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콰르릉─.
뇌성이 울려 퍼질 때마다 시뻘건 화염이 허공에 수놓아지며 어둠을 불태웠다.
절정에 이른 멸염진천뢰의 운용이었다.
벽천양은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눈앞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는 남자의 존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라혈마, 네놈은 분명 검선의 손에 죽었거늘 어찌하여…….”
“검선(劍仙)? 아아, 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던 놈을 말하는 것인가.”
수라혈마는 제 주위로 닥쳐온 화염을 가볍게 막아내며 비웃음을 흘렸다.
“중원 무림도 참으로 인복이 없군. 그딴 버러지에게 검선(劍仙)이란 거창한 별호를 다 붙이고 말이야.”
“…….”
그 말에 벽천양은 검을 다잡았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왔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을 죽여 없애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파아앗!
검 위로 피어오른 겁화가 더욱 거센 기세로 타오른다. 벽천양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땅을 박찼고, 제 앞에 우뚝 선 수라혈마를 향해 그 궤적을 휘둘렀다.
매화검법에서 창안한 마를 멸하는 불꽃. 지축을 흔드는 뇌성이 흔들릴 때마다 뒤덮은 마기를 불태웠고, 점차 그의 목을 옥죄이며 발을 묶어갔다.
“이쪽은 네가 누군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겠다만.”
수라혈마의 두 눈이 핏빛 혈기로 뒤덮였다.
“그 정도로는 감히 이 목을 가져가기엔 부족할 따름이다.”
그 살벌한 기세에 벽천양은 과거의 일이 떠올라 주춤했으나, 이내 이를 악물며 검을 쥔 손에 더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삼십 년 전에 하지 못했던 복수를 스스로 할 기회가 닥쳐왔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자신이 쓰러진다면 뒤쪽에 있던 후기지수 무리도 해를 입을 터.
가능한 그들을 살피며 무사히 다른 이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하게 해야 했지만, 무려 삼십 년에 걸친 원한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크윽.”
설상가상으로 근래 잠잠하던 광증까지 도져왔다.
숨이 가빠지며 이가 갈리기 시작했고, 냉정히 상대를 살피던 그 이성은 순식간에 맹목적인 분노로 물들었다.
그 발치로 침이 뚝뚝 떨어진다. 수라혈마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을 때, 벽천양의 신형인 어느덧 그의 지척까지 쇄도해 있었다.
후욱-!
화마에 휩싸인 검이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성을 잃은 듯한 그 모습에 수라혈마는 피식 웃고는 제 검을 다잡았다.
“조금 놀아볼 생각이었거늘, 추하기 짝이 없구나.”
그그극─.
다시금 닥쳐 들어온 벽천양의 검을 사선으로 빗겨내었다.
검 위로 일렁이는 불꽃에 몸이 후끈거려왔지만, 닿지 않으면 그만인 공격이었다.
수라혈마의 핏빛 눈동자가 어둠에 긴 궤적을 남기며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벽천양은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도 검을 끌어당겨 용케 그것에 대응했다고 할 수 있었으나, 정상일 적에도 상대하기 벅찬 적일지인데 이런 상태로는 싸움이 성립될 수 없었다.
퍼억-!
가슴팍을 걷어차인 벽천양은 피를 토해내며 뒷걸음질쳤다.
뒤쪽에 있던 선우연을 비롯한 몇몇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으나, 그는 거칠게 손을 뻗으며 오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윽.’
우습게도 위중한 상처를 입자 흘린 피와 함께 광증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기울어진 지 오래. 더는 멸염진천뢰를 유지하기도 벅찬 가운데 그의 검을 뒤덮고 있던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뇌성을 품은 불꽃이라. 나름 재미있었다. 허나 이쪽도 할 일이 산더미 같아서 말이지.”
폐부를 훑던 투기는 어느덧 날카로운 살기로 뒤바뀌어간다. 수라혈마가 유희를 끝내고 이대로 그들을 몰살시킬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모두, 달아나라.”
벽천양이 할 수 있던 것은 그 말뿐이었다.
멸염진천뢰를 완성하고 광증 가운데서도 수십 년간 무공을 갈고 닦아왔음에도 아직 닿지 못했다.
그 사실에 피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그는 끝내 몸을 돌리지 않았다.
스승님과 사제들을 죽인 원수를 두고 도망친다는 것은 애초에 없던 선택지. 그러니 등 뒤에 있던 이들에게 자신이 아직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을 때 도망치라고 했다.
척.
하지만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지키듯 앞으로 걸어 나와 수라혈마에 대항하듯 검을 들었다.
“교관님께선 의와 협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맞는 말이지. 불리하다고 도망친다면 어찌 무인이라 할 수 있을까.”
선우연의 말에 악비산이 이를 드러내어 보이며 씩 웃었다.
남궁연과 당천유, 철대환도 마찬가지인 표정이었고, 천후는 당장이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제 기운을 날카롭게 벼리는 중이었다.
“…허허.”
벽천양은 웃음을 토해냈다.
그는 후기지수들이 망설임 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 줄 알았다.
눈앞에는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강자, 그리고 곁에는 화산에서 골칫거리인 괴협.
그들 대부분 화산과 관련이 없을뿐더러 자신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크게 손해는 아닌바.
하지만 후기지수들은 오히려 그를 지키듯 앞으로 나와 수라혈마에게 검을 들었다.
‘과거의 악몽을 재현할 수는 없지.’
짧게 한숨을 내쉰 벽천양은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곤 남은 내력을 전부 그러모았다.
적어도 동귀어진의 수법을 사용하면 이들이 도망칠 한순간의 틈은 벌 수 있으리라.
