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무림맹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회신이 온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주호는 시간 대부분을 입신지경에 다다르며 변화한 감각에 적응하려 애썼다.
일부는 후기지수들의 무공을 손봐주거나, 화산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 같은 행사에 참석하는 등 선혁우에게 힘을 보태어 주었다.
그렇게 습격이 있은 지 엿새째의 아침. 정천 학관 일행은 여전히 검은 물결과 함께 침중한 분위기로 뒤덮여 있는 화산을 뒤로한 채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음이 편칠 않군.”
“나도 마찬가질세.”
당천유가 중얼거리자 철대환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함께 이곳에 왔던 남사일과 선우연은 본산에 남았다.
선혁우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 피해가 전부 수습되지 않은 가운데 학관으로 복귀하기에는 마음의 걸림돌이 크다는 이유였다.
“…전쟁, 일어나겠지요?”
남궁휘가 살짝 의기소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번 마교의 습격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전까지는 남궁이란 이름에 큰 자부심이 있었다. 설령 마교의 고수들이 습격해온다고 할지라도 멋들어진 모습으로 그들을 격퇴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하지만 정작 그 상황에 이르자 머리가 새하얘지고 팔다리가 경직되어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악비산은 그런 남궁휘의 자조를 어린 표정을 보고는 그 머리를 거칠게 눌러주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들은 정체가 무엇이었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
팽우혁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제 손목을 매만졌다.
벌써 며칠도 전의 일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제 딴에는 주예향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호기롭게 나선바. 하지만 결과는 그리 녹록지 못했다.
“그랬지. 마치 쇳덩이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한 번에 꿰뚫어버리던데.”
“쇠라고 한들 일 점에 힘을 모으면 버텨낼 재간이 있을까. 그저 단단하기만 해선 내 창을 감당할 수 없지.”
악비산은 씩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그는 단 한 번의 경합으로 흑의인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혔다. 그것을 말하자 당천유와 철대환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강시이려나.”
“지금에선 그럴 확률이 높겠군.”
“앞으로도 그런 걸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지.”
천후는 창가에서 턱을 괸 채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강시라고 했지만, 분명 평범한 녀석들은 아니었다. 세상에 어느 강시가 검기를 사용하고, 사람처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승님께도 말씀드려야겠군.’
사신문에는 주호가 보고를 할 터.
그 자신은 별도로 스승인 천우희에게 보고를 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은 척해도 이렇게 해주는 것을 좋아할 테니.
다만.
“…….”
일행이 대화하는 가운데,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비통해하는 눈빛과 흘러나오는 슬픔을 눌러 삼키려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잠시간 그러고 있을 찰나, 옆에 있던 당천유가 의아한 모습으로 물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는가.”
“…아닐세.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다시 눈을 뜬 천후의 표정은 이전과 같이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
초목 사이로 흐르던 더위가 세상 가운데 완연하게 내려앉았다.
화산에 갈 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선선했던 날씨는 무더위로 바뀌었고, 촌각을 밖에서 걷자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뒤덮이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주호 일행은 학관으로 복귀한 직후 그대로 눌러앉아 제 수련에 애썼다.
마교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이상 괜히 움직였다가 그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에 자중하자는 결정이었다.
그렇게 전반기 휴관의 일정은 훌쩍 흘러갔고, 하반기 개관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히 이루어졌다.
작년을 생각한다면 기이할 정도로 잠잠한 모습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학관 자체의 행사와 복귀한 관생, 그리고 그들의 친인척으로 학관이 북적거렸으니.
하지만 무림맹의 권고와 학관 수뇌부에 의해 개관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그와 반대편에 있던 천무학관 역시 비슷한 모습이었다.
화산에서의 습격도 있었고 강호 전역에 흐르는 전운(戰雲)을 의식하는 모양새가 강했다.
그렇게 개관 이후 며칠이 지났을까.
“이 부분은 이전에도 거론했던 요소이다. 팽우혁, 대답할 수 있겠나?”
“무공의 각 상성에 관해서는 세간에 널리 퍼진 이야기가…….”
주호는 한창 실전의 이해 강의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화산에서의 일로 검절(劍節)의 위명이 한층 더 높아진바. 그렇기에 강의실에 자리한 삼백의 관생들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여느 때와 같이 그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주호의 강의를 제외하고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타다다닥-!
강의 중간, 그 고요한 적막을 깨트리는 다급한 발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이윽고 강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고, 모습을 드러낸 담우양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주, 주교관님. 잠깐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여유와 느긋함을 신조로 살던 그가 이리도 다급한 표정이라니.
필히 예사롭지 않은 일일 것이리라. 자신을 따르는 수백 쌍의 눈동자에 양해를 구하며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
청해의 곤륜파.
곤륜이라는 이름은 문파가 자리한 산맥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알려져 있었다.
