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이 빌어먹을 잡놈들이-!”
당천유는 담을 넘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눈이 돌아갔다.
품 안으로 깊숙이 손을 넣은 그는 이내 맹렬한 기세로 암기를 흩뿌리며 제 동생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들을 공격했다.
어지간한 고수라 할지라도 막아낼 엄두조차 못할 공격이었지만, 그들은 어째서인지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푹, 푸욱-.
옷을 찢고 살점 안으로 암기들이 박혀 드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반응조차 하지 못한 것이리라.
당천유는 의기양양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안쪽에 있던 남궁연이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당 공자, 이 자들의 몸은 무쇠처럼 단단해요!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무슨.”
실제로 암기에 묻은 독 때문에 바닥에 쓰러져 경련해야 할 흑의인들의 모습은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당천유가 가늘어진 눈으로 다시 제 품안에 손을 넣자, 이번엔 그 뒤를 따라 연무장 안쪽으로 내려선 악비산이 창을 내질렀다.
“흡-!”
그는 남궁연의 말과 당천유의 암기가 통하지 않는 모습을 보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채 창을 내질렀다.
연녹색 빛이 기다란 궤적이 되어 허공을 꿰뚫었고, 이내 가장 가까이 있던 흑의인의 가슴을 향했다.
퍽-!
처음으로 흑의인이 뒷걸음질치며 그 충격을 흘려내지 못했다.
연무장 안쪽에 있던 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악비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 창이 꿰뚫은 지점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쇳덩이를 부순 것 같군.’
흑의인의 가슴 위에 있는 살점이 마치 쇳조각이 부서진 것처럼 자글자글한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볼 수 없는 현상. 그렇다는 것은 습격자들의 뒷배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뜻했다.
“모두 물러나거라.”
고요한 장내 사이로 벽천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주호와의 대결 이후 며칠의 휴식 끝에 기력을 전부 회복했다.
앓고 있던 심마를 떨쳐내고 무공을 완성한 덕인지 광증도 제법 가신 듯한 상쾌한 기분까지 느껴질 정도가 아닌가.
그렇기에 당분간 정양하며 상태를 보려고 했을 때, 본산을 침입한 사이한 기운에 이리 나선 것이었다.
“남궁 소저, 괜찮으시오?”
“…저는 괜찮아요. 다른 이들을 살펴주세요.”
자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오는 당천유의 표정에 남궁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벽천양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필시 큰 화를 입었겠지만, 그가 적절한 때에 난입해준 덕에 상처하나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대체 이놈들 정체가 무엇인지…….”
“마교일 확률이 높아요. 지금 정세가 이런 가운데 대놓고 화산을 습격할 만한 곳은 몇 없으니까요.”
“강시라도 되는 겁니까. 보아하니 그 몸이 무쇠 같던데.”
“…역시, 강시인가요?”
남궁연 역시 마교에서 비밀리 시체를 이용해 병기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쯤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어릴 적의 풍문으로 퍼지던 것으로 이야기를 접한 대다수는 마교 정도 되는 곳이니 그런 것 하나 정도는 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 낭설의 정체를 눈앞에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강시라기엔 움직임이 너무 부드럽군.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시체가 이렇게 산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마교잖아요. 그 부분은 어떻게 했겠죠.”
남궁연이 깊게 생각할 것이 있냐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악비산은 그도 그렇다는 듯 코를 문질렀다.
“…….”
벽천양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말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강시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멸염진천뢰를 완성한 자신 앞에서 이름에 마(魔)란 글씨가 들어간 존재는 이 타오르는 겁화에 휩싸여 타들어 갈 뿐이니.
“오너라, 마교의 주구여.”
벽천양이 검 끝을 까딱이자 적의인이 반응하며 천천히 제 기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십수 명의 흑의인은 모두 검기급 고수. 뒤쪽에 있던 후기지수들 역시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 경지이니 단숨에 밀리진 않겠지.’
화산 곳곳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습격자는 이들 뿐만이 아닌 듯싶었다.
그렇다면 서둘러 이곳의 적들을 쓰러뜨리고 곤경에 빠진 다른 곳들을 구해야 하는바.
타핫-!
벽천양과 적의인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벽천양의 검이 휘둘러지는 궤적을 따라 우렁찬 뇌성이 울려 퍼졌다는 것이었다.
곧 둘의 신형이 그 중앙에서 충돌했고,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적의인이 몸이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벽천양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그 틈을 타 주위에 있던 흑의인들을 휩쓸었고, 무쇠 같던 그 몸도 모두 일도양단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우.”
벽천양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평범한 고수였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겠지만, 온몸이 무쇠같이 단단해 베는 대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장내를 습격한 이들을 전부 정리한 상황.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제 뒤에 있던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괜찮은가!”
그제야 담을 넘으며 선우연을 비롯한 나머지 셋이 연무장에 도착했다.
“늦어도 한참 늦었네.”
“이미 괴협께서 전부 쓰러뜨리셨지.”
악비산이 그들을 타박하자, 당천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벽천양의 눈치를 보며 말을 보탰다.
“도움에 감사드려요.”
“…되었다.”
남궁연이 일행의 대표로 나서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벽천양은 여전히 시큰둥한 태도로 그렇게 담하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선우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네 일행을 챙기거라. 이대로 즉시 연무장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합류한 뒤…….”