자신의 덧없는 인생에 그 정도 가치는 있으리라 믿었다.
이윽고 서로 간에 가득 찬 긴장감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파아앗-!
온 천지를 울리는 매화향이 그들 가운데를 뒤덮었다.
더없이 농밀했고, 더없이 향기로운. 벽천양은 그것이 매화검법의 경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것임을 깨닫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만리향!”
이십사수 매화검법 이십사 초식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가 만개하며 온 천지에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눈앞에 있던 이들에게 신경을 쏟던 수라혈마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그 뒤로 지척까지 이른 이가 있었다.
서걱-!
허공에 일선이 그어지며 한 자루의 검이 부드럽게 수라혈마의 목을 훑는다. 삽시간에 일어난 상황에 그가 두 눈을 크게 뜰 찰나, 뒤쪽에 있던 선청우가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그만 이승을 떠나라, 과거의 잔재여.”
“…네, 이놈!”
수라혈마가 사력을 끌어모아 손을 뻗었지만, 선청우의 검은 자비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뜩이며 흰 붕대에 감싸인 그 몸을 수십 갈래로 도륙하며 원형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모두 괜찮으냐!”
뒤이어 남사일을 비롯한 수 명의 매화 검수들이 그들에게로 닥쳐왔다.
“장로님.”
선우연이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수라혈마를 베어낸 선청우나 뒤이어온 남사일을 비롯한 매화 검수들이나 모두 격렬한 싸움을 거쳐 온 듯 상처투성이였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남사일은 선우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족히 몇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장문인께서 문도들을 모아 습격자들을 몰아내며 남은 이들을 구해내고 있다. 너희도 어서 대전으로 가자꾸나.”
“…장문인께서 나오셨다면 교관님께서는.”
선우연과 남사일의 대화에 남궁연이 슬쩍 끼어들었다.
장문인과 주호가 폐관에 든 지 어느덧 며칠 째다. 그가 나왔다면 함께 들어간 주호 역시 나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건…….”
콰아아앙-!
그때, 지축을 울리는 광음이 본산의 끄트머리에서 울려 퍼졌다.
수라혈마가 죽은 것을 확인한 선청우는 그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시독을 흩어버리며 턱 끝으로 광음의 진원지를 가리켰다.
“주호 그 친구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다시금 커다란 광음이 터져 나오는 그곳을 바라보았을 때, 선청우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 그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이는 이제 몇 남지 않게 되었으니.”
***
매화봉에서 일어난 격전은 화산의 본산으로까지 이어졌다.
쿵-.
진위령이 내지른 주먹에 대지가 신음을 토해내며 쩌적 갈라진다. 주호의 도발에 눈이 돌아간 그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지상은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거센 진동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이냐!”
흑수마제는 사나운 웃음을 터트리며 그 모습을 조롱했다.
주호는 다시금 훌쩍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와 거리를 벌린 뒤 가늘게 뜬 눈으로 호흡을 골랐다.
“날뛰는 꼴이 짐승이나 진배없군.”
“…거, 참. 주둥아리나 놀리는 법은 어느 고수 못지않구나. 제 관짝을 바야 정신을 차리겠어.”
두 눈을 사납게 뜨는 진위령의 모습에 주호는 씩 웃으며 슬쩍 몸을 숙였다.
그는 지금껏 최대한 상대와의 정면충돌을 피해왔다.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한선을 가늠할 수 없었기에 서서히 격차를 좁혔고, 몇 번의 격돌을 겪은 뒤에야 자신의 역량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녀석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상태창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평범한 상태는 아닌 듯싶다. 죽은 걸 되살려냈거나, 아니면 이미 죽은 것에 혼을 집어넣거나 그러한 부류일 터.
만일 그가 정말로 온전한 입신지경의 고수였더라면 이런 식으로 손대중하며 싸움을 이어나가지 못했으리라.
“흡-!”
짙은 흑색의 마기가 다시금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흑수마제는 그가 또다시 그것을 피해내리라 생각해 그 즉시 쇄도하기 위해 발을 내디뎠지만, 주호는 이때까지와 달리 제자리에서 두 발을 고정한 채 담담히 신검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쿠우웅─.
천지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주호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 나갔다. 하지만 종래엔 아무런 피해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별것 아니군.”
“네 이놈-!”
극성이 이른 마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흑수마제는 애초에 그리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 아니었다.
몸이 온전치 않아 칠할 가량을 상한선으로 잡았지만, 툭 끊긴 이성은 전성기 때의 전력을 그의 전신에 깃들게 했다.
파아앗-!
이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변화였다.
그의 두 손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시커멓게 물들어나가며 가히 마제(魔帝)라는 별호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역천환혼대법(逆天還魂大法)
구천을 떠도는 혼을 불러와 임의의 육체에 깃들게 하는 대법. 마교의 고대 주술로 대법 초기에는 오 할 정도 수준에 그치나, 절정에 달하면 전성기를 뛰어넘은 힘을 회복한다. 하지만 종래엔 사기(邪氣)로 가득해진 그 육신과 영은 갈가리 찢겨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소멸한다.
주호의 눈앞에 화산을 본뜬 모습의 지형이 떠올랐다.
그 안에 찍힌 점이 모두 일백서른다섯 개. 시시각각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보니 장문인을 비롯한 화산의 고수들이 본격적으로 나선 듯싶었다.
“받아보아라. 오직 날 쓰러뜨린 소림의 땡중을 말고는 감히 이 앞에서 십초를 버티지 못했으니.”
이윽고 전신이 흑색으로 화(化)한 흑수마제가 오만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