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쉬익-.
허공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궤적에 팽우혁은 다급히 허리를 뒤로 젖혔다.
손안에 감도는 감촉에 당황하고 있던 찰나라 살짝 반응이 늦었고, 그 때문에 머리카락 끝부분이 잘려나가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
하지만 그의 표정은 굴욕으로 물들거나 분노에 잠기지 않았다.
오히려 침중한 낯빛으로 땅을 박차 일행이 있는 뒤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을 뿐이었다.
“우혁, 괜찮나.”
“괜찮네. 그보다…….”
남궁휘의 물음에 팽우혁은 고개를 젓곤 주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 밖으로 곳곳에서 피어오른 불길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정도 소란이라면 한참도 전에 화산의 무인들이 다급한 얼굴로 이곳을 찾아왔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어쩌시겠습니까.”
팽우혁은 제 뒤쪽에 있던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일행 중 가장 경험이 많고 실력이 뛰어난 것은 그녀다. 그러니 가장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터.
“…….”
남궁연의 눈이 가늘어지며 팽우혁과 마찬가지로 그 주위를 훑었다.
한 명 한 명의 기도가 예사롭지 않다. 어렴풋한 마기(魔氣)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흉수는 마교인 것이 자명한바.
그리 버거운 전력은 아니었지만, 그 곁에 후배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천후나 악비산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쓰러뜨렸겠지만, 이들의 실력으로는 두셋 이상의 숫자에 둘러싸이면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다.
“제가 길을 열 테니 다들 움직일 준비 하세요.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그 단호한 목소리에 장내에 있던 이들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천천히 움직이던 괴한들이 그들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 남궁연의 검 위로 청명한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쐐애애액-!
일 검에 수십 줄기의 검기가 쏘아지며 사방에 난무한다. 천천히 다가오던 괴한들은 그 살벌한 기세에 훌쩍 뒤로 물러났다.
“지금!”
남궁연의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제일 선두에 선 이는 팽우혁이었다.
그는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위협에 대비해 감각을 곤두세웠고, 날카로운 눈으로 불빛이 일렁이는 어둠 가운데를 주시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고 할 수 있었다.
쉬이익-!
이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파공성이 그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팽우혁은 이를 악물었다.
다소 피해는 있겠으나, 피하고자 하면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자신 뒤에는 곧바로 따라오던 주예향이 있는 상황. 이쪽에서 그것을 피해버리면 그다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쿵-!
팽우혁은 전신에 부닥치는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앞으로 나아가던 기세보다 더 격렬한 속도로 튕겨 나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굴렀고 이내 흙투성이가 되어 멈춰 섰다.
“팽공자!”
주예향이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어렴풋하게 울려 퍼진 그 소리를 들은 팽우혁은 애써 제 몸을 일으키며 괜찮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 입으로 시뻘건 피가 토해져 나왔다.
“…우혁!”
내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한 남궁휘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몸을 살폈다.
팽우혁이 자랑하던 도는 원형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이 그의 몸이었으니, 그 찰나에 도를 들어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부서지는 것은 도가 아니라 그의 몸이었으리라.
“…이런.”
아직 연무장의 담을 넘기도 전이다. 겨우 팽우혁의 몸을 둘러업었지만, 괴한들은 이미 그들의 지척까지 이르러 있었다,
“흡-!”
주예향이 검을 들며 앞으로 나설 찰나,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당소혜가 맹렬한 기세로 손을 떨쳤다.
솨사사사-!
어둠 사이를 꿰뚫으며 수십, 수백에 달하는 암기가 떨어져 내렸다.
당가의 절기인 만천화우라고 하기엔 기세가 조금 부족했지만, 한순간의 틈을 벌기엔 충분한 공격이었다.
“잘했어요.”
그전까지 뒤쪽에 있던 흑의인들을 상대하고 있던 남궁연이 순식간에 다가와 당소혜를 칭찬한다. 그러곤 팽우혁을 업은 남궁휘를 바라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상처가 중해 보이네요.”
“당분간은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뒤에 있던 탓에 팽공자가.”
주예향이 입술을 깨물며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자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더 집중해야 해.”
남궁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들이 나아가려 했던 연무장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당소혜가 애써 만들어준 틈을 이용해 도주에 성공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탁.
벽 위에 건들거리며 앉아 있던 괴한이 연무장 안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때까지 보인 흑의인과는 사뭇 다른 기세로 남궁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더욱이 무언가 특별한 표시인 듯 다른 괴한과 달리 녀석의 몸에는 붉은 붕대가 가득 감겨 있었다.
“후우…….”
남궁연은 옅은 숨을 내쉬며 검을 다잡았다.
이때까지도 지원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습격자들의 숫자나 실력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것이 되었다.
주호는 현재 장문인과 함께 폐관 중에 있으니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
천후를 비롯한 다른 후기지수들이 빨리 이곳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 어디에서 왔죠?”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보리라.
그렇기에 남궁연은 평소에 하지도 않던 물음을 입에 담았다.
