 무림맹을 비롯한 구파일방과 세가 연합이 최전선에서 군세를 편성해 마교의 준동에 맞서겠소.”
엄숙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용단에 찬사를 보낼 때, 단철량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
강의실을 나온 주호는 서둘러 담우양의 뒤를 쫓았다.
강의 도중 나온 것이라 관생들에게 미안했지만, 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을 찰나, 주호의 얼굴이 갸웃거렸다.
‘이 앞은 사용하지 않는 창고밖에 없을 텐데.’
혹시 사신문에서 담우양에게 부탁해 자신을 이곳을 불러낸 것일까.
그렇다면 그 장본인은…….
주호는 제 별호의 색을 닮아 붉은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여성을 떠올렸다.
수련에 매진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종의 임무가 있는 것인지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가 벌써 한참이 지나갔다.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고 있지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내용뿐이다. 그런 가운데 갑작스럽게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은 놀라게 하려 함인가.
옅은 미소를 지음과 함께 지금은 쓰지 않는 창고가 위치한 터에 들어섰을 찰나.
“…….”
그는 이 주변에 내려앉은 은밀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없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화산행 전이라면 무심코 간과하며 지나쳤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다.
가슴에 싸한 기운이 감도는 주호는 본능적으로 담우양의 상태창을 확인했고,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촤르륵-!
그와 동시에 주호의 발밑에서부터 굵은 사슬 뭉치가 솟구쳐 전신을 꽁꽁 옭아맸다.
순식간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그 온몸을 속박한 사슬은 어느덧 모습을 드러낸 스물의 흑의인들이 사력을 다해 잡아당기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절정에 이른 고수들로, 막대한 진기가 그 사슬을 타고 팽팽히 쳐지며 스무 방위에서 그 움직임을 구속했다.
쉬익─.
검고 흰 두 자루의 검이 허공을 베어 가른다. 그 끝은 이내 사슬 뭉치에 부닥쳤고, 수십 번의 참격과 찌르기를 이어나간 끝에 멈춰 섰다.
“…….”
살곡의 살수인 흑야(黑夜)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확실한 촉감에 옆을 바라보았다.
그와 정반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백야(白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흑백쌍야(黑白雙夜).
살곡의 특급 살수로 단 한 번도 제 표적을 놓친 적이 없다는 소문이 물밑에서 자자한 살수들이었다.
물론 살수 특성상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호 백대 고수 중 비명횡사한 이들 중 적지 않은 이가 이들의 소행이라는 유력한 풍문도 있었으니.
“검절(劍節)의 위명도 덧없이 지는군.”
“사실 우리 둘 모두가 나선 것은 너무 과한 투자가 아닌가.”
“어쩌겠나. 지명 의뢰인 것을. 돈을 많이 받았으니 불만은 고이 접어두세.”
“그것이 유일한 위로인가. 다들 멀뚱히 뭘 하고 있나. 철수한다, 학관의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서두르도록.”
보통 이런 유명한 고수를 처리하면 지나치게 이목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초장에는 자신들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떠났지만, 작금 시국은 마교 때문에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니 적나라하게 시신을 방치하고, 그 위에 살곡의 표식을 남겨둘 생각이었다.
절그럭.
사력을 다해 당겨지고 있던 사슬의 속박이 헐거워진다.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렸기에 긴장을 지울 찰나.
“살곡의 살수들이 왜 날 노리지?”
흑백쌍야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한 나른한 음성이었다.
“…….”
그 자리에 있던 스물두 쌍의 눈동자가 모두 천천히 목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창고의 지붕, 그 끄트머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인상착의와 외모는 자신들의 표적과 너무나도 닮아있어 다른 쌍둥이가 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
흑백쌍야는 조심스레 시선을 나눴다.
도대체 언제 속박을 벗어난 것일까. 분명 틈은 없었다. 한철을 섞은 사슬이라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비싼 것이었다.
한두 번이라면 검기조차 버티는 강도를 자랑할 진데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인다니.
살수가 첫수에 암습을 실패한다면 성공 확률은 반절로 줄어든다는 것이 정설이다.
본래라면 물러나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번 의뢰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바.
살곡과 흑백쌍야의 이름을 짊어졌기에 죽이진 못하더라도 팔 한짝 정도는 빼앗아 와야 함이 옳았다.
‘스물의 일곱 살수. 그중 절반은 옥쇄할 각오를 한다.’