도가 계열에서 파생된 문파로 다른 구파 계열의 문파들과는 달리 세속적인 요소들을 탈피해 정신적인 수양에 애쓰려는 모습이 강했다.
지금은 비록 그 명성이 조금 바랬지만, 옛적부터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수많은 고수를 배출해낸 명문으로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지리적인 요인이었다.
하필 마교가 있는 신강과 중원 무림의 교두보라 할 수 있는 청해에 위치한 탓에 정마대전이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항상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
곤륜파는 다른 명문들이 그러하듯 제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그렇기에 몸이 스러지더라도 마교의 침입을 불허하겠다며 사생결단을 반복했지만,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그들은 큰 피해를 보았다.
물론 그 의기를 높이 산 다른 문파들이 전쟁 직후 곤륜을 재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수두룩했던 멸문지화의 위험은 곤륜에도 경각심을 심어주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 역시 몇 가지 방침을 정했다.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더는 곤륜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미래가 창창한 본산의 제자들이 허무히 죽어나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작금 곤륜 역시 마교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고 곤륜의 후기지수를 비롯해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을 전부 다른 곳으로 이동하도록 조치하였다.
물론, 그 전부가 간 것이 아니었다.
곤륜에 수십 년간 터를 내리고 살아온 노고수나, 문파에 애착심이 있는 이들은 마교의 이빨이 목전에 다가옴에도 문파에 머물렀다.
그 수가 대략 천여 명. 그들은 평상시와 같이 곤륜에서 제 수양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탁.
곤륜산맥 태허봉.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흉악한 외모의 남자 한 명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 위로 발을 걸쳤다.
“드디어.”
천마신교 선봉대 대장
수라마제(修羅魔帝) 소위상
수십 년 만에 중원의 문턱에 선 마교의 대마두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마도천하(魔道天下)의 시대가 도래하는구나.”
정말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잠시 태허봉 끄트머리에 서서 자신의 몸을 때리는 세찬 바람과 함께 그 여운을 즐기던 소위상의 표정이 광기에 찬 것으로 변했다.
“신교불패(神敎不敗)!”
그는 제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불끈 쥐었다. 그러곤 그것을 힘차게 앞으로 내지르며 말을 이었다.
“천마무적(天魔無敵)!”
쉬시시식-!
그와 동시에 일 만에 달하는 천마신교 선봉대의 고수들이 일시에 몸을 날렸다.
“…….”
곤륜파 외곽을 순찰 중이던 곽허는 오늘도 다른 날과 변함없는 하루가 지나길 바랐다.
마교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것은 알고 있지만, 그는 곤륜에서 태어나 이때까지 이곳에서만 자라왔다.
그런 가운데 집이나 마찬가지인 곤륜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하라는 말은 곽허에게 있어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곤륜을 넘으려면 내 시체를 보아야 할 것이야.’
비록 지닌 무공은 보잘것없으나, 문파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어느 고수에 못지않았다.
그렇기에 문파에 남은 다른 이들처럼 평범히 일과를 시작했지만, 문파의 외벽을 따라 순찰하던 중 태허봉 부근에서 보이는 광경에 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솨아악-!
곽허는 일순간 하늘이 어둠에 물든 줄 알았다.
수백? 아니, 수천?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선명한 태양을 가리며 시커먼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곧 그 미증유의 위험은 곤륜을 향해 서슬 퍼런 살기를 드러내었으니.
“저, 저…….”
위쪽 망루에 있던 무사가 목소리를 떨며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라고 아무런 대책 없이 이곳에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주변에 마교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망도 구축해놓았고, 시시각각으로 보고가 들어오도록 체계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마교다! 마교의 습격이다!”
“마교가 전쟁을 일으켰다!”
정마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경종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교라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곤륜의 장문인 태허진인은 문파 안팎에서 들리는 소란에 눈가를 잘게 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가 저 멀리 바라보니, 새하얀 설산의 위를 새카맣게 물들이며 이쪽을 향해 닥쳐오는 검은 물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설사 마교라 할지라도 함부로 곤륜을 넘기는 불가능할지니!”
태허진인은 웅혼한 내력이 실린 목소리로 본산의 제자들을 다독였다.
이곳에 남은 이들은 제 각자 곤륜이라는 이름을 위해 제 몸을 옥쇄할 각오가 있는 결사대였다.
‘일천의 문도와 장문인.’
이 정도라면 곤륜의 이름이 역사에 먹칠 당하는 일은 없을 터.
태허진인은 힘이 가득 들어간 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 혼자 남고 싶었지만, 곤륜이라는 이름의 명분을 세우고 깊이를 더하기 위해 이들은 자신들 역시 함께 할 것을 자처했다.
“빌어먹을 자리구나.”
태허진인은 삶의 끝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이 이들을 사지로 밀어 넣은 것과 진배없다.
그러니 이 업보는 저승에서 모두 이 몸으로 감당하리라.
다음 세대에 곤륜이라는 이름의 꽃을 찬란하게 피워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