어지간한 고수라 할지라도 자신의 외모에 혹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렇기에 그 점을 노린 것이었지만, 적의인은 대답하는 일 없이 그저 고요히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심, 하십시오. 예사 놈이 아닙니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팽우혁이 입가에 고인 피를 토해내며 두 눈을 사납게 떴다.
그건 남궁연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아무리 그들이라 할지라도 일 검에 팽우혁을 저리 곤죽을 내놓기는 힘들었다.
더욱이 그 전신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마기는 팽우혁의 말처럼 예사 것이 아니었다.
스윽-.
미동조차 하지 않는 적의인에 모습에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남궁연이었다.
발끝을 내밀며 천천히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고, 이내 벼락처럼 검을 휘둘러 적의인의 목을 베어갔다.
쉬익- 캉-!
날카로운 파공성 직후 귀청을 찢을 듯한 고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
남궁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적지 않은 공력을 실은 일격이었다.
그 몸에 호신기를 두르더라도 타격이 아예 없지는 않을 터. 하지만 주춤거리며 물러난 것은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반탄강기? 아니, 금강불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같이 일반적인 경지로 하기는 힘든 것들이 아닌가.
필시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을 찰나, 적의인의 동공에 새빨간 빛이 깃들었다.
쉬익-!
그녀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목을 꺾은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주호와 대련 가운데 종종 이런 식으로 기습해오는 경우가 있었기에 몸이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때의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방금의 일격으로 목이 베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언니!”
정말로 간발의 차였기에 뒤쪽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예향에게는 그녀의 목이 베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큰소리로 외친 것이었으나, 남궁연은 자신이 건재하단 뜻으로 검을 까딱이며 뒤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절대, 가까이 오지 마.”
목을 훑고 지나간 살기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곤 수천, 수만 번을 휘둘렀던 무공으로 정신을 모았다.
하늘은 아직 어두컴컴하기만 한데 그 궤적이 이어질 때마다 청명한 빛이 터져 나오며 대낮이라도 된 것처럼 장내를 가득 뒤덮기 시작했다.
검 끝을 따라 펼쳐지기 시작한 창궁무애검법의 정수가 휘몰아치며 적의인을 노렸다.
보통이라면 어지간한 고수라 할지라도 그 위용에 위축됐겠지만, 적의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말의 동요 없이 제 검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시뻘건 마기가 어둠을 태우며 피어올랐고, 남궁연의 검과 어우러져 검무를 추는 듯 이리저리 흩날렸다.
“…읏.”
처음에는 제법 백중지세의 싸움을 벌이는 듯했다.
그렇기에 뒤쪽에 선 이들은 크게 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오직 당소혜만은 그녀의 입에서 토해진 작은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연 언니도 안 된다면.’
일행 중 제일 강자인 남궁연의 공격조차 통용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저 적의인을 쓰러뜨릴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조심스레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까 전의 공격으로 지닌 암기를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아직 오할 정도가 남아있었다.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당의 암기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있을 터.
자신은 찰나의 틈이 드러나는 때에 의표를 찔러야 했다.
“…….”
남궁연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적의인 제 몸의 단단함만을 믿고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그녀 역시 부담스러운바. 그렇기에 그 빈틈을 물고 늘어져 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공격할수록 충격이 쌓이는 것은 이쪽일 따름이었다.
다행인 점은 느껴지는 기세에 비해 그 공격의 흐름이 뚝뚝 끊긴다는 것이었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관절을 억지로 휘두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워 자신보다 훨씬 위의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잖게 그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점을 꿰뚫는다.
아무리 단단한 쇠라 할지라도 극한으로 집약된 힘을 막기에는 힘들 터.
다시 한 번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공격을 피해낸 그녀는 검 끝으로 모든 공력을 담아 세차게 찔렀…….
“…검강?”
이제까지와는 다른 기운이 눈앞에서 휘몰아쳤다.
자신은 아직 바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러한 경지. 생각과는 다른 상황에 남궁연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아가씨!”
뒤이어 들려온 남궁휘의 외침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팽우혁처럼 검을 앞으로 내밀어서?
아니면 팔 한 짝을 주고서라도?
뇌려타곤을 펼친다면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내 뒤에 있는 아이들은?
그 찰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을 때, 남궁연의 귓가로 한 줄기 뇌성이 들려왔다.
멸염진천뢰(滅炎震天雷).
주호가 이름 붙인 그 무공이 하늘을 가로질러 자신과 적의인 앞에 떨어져 내린다. 뇌성이 서린 시뻘건 불꽃은 적의인의 마기를 게걸스럽게 잡아먹고는 더더욱 제 몸을 부풀리며 그 분노를 토해냈다.
“남궁 소저!”
“남궁 소저 괜찮습니까!”
“혜아야! 향아!”
그와 동시에 연무장의 벽 너머로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남궁연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교관님인 줄 알았는데.”
그 목소리에는 살짝 아쉬운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