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주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고작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지만, 그는 손끝을 타고 흐르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탈각(脫殼), 입신지경(入神之境).
광오한 이름이라 생각했다. 어찌 인간의 무학이 오르는 경지 따위에 감히 신(神)이란 명칭이 붙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가운데 오롯이 선 주호는 그것이 결코 과장이나 부풀림 따위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지의 기운이 요동치며 자신의 의지와 함께한다. 손가락을 한 번, 아니 마음을 먹는 것으로 그것들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전 단철량이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벽에 다다른 자와 넘어선 자, 그 가운데는 그간에 있었던 것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큰 격차가 있다고.
주호는 그 말을 경청하면서도 지금의 자신이라면 입신지경의 초입과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군.”
선혁우의 앞으로 나선 주호는 다시금 숨을 깊게 내쉬며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네놈이 그 남자가 말한.”
그들 앞에 선 거한이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한다. 그러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는가 싶더니 이내 거무스름해진 두 손을 휘둘러왔다.
쉬익- 퍽!
가벼운 일 권이 허공을 격하며 그들이 서 있던 공간째로 잡아 삼켜왔다.
선혁우는 가늘어진 눈으로 검의 자루를 쥐었지만, 주호가 그 이전에 두 팔을 크게 휘두르며 제 앞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들의 머리를 박살 낼 듯 닥쳐오던 묵색 기운은 그 궤적에 휩쓸리며 꼬리를 물었고, 이내 어둠 사이로 와해되고 말았다.
“…태극? 무당의 출신이었나.”
거한은 너무나도 가벼이 제 공격을 막아낸 주호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쉽군. 숭산의 땡중이었다면 이 몸과 좋은 승부가 됐을 터인데.”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셔오기까지 했으니, 주호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음?’
그 찰나 간의 틈을 이용해 상대의 상태창을 파악하려 했던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째서인지 거한의 상태창이 호출되지 않았다. 간혹 천우희나 혼돈 같은 때처럼 정보가 표시되지 않은 적은 있었으나, 이처럼 애초부터 상태창이 나오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괜찮겠는가.”
뒤쪽에 있던 선혁우가 우두커니 서 있던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경지에 오른 이는 아직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요 며칠간 자신이 기운을 다스려주며 도와주었다곤 하지만, 그 본인이 적응하려면 시일이 더 필요할 터.
“괜찮습니다. 본래 무공은 실전으로 익숙해지는 법이지요.”
“조심하게. 범상치 않아 보이는 상대이니.”
선혁우는 찌푸린 시선으로 거한을 바라보았다.
온몸을 감싼 백의는 새하얀 붕대였다. 그러면서 두 주먹에 물든 묵색 기운은 선명한 특색을 보이는바.
머릿속에 무슨 이름이 어렴풋하게 떠올랐지만, 오래된 기억인지 선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후우.”
선우혁의 경고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주호는 오른손의 손가락을 꺾어 뼈 소리를 낸 주호는 거한의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누가 보내서 왔지?”
“누구라고 말하면 아는가? 그리고, 버릇이 없구나 아이야. 입신지경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전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 기고만장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히는 것이 강호의 이치거늘.”
“…그럴 테지. 입신지경이라도 다 같지는 않을 터. 하지만.”
시퍼런 광망이 그 눈동자에 깃든다. 주호는 짙은 미소와 함께 제 고개를 꺾으며 말을 이었다.
“네 녀석에겐 질 것 같지 않군.”
“놈-!”
묵색 마기가 다시금 어둠 사이로 휘몰아친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일렁이던 그것은 이내 거한의 손에서 폭발적으로 휘둘러졌고, 마치 채찍처럼 기다랗게 궤적을 남기며 주호에게로 닥쳐갔다.
쉬익-.
권기도, 권강도 아닌 것이 어지간한 창의 길이보다 길게 늘어나며 바위도 뚫을 듯한 날카로운 기세로 닥쳐오는바.
주호는 제 몸을 쓰러지듯 기울이는 것으로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무언가를 피해냈다.
‘정체가 무엇이든 맞지 않으면 그만이니.’
그대로 넘어지는 기세를 이용해 앞으로 뛰쳐나갔고, 이제 막 주먹을 회수하려던 거한의 명치에 제 일 권을 꽂아 넣었다.
콰아앙-!
보통의 고수였다면 이 일격으로 가슴의 뼈가 짓뭉개졌을 테고, 심하면 구멍이라도 뚫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거한은 히죽 웃는 표정으로 주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디 간지럽히기라도 했느냐. 기별도 오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제 손을 내리쳤으니, 피할 구석이 없던 주호 역시 힘껏 두 팔을 뻗으며 자신에게 떨어져 내리는 거한의 공격에 맞대응했다.
쩌엉-!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둘의 신형이 동시에 뒤로 물러난다. 동수를 이룬 것 같았지만, 거한은 주호보다 반 보 더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찌푸렸다.
“쯧. 아직 몸이…….”
“…….”
놀란 것은 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치를 가격했을 때나, 그의 공격과 맞부딪쳤을 때나 모두 엄청난 반동을 느꼈다.
‘반탄 강기 부류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 신체 쪽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그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새하얀 붕대가 그런 단단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인가.
주호가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다시금 몸을 날릴 찰나, 그 뒤쪽에 있던 선혁우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흑수마제! 흑수마제 진위령! 어떻게 네놈이!”
“흑수마제?”
생소한 별호에 주호가 의문을 표하자 거한, 흑수마제 진위령은 세상이 떠나가라 큰 웃음을 토해내었다.
“선가야, 선가야! 역시 화산의 장문인이로구나!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네 이놈! 소림의 고현 대사께서 네 숨을 거두신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선혁우의 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흑수마제(黑手魔帝) 진위령.
