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살벌하군.”
주호는 가볍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으나, 그 몸은 어느 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입신지경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 고수의 진정한 힘이 이것이라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전신이 저릿해지며 몸이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 닥쳐왔다.
주호는 신검의 끝을 하늘로 높이 세운 채 그것을 다잡았다.
가볍게 호흡을 들이 내쉬었고, 천천히 오른발을 먼저 내디디며 신공을 운용했다.
우우웅─.
경지의 상한선을 가늠하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다.
전력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뼛조각 하나 추리기 힘들 터. 그렇기에 그는 매화동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제 전력과 마주했다.
‘더? 더?’
단전에 잠들어 있던 내공이 마치 대해(大海)의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이전이라면 정신이 아득해질 법한 양임에도 불구하고 신검(神劍)은 한계가 없는 듯 그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고, 어둠 속에서 새파란 불꽃을 피워 올렸다.
콱.
왼발을 내디디자 그 막대한 기운에 지면에 균열이 일며 무너져 내린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서 있던 흑수마제의 신형이 순식간에 지척으로 닥쳐왔다.
“어림없다-!”
일수와 일검이 충돌한다. 푸른 불꽃의 기세는 거대했지만, 흑수마제의 손을 휘감고 있던 마기도 농밀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 한 치의 밀고 밀림 없는 백중지세를 보이며 맞서 싸웠고, 한 호흡 동안 수십 합을 겨루었다.
“…큭.”
먼저 밀려난 것은 주호였다.
신(身)의 문제가 아니라 심(心)의 문제. 그의 육신은 아직 전의로 넘쳤지만,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와의 전력을 다한 싸움은 처음인지라 자신이 계속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살짝 망설임이 서린 것이었다.
“으하하하하하-!”
당연히 흑수마제는 그 틈을 노리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경지가 높은 것 이외에도 상당히 노련한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신검의 날을 두드리던 손을 쭉 폈고, 제 별호에 걸맞게 흑수를 찔러 주호의 가슴을 거칠게 훑었다.
찌이익-!
일급 교관의 정복이 길게 찢어져 나가며 그 육신이 드러난다. 한치가 모자라 끝까지 파헤치지 못한 아쉬움에 흑수마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몸놀림 하나는 천하제일이로구나. 소림의 땡중도 나를 잡기 위해 팔 한짝을 내줘야 했거늘.”
척.
주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너풀거리는 옷가지에서 신경을 끊은 채 슬쩍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고,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잠운(潛雲).”
파바박-!
불과 일 년 전에는 한 번에 예닐곱 갈래의 검기를 펼쳐내는 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지금 신검의 끝에는 수십 줄기에 해당하는 검강이 갈라져 나와 맹렬하게 회전하며 흑수마제에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검우(劍雨)와도 같구나! 허나 고작 이 정도로는-!”
그의 두 흑수가 크게 원을 그렸다.
제 앞을 가리는 방원결이었다.
마찬가지로 시커먼 강기막이 그 앞에 나타났고,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검강을 무리 없이 전부 막아내었다.
“현검(絃劍).”
주호의 공격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펼쳐진 청룡검식에 주변의 지반이 한 차례 더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둘의 싸움으로 피폐해진 대지가 불길한 신음을 내었고 지진이라도 난 듯 그 균열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흡-!”
물론 흑수마제는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마기를 온몸에 두르는 것으로 현검의 압박을 해소했고, 제 권역을 공고히 다지며 그 공격을 파훼해갔다.
“만검(滿劍).”
검마(劍魔)의 목숨을 앗아갔던 절정의 검식이 다시 펼쳐진다. 아까 전엔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던 와중이라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지만, 두 다리를 지상에 굳건히 붙이고 있는 와중 이것보다 더 위력적인 초식은 없었다.
쉬이이익─캉!
만검은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이니, 권역 안에 모든 것을 베어내는 절정의 쾌검었다.
“…….”
두 팔을 교차해 그것을 막아낸 흑수마제는 제 팔뚝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으로 흩어지는 파편을 보곤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반동이.’
상대가 펼친 검식이 위력적인 것은 맞지만, 막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충격이 누적되었다는 것은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린 반동의 여파가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각, 흑수마제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반각이라 가늠했다.
적어도 그 안에 눈앞의 남자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의 일은 실패로 돌아갈 터.
“…기껏 얻은 삶인데 그럴 수야 없지.”
후우웅─.
그의 두 팔을 휘감은 흑색 마기가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선흑강(螺線黑罡).
진위령을 마도의 초고수이자 흑수마제라는 별호를 얻게 해주었던 극강의 일수.
당시 천하제일인라 일컬어지던 고현 대사에게 꺾일 때까지 패배를 용납지 않게 해주었던 초식이었다.
더욱이 천하제일인 마저 그 초식을 파훼하지 못해 오른팔 한짝을 버리는 것으로 제물 삼지 않았던가.
자신이 쌓아온 모든 무학의 정수가 담긴 초식을 감히 주호가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청룡신공.”
주호 역시 이 싸움이 끝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꼈다.
패배하리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순순히 승리를 쟁취하리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저 검을 하늘 높게 들어 올린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
쉬이이이익-!
나선흑강의 강선(鋼線)이 어둠 위로 길게 이어지며 닥쳐왔다.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은 마치 폭풍을 연상시키는 듯했지만, 주호는 명경지수를 유지한 채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불꽃을 피워 올렸다.
“멸천(滅天).”
하늘을 가르는 검이었다.
