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장문인의 관저.
장문인인 선혁우를 비롯해 선청우, 벽천양, 남사일, 그리고 매화검수장 조원일 등 화산파 요직에 오른 고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의 습격이 있었던 직후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목숨을 잃은 제자들이 많았고, 부상자는 그보다 더 많았다.
이들은 요 며칠간 화산의 어른으로서 그 피해를 수습하고, 제자들을 다독이며, 각지에 연락을 보내느라 한숨도 쉴 틈이 없었다.
오늘 낮이 돼서야 겨우 한시름을 돌리며 이곳에 모일 수 있었다.
“천양아. 상처는 괜찮은 것이냐.”
“애초에 그리 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했지요.”
선혁우의 물음에 벽천양은 제 어깨를 건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호기로웠지만, 수십 년 만에 벌어진 수라혈마와의 사투는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외상은 물론이고 내상까지 적지 않아 당분간은 요양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피해 수습에 애쓰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 오래간만에 이야기하니 좋구나.”
“…직설적으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근래에는 광증이 가라앉아 제법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벽천양의 말에 옆에 있던 이들이 다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오랫동안 그 기행을 옆에서 지켜보며 수습해왔던 선청우는 옅은 웃음까지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뭐, 장문인의 말씀처럼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느냐. 예전처럼 눈이 벌게져서 침을 질질 흘리던 때보단 훨씬 낫구나.”
“…광증은 제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던 벽천양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광증은 말 그대로 광증이었다. 자신이 미친 것조차 알지 못하며 그것이 마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일상을 지내왔으니.
“타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참, 말이 이상하게 전달되었구나.”
선청우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며 머쓱한 표정으로 황급히 변명하듯 덧붙였다. 사실 다른 이들도 공감하는 마음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대부분보다 벽천양의 배분이 더 높았으니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이때까지 본산에 많은 폐를 끼쳤으니 열심히 해야지요.”
벽천양은 짧은 한숨과 함께 그리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자자, 그러면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가볍게 손뼉을 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선혁우가 좌중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그의 눈짓을 받은 남사일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벽 한쪽으로 나아가 큰 전지(全紙)를 그 위에 걸었다.
“본산의 피해 상황은 이렇습니다. 사상자는 총 오백여 명으로 사망한 이가 일백서른둘, 부상자가…….”
남사일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좌중에선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교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진 지금 이러한 종류의 습격이 있으리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화산도 다른 문파와 같이 혹시 모를 위험을 경계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대비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족했던 것인지 적지 않은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흉수는 기본적으로 도검불침(刀劍不侵)이었습니다. 거기에 흑색, 적색, 백색으로 이어지는 붕대의 색에 따라 그 수준이 구분되었는데, 제일 많았던 흑색이 검기상인의 경지, 적색은 절정에서 초절정 사이, 흰색은 가히 장로급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쓰러뜨리면 시독(屍毒)까지 뿜어냈으니 원…….”
누군가가 성가셨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검불침에 시독,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검기상인급 고수 일백이란 전력을 과감하게 소모품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어지간한 대문파라 할지라도 힘든 일이었다.
“마치 강시 같군.”
“강시가 내공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나도 모르네. 애초에 지난 수십 년간 강시 같은 존재가 나타난 적이 없으니.”
“그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군요.”
“도검불침에 검기상인급 고수인 강시라. 이건…….”
좌중이 곧 이야기 소리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가운데, 선혁우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검기상인급 고수인 강시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지 않은가.
“그보다 더 눈여겨 보여야 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저와 싸웠던 수라혈마는 분명 삼십 년 전에 현 무림맹주인 검선의 손에 쓰러졌던 마인입니다. 매화동에서 장문인의 앞을 막아 세웠던 흑수마제는 그보다 한세대 이전에 강호를 종횡했던 마두였지요.”
벽천양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달아 올라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들의 몸으로 강시를 만든 것이 아닙니까?”
“흑수마제는 몰라도 수라혈마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불태워 없애버렸다네. 그건 내가 똑똑히 봤어.”
“흐음.”
더군다나 그것들은 강시라고 보기엔 너무 생동감이 넘쳤다. 이성을 지닌 것도 모자라 이쪽과 대화가 성립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똑똑-.
장내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밖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음? 창이가 왔나?”
다른 화산의 고수가 제 지인이 온 줄로 알고 고개를 들었을 때, 선혁우는 가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깨어난 모양이구나. 문을 열어주거라.”
“알겠습니다.”
곧 남사일이 문을 열자, 몸 곳곳에 붕대를 두르고 있던 주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등장에 장내에 있던 이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우선 주호의 진면목을 모르던 대부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반대로 제일 상석에 있던 선혁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선청우는 깊어진 눈으로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벽천양은 선혁우와 같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남사일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으며, 오직 조원일만이 살짝 불편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서 오게. 다들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이 친구 덕분에 내가 발이 묶이지 않아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어.”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자네가 흑수마제를 쓰러뜨려 준 덕분에 서둘러 수습할 수 있었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 역시 일련의 이야기를 이미 전해 들었다.
모종의 이유로 함께 폐관 수련에 있던 와중 흑수마제의 습격을 받았다.