선혁우 보다 한 세대 더 전에 활동했던 마도의 고수로, 그 악랄함은 중원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본래는 그렇게 위명이 높지 않았지만, 화산의 전대 장문인이 무림맹 회합으로 인해 화산을 나와 강호행을 하던 도중 기습을 당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 이름 높은 화산의 장문인이 마도 고수에게 목숨을 빼앗긴 것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
전 중원의 요동쳤고, 수많은 고수가 그를 죽이기 위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진위령은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천라지망처럼 펼쳐진 인파를 헤치고 달아났고, 명망 높은 고수들만 골라 자신의 상대로 삼았다.
중원을 제 발아래 두리라.
그런 광오한 포부와 함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흑수마제의 기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시 천하제일고수라 일컬어지던 소림의 승려이자 백팔나한의 우두머리였던 고현 대사가 제 친우였던 장문인의 복수를 천명 삼아 친히 살계를 열었다.
무려 오백 초가 넘는 사투가 일어났고, 끝내는 흑수마제의 전신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으로 그 사단은 막을 내렸다.
“죽은 이가 어찌…….”
선혁우는 그 당시 흑수마제의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
비록 그 사지는 형체도 없이 찢겨나가 흩어져 버렸지만, 핏기가 가신 흉측한 얼굴은 두 눈 똑똑히 확인했다.
더군다나 수십 년도 더 전의 일이 아니던가.
진작 살점이 썩고 백골이 진토되어 대지의 거름으로 쓰였어도 부족할진데, 이리 성성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있다니.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느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며, 마땅한 호적수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거늘.”
쿵-.
진위령은 이를 드러내며 제 주먹을 부딪치고는 슬쩍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이야, 내가 아직 몸이 덜 풀려서 이제까지는 대충 손대중했다만…….”
그 시커먼 기운이 감도는 눈빛과 마주한 주호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다음부터 그리 설렁설렁 싸운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야.”
파아아앗-!
말 그대로 공간이 갈라졌다.
고작 한달음에 자신의 지척까지 다다른 그의 모습에 주호 역시 몸을 낮추며 신검을 뽑아들었다.
쿵-!
묵색 마기에 감싸인 두 주먹이 신검과 맞부딪친다. 동시에 둘이 서 있던 지반이 무너졌고, 만장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저는 괜찮으니 본산의 제자들을 돌보십시오.
-…괜찮겠는가.
-여유가 되신다면, 제 일행 쪽도 부탁드립니다.
그 전음을 끝으로 주호는 떨어져 내리는 돌무더기를 박차며 자신에게로 쇄도하고 있던 진위령에게 몸을 날렸다.
‘향이 쪽이 걱정되지만.’
화산이 괜히 화산이겠나.
중원을 대표하는 구파일방의 일좌를 차지하며 수없이 긴 세월 간 명문으로 이름을 알려온 곳이다.
설사 마교나 혈천신교가 습격해온다고 할지라도 맥없이 당하지 않을 터.
자신이 할 일은 당장 눈앞에 닥쳐온 저 커다란 녀석을 베어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쉬이익-!
청룡검식의 묘리가 검 끝에서 터져 나온다. 시퍼런 청룡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날뛰었고, 이내 그 아가리를 벌리며 진위령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좋다, 누가 더 강한지 한 번 겨뤄보자꾸나!”
그는 기껍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그 안에 제 몸을 밀어 넣었다.
시퍼런 강기가 제 몸을 긁으며 찢어발기려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도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으하하하하-!”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와중이었지만, 힘을 겨룸에 망설임이 없었다.
묵색 권강이 이윽고 청룡의 머리를 부수며 주호에게 떨어져 내린다. 그는 검을 세워 그것을 막아내면서 몸을 빙그르르 돌려 다음 초식을 전개했다.
“만검(萬劍)-.”
경계를 긋는 검이 공간을 베어내며 질주했다. 그 시퍼런 궤적에 진위령은 씩 웃으며 두 팔을 교차했고, 무식하리만큼 정면에서 주호의 공격을 막아냈다.
파각-!
진위령의 교차한 팔 위로 기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피부가 마치 깨어진 유리 조각마냥 갈라지며 떨어져 내렸고, 이내 가루가 되어 허공에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툭.
근처에 있던 낮은 봉우리에 내려앉은 그들은 이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신검(神劍)이로구나. 감히 내게 잔흔을 남길 줄은.”
진위령은 흥미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팔과 주호가 든 검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척-.
주호는 신검을 앞으로 기울이며 전신에 샘솟는 기운을 제어했다.
큰 초식을 몇 번이고 펼쳤음에도 단전 안에서 휘몰아치는 내공은 줄어듦이 없었다.
그릇에 제한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였으나, 그리 좋아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무공이 경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청룡신공은 신공 반열에 든 만큼 충분히 뛰어난 무공이었다.
이대로 꾸준히 연마해 대성에 이른다면 더 엄청난 무위를 보일 수 있을 터.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눈에는 차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혼원일극신공(混原一極神功)
무황의 발했던 압도적인 무위를 만들어낸 무공의 이름이 그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입신지경에 도달했으니 그것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파아아아앙-!
그때, 진위령이 거칠게 허공을 때렸다.
주호는 고개를 비틀며 그것을 피해냈고, 그를 대신해 뒤에 있던 작은 봉우리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 세상이 좋아졌다. 이 흑수마제를 눈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니.”
“…그러니 잘 좀 해보도록.”
“뭐?”
“긴장조차 되지 않으니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허어, 이놈 봐라.”
진위령이 제 주먹을 짓이기며 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