휘말리는 어둠마저 소멸시키는 그것은 이윽고 자신에게로 닥쳐온 두 줄기의 강선과 마주했다.
파각-!
너무나도 강대한 힘에 공간 자체가 뒤틀린다. 어둠이 일그러지고 밤이 발을 묶였다.
쿠구우웅.
나선흑강의 강선 한 줄기는 청룡신공의 멸천과 완전한 동수를 이루었다.
한점의 파멸도 없이 서로를 상쇄하며 그 중간에서 소멸했고,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무(無)를 이루어내었다.
다만, 강선은 처음부터 두 줄기였을 따름이었다.
퍽-!
주호의 신형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뒤로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가까스로 왼팔을 들어 심장만 지킬 수 있을 뿐 나머지 전신은 걸레짝이 되었다.
“…….”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이 토해져 나왔으나. 입을 열자마자 역류한 피가 한 움큼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후우.”
흑수마제는 나선흑강을 거두었다.
생전 고현 대사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장 벅찬 적수였다. 자신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고절한 검술 역시 쉬이 볼 것이 아니었으니.
“그 자리에 누워 있어라. 그리한다면 비록 추할지라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
애초에 흑수마제에게 청룡을 죽이라는 임무는 없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화산에 타격을 입히라는 것이 원래 임무인바.
주호가 더는 전투를 속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흑수마제는 몸을 돌려 아직 싸움이 한창인 화산의 안으로 난입하려 했다.
툭.
“…….”
하지만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인상을 쓰며 멈춰 섰다.
“왼팔은 박살 났고, 전신의 요혈이 강선에 꿰뚫렸다. 어지간한 철인(鐵人)이라 할지라도 족히 몇 달은 누워 요양해야 할 상처이거늘, 굳이 벌주를 자처하겠다는 것인가.”
“…마제(魔帝)라 불리는 주제에 온정이 많구나.”
주호는 비척이면서도 신검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수마제는 그 말에 한쪽 눈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중요한 존재라 하지 않았는가.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입신지경에 이르렀다. 시간을 준다면 그 경지는 더욱 높이 솟아오를 터. 잘못하다간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에 사로잡을 것을 말했지만, 자신을 되살린 혼돈이라는 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무르익지 않기는 개뿔.’
그는 자신의 전력을 다한 흑선나강의 강선을 막아냈다. 비록 그 절반인 한 줄기밖에 견뎌내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어디인가.
“퉤, 되었다. 사지를 박살을 낸 뒤 어디 절벽에 던져놓고 나중에 찾아오라면 그때 나서도 괜찮겠지.”
흑선나강을 견딜 정도의 몸이니 사지가 박살 난 상태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하여도 죽지는 않을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흑수를 뻗었을 찰나, 전신을 훑는 서늘한 살기에 그 몸이 멈칫했다.
“…음?”
주호의 기세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정도 고수의 깊은 울림이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야수와 같은 거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다행히 시야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그 한쪽으로 시뻘건 혈기가 얼룩져오듯 점점 번져가기 시작해왔다는 것이었다.
주호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적해(赤海).’
무황이 찢어낸 혈천신교의 반쪽 영혼. 자신의 몸에 자리 잡은 그것의 잔재가 내포한 힘이었다.
분명 사신문주인 하월벽과 장로인 곽무혁이 몸속 깊은 곳에 봉인해두었다고 해놓은 그 기운이 입신지경의 도달함으로 풀린 것인지 자유롭게 솟구치며 활개치고 있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이라면 지금은 자신의 의지에 반응하며 움직인다는 점.
우웅─.
주호는 천천히 그 기운을 움직였다.
청룡신공 운기의 역순을 따라 몸을 순환했고, 동시에 청룡신공의 기운을 운기 하며 천천히 내부를 관조했다.
혼원일극(混原一極).
서로 다른 근원을 품은 기운이나, 결국엔 하나의 끝으로 나아가리라.
혼미해져 가는 정신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묘리였다. 얼핏 보면 만류귀종과 같다고 할 수 있었지만, 혼원일극은 정반대되는 성질을 품은 기운을 하나로 합쳐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합니다.]
주호는 기대고 있던 신검을 뽑아 하늘 높이 들었다.
몸 왼편에선 청룡신공의 시퍼런 기운이, 오른편에선 적해(赤海)의 시뻘건 기운이 솟구치며 신검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키잉!
날 선 소리가 허공을 떨렸다.
그야말로 찰나라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 흑수마제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면 안 된다. 그의 본능이 격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무게 중심을 내디딘 발로 옮김과 동시에 포탄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흑수마제의 손에 다시금 나선흑강이 깃들었다.
쉬이이익!
두 줄기의 강선이 지면을 훑으며 거칠게 솟구쳤고, 이내 주호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
그 찰나, 흑수마제는 세상의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바람의 나부끼는 먼지, 일렁이는 머리카락, 나선흑강의 강선을 휘두르며 나아가는 자신의 움직임까지.
하지만 놀랄 것은 없었다.
초고수 간의 싸움에서 ‘영역’에 도달하면 흔히 있는 일. 자신 역시 밥 먹듯이 드나든 순간이 아니던가.
“…….”
하지만 그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묘한 기시감에 두 눈을 치켜떴다.
바로 지척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주호의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으니.
분명 죽음이 지척까지 다다른 상황이었다.
자신이 이대로 조금만 더 손을 내민다면 나선흑강의 강선은 일말의 자비조차 없이 그 피륙을 헤치고 장기를 뜯어내며 목숨을 취할 터.
‘그런데, 웃어?’
흑수마제는 도저히 이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