흑야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들까지 합해 살곡의 칠할 전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끼 살수들은 키워내면 그만이었기에 다소의 피해는 감수하기로 했다.
파아아앗-!
그의 신호를 받은 일급 살수 스물이 일시에 주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흑백쌍야는 그 즉시 좌우로 서로 갈라져 담을 타고 지붕 위로 올랐고, 여전히 미동조차 보이지 않은 채 앉아 있던 주호의 사각을 노렸다.
강호에 알려진 검절의 무위는 절정 상위. 하지만 보통 제 전력을 숨기는 만큼 절정의 끄트머리나 초절정의 초입에 이르렀을 거라 상정했다.
나이를 보아도 놀랄 만큼의 경지지만, 흑백쌍야는 지금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의 고수를 상대한다고 상정한 채 자신들의 전력을 보였다.
쉬이익-!
암기, 독, 모든 공격수단을 떨치며 끝내는 검을 들고 직접 그 목을 노렸다.
어느 것 하나 스치기만 하더라도 치명적이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닥쳐들던 흑백쌍야는 곧 주호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눈부신 빛에 세상이 물들어가는 것을 목도했다.
“…….”
흑야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이 땅에 엎어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슬쩍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이전과 별다른 것은 없었다.
스물두 명이 일시에 공격을 가한 창고의 지붕은 멀쩡했고, 땅 역시 사슬이 끌린 흔적을 빼곤 전과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들에게 부닥친 그 눈부신 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툭.
멍해 있던 흑야의 손끝으로 무언가가 닿았다. 천천히 그것을 내려다보니 자신과 반평생 살업을 함께 해왔던 백야의 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달라진 것이 없던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보길 거부했던 것이었다. 흑야는 자신의 주위로 자리한 스물한 개의 시신에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내며 제 앞으로 다가온 주호를 올려다보았다.
“살려주십시오.”
일반적인 살수라면 임무가 실패할 시 자결하는 것을 택했지만, 특급 살수 정도 되는 이라면 경우가 달랐다.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살곡에 장래적으로 더 이득이 되는바. 그렇기에 목숨을 구걸했으나, 주호의 발길질은 거침이 없었다.
팍-!
흑야는 그대로 바닥에 제압되어 가슴을 밝혔다. 가슴을 내리찍는 무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주호의 눈에 서린 잿빛 일렁임이었다.
“말하라.”
“무엇을, 큭.”
“무엇이든지.”
살곡 출신인 것은 이미 들켰다.
그렇다면 저 물음은 의뢰인이 누군지 말하라는 것일 터. 흑야가 입을 열 찰나, 주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발설할 수 없다는 말 따위를 지껄였다가는 혀를 뽑아주마.”
“…애초에 알지 못하오. 살수들은 제 의뢰인을 조사하지 않소.”
“살곡 특급 살수 흑야. 내가 네놈들이 습격하리라는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
흑야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들의 출신이 살곡인 것도 모자라 직급과 별호까지 전부 들켜버렸다.
외부에선 자신들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를 남겨두지 않으니 내부에서 흘러나간 것이 분명할 터.
‘제기랄, 잘못 건드렸구나.’
검절(劍節).
그는 고작 신진 고수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은 살곡 제일 고수인 곡주를 상대할 때보다 더 거대한 것이었다.
“…정말로 알지 못하오. 사실 배후를 캐내려 하다 두 명의 일급 살수가 비명횡사한 뒤로 손을 떼었소.”
“그렇다면.”
더는 살려둘 가치가 없다.
주호가 손을 들자,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 마교! 심증이지만 그가 마교와 관련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만남을 갖던 이들 가운데 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주호로서는 딱히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살수를 보낼 이들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 대상을 얼추 좁혔을 뿐.
“말했으니 살려주십…….”
“누가 살려준다고 했지?”
흑야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살곡의 특급 살수요! 살곡을 대표하는 살수인 흑백쌍야가 모조리 죽으면 살곡으로서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당신을 죽이려 총력전을 할 수밖……!”
서걱-.
주호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채 손끝을 가볍게 휘둘렀다.
제 목을 스치는 서늘한 살기에 흑야는 두 눈을 크게 떴고, 이내 피가래를 뱉어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살수 따위를 두려워할까.”
죽음을 선고하는 나지막한 한마디.
흑야는 그의 등 너머에서 도사리고 있던 사신(死神)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