선혁우는 주호가 자신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흑수마제와 싸웠고, 끝내 그를 꺾었노라 칭찬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선혁우가 흑수마제에 치명상을 가했고 주호가 그 마무리를 했다고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검절의 위명이 자자하다곤 하나 한 세대 이전 정점을 찍었던 고수를 본인의 힘으로만 쓰러뜨렸다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마침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자네가 상대했던 흑수마제나 천양이를 습격했던 수라혈마나 모두 죽었다고 알려진 이들이니.”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온 것인가, 선혁우가 그렇게 중얼거릴 찰나 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깨어나자마자 이곳으로 온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무엇을 알고 있는가?”
“마교의 주술 중 역천환혼대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천에 떠도는 혼을 불러와 사자(死者)의 육신에 깃들게 하는 대법이지요.”
“…그런.”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 바로 옆에 있던 남사일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흑수마제나 수라혈마나 다 그것으로 불러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말 그대로 역천이로군.”
당연하게도 쉬이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보고 겪은 것이 있었다.
더욱이 역천환혼대법이라는 이름도 마교스러웠고, 마교라면 혹시? 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 말에 무게가 실렸다.
“머리가 아프군.”
기괴한 짓거리를 많이 하는 마교지만, 강시의 몸에 전대 고수들의 혼을 불러 깃들게 하다니.
사자에 대한 모욕이자 섭리를 거스르는 짓이라 욕하고 싶지만, 막상 되살아난 이들조차 좋다고 하며 싸우는 모습이 떠올라 한숨만 푹 내쉬었다.
“다른 곳에서도 쉬이 믿어 줄런지 모르겠구나.”
“무림맹에는 제 이름을 함께 적어 보내시면 될 겁니다.”
“…그렇지, 자네는 맹주와 연이 있었다고 했지. 알겠네.”
그 말에 다른 화산의 고수들이 주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장문인과 스스럼없어 보이는 태도도 놀라울진대, 무림맹의 맹주와 관계있다니. 물밑에서 떠돌던 소문이 정말로 사실이었다는 것에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했네. 큰 도움이 되었어. 아직 몸이 편치 않을 테니 돌아가 푹 쉬시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네.”
휴식을 취하라는 말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포권을 취하는 것을 끝으로 관저를 나섰다.
그는 자신이 문밖으로 나서자 곧 시끌벅적한 말소리로 뒤덮인 그곳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제 방으로 돌아가 쉬는 듯했지만, 이내 방향을 바꾸었고 후기지수들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어? 교관님?”
숙소와 바로 붙어 있던 연무장.
그곳에 한 무리의 인기척이 느껴졌기에 발을 들이니 제일 앞쪽에 있던 선우연이 그를 발견했다.
“다들 수련하고 있었구나.”
“네. 어제까지는 화산을 도와 피해를 수습하는 것에 손을 보태고 있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좀 한가해져서…….”
다른 후기지수들 역시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으나, 이내 주호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분명 주호는 그 앞에 존재했지만, 기척이나 기세 따위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허상과 대화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지 않는가.
평소라면 범상치 않은 내력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와 상대를 긴장하게 했을 터.
대부분은 아직 부상 중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으나, 천후만은 제 손을 꽉 쥐며 침을 삼켰다.
‘문주님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사흘 전 화산에 서린 짙은 어둠을 밝힌 환한 빛무리는 천후 역시 목도한 것이었다.
그 진원지가 주호라는 것은 이미 자자하게 소문이 퍼진바. 천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제 긴장을 숨겼다.
“다들 괜찮은 것이지?”
“예. 우혁이만 좀 다치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은 듯합니다.”
선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일행을 돌아보았다.
남궁연은 기절하듯 잠자고 있는 주예향을 돌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 둘을 제외하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자리에 나와 수련 중이었다.
“음.”
주호는 잠시 팽우혁의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장기가 조금 상했고 내상도 적지 않다. 제 딴에는 다른 이들에게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멀쩡한 척을 하는 듯했지만, 주호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조금 더 요양하여라. 괜히 무리했다간 상처가 덧날 수 있다.”
“…새겨듣겠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한눈에 간파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팽우혁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일정은 이미 틀어졌다. 지금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들 마음을 여유롭게 먹도록.”
며칠 후 무림맹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후기지수들을 보며 여유를 가지라 말하자 그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이만.”
연무장을 빠져나온 주호는 제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여니 침상에는 주예향이 누워있었고 그 옆에 기대어 졸고 있던 남궁연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니 그녀 역시 제법 피곤한 것일 터.
쓴웃음과 함께 다시 조심스레 자리를 벗어난 주호는 숙소와 바로 붙어 있던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공터였다.
그 중앙에 앉은 주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상태창]
이름: 주호
별호: 검절(劍節)
직업: 정천학관 일급교관
나이: 스물일곱
소속: 정천학관, 사신문
경지: 화경(一/十)
무공: 청룡신공(八成)
입신지경, 신화경(神化境)
무학의 끝이라 알려진 경지에 도달한 지금에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갈 길이 멀구나.”
자신은 이제 막 첫발을 떼었을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