푸쉭-!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진 흑의인들 사이로 매케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먼저 반응한 것은 벽천양이 아닌 당천유였다.
‘…혀끝이 쓰다는 것은, 독?!’
바닥에 누워있는 흑의인들이 정말로 마교에서 개발한 강시라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독은 시독(屍毒)의 부류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시독은 다른 독들과 달리 뚜렷한 해독약이 없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치료해나갈 수밖에 없는 악독한 독. 그렇기에 그는 황급히 소매를 휘두르며 일행에게 외쳤다.
“독일세! 다들 호흡을 멈추고 진기로 다스리게!”
당가의 중화제를 뿌렸다곤 하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다행인 것은 그들 정도의 고수라면 진기의 조절을 통해 어느 정도 호흡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향아, 아 해봐.”
“…아?”
다만, 상대적으로 경지가 미흡한 주예향만은 걱정되었던바. 옆에 있던 당소혜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피독주를 그 입에 물려주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우연의 시선에 벽천양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을 따로 이동시키려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 그러다간 또 다른 위험에 휘말리고 말 터.
그러니 벽천양은 대전까지 자신이 직접 인도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녹색 운무로 물든 대전을 빠져나온 그들이 본격적으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할 찰나.
쉬이이익-!
골목 너머로 새로운 흑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발걸음을 멈추지 말거라!”
벽천양은 엄한 얼굴로 그리 말하며 먼저 몸을 날렸다. 그러곤 한 호흡에 흑의인들을 도륙하곤 그 시체를 들어 저 멀리 던져버렸다.
호쾌하기 짝이 없는 그 행동에 다들 뒤에서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다.
비록 괴협이라 불릴지라도 그는 화산의 내로라하는 고수. 마교가 개발한 강시 따위라 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막아 세우기엔 한참이나 부족할 따름이었다.
캉-!
하지만 그 막힘 없이 휘둘러지던 검도 끝내는 가로막히고 말았다.
벽천양은 당연히 이런 상황도 예상했기에 몸을 빙그르르 돌려 검을 꺾은 뒤 그 기세를 이용해 목을 베어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의 발이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으음.”
찰나에 검을 들어 자루의 끝으로 그것을 막아낸 벽천양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의표를 찔린 기습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발끝에 실린 거력은 가히 가벼운 발길질만으로도 바위를 부술 법한 위력을 지닌바.
벽천양이 처음으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막힘없이 달려오던 이들의 발걸음 역시 멈추어 서게 되었다.
“음?”
그의 가슴팍을 걷어찬 사내는 제 공격이 막히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주도 좋구나. 가슴을 뭉갤 생각으로 내디딘 발이거늘.”
“…….”
그 서늘한 목소리에 벽천양의 몸이 굳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난 수십 년간 끊이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던 그 목소리가 아니던가.
벽천양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이내 온몸에 흰 붕대를 감고 있던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의 형태는 기억 속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하지만 그 산발인 머리카락과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 어떻게 네가.”
“하하, 드디어 본좌를 알아보는 이가 나왔구나. 기쁘기 짝이 없군.”
핏빛 살기가 그 눈동자에 번들거린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벽천양은 이럴 수는 없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수라혈마.
수십 년도 더 전에 그의 스승과 사제들을 도륙 내고 강호를 피바람으로 물들였던 희대의 마두가 버젓이 살아 다시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
화산파 심처 매화동.
본래라면 장문인 혹은 그 계승자의 폐관 수련 장소로 엄중히 보호받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화마에 휩싸인 화산과 함께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그곳에 방문했다.
쉬이익-!
갑작스러운 침입자에도 불구하고 매화동을 지키고 있던 화산의 고수들은 날카로운 기세로 발검하며 추살에 나섰다.
하지만 뜨거운 혈풍(血風)이 그 주위를 휩쓺과 동시에 그 누구도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한 줌의 핏물로 화(化)해 휩쓸려 나갔을 뿐이었다.
“쯧. 잡스럽군.”
손에 묻은 살점을 털어낸 거한은 제 목을 휘감고 있던 흰 붕대를 거칠게 뜯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선가야! 네놈의 제자들을 전부 때려죽이기 전에 어서 나오너라!”
그러면서 매화동 안쪽을 향해 숨을 토해내며 세상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산천이 들썩이고 초목이 요동친다. 밤의 어둠에 잠들어 있던 산짐승들이 잠에서 깨어나 부산스럽게 도망 다녔고, 거한은 여전히 가라앉은 눈으로 매화동 안쪽을 바라보았다.
“나오지 않겠다면-.”
우웅-.
그의 움켜쥔 커다란 손 위로 가늠할 수 없는 규모의 묵색 기운이 휘몰아쳤다.
마치 이 봉우리 자체를 무너뜨릴 기세였다. 그것이 휘둘러지기 직전, 굳게 닫힌 매화동의 입구가 열리더니 한 노인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
선혁우는 크게 뜬 눈으로 화마에 휩싸인 화산의 본산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곳 하나 멀쩡한 구역이 없다.
저마다 거센 불길이 번져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이 본산의 제자들과 생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네 이놈들!”
선혁우가 제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출수할 찰나, 뒤이어 매화동에서 나온 이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제가 하지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세를 품은 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