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대천산 영운봉.
신강의 패자인 천마신교의 본산과 그리 멀지 않은 봉우리 끄트머리에 한 인영이 서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조차 발아래 둘 정도로 높은 고도였다. 범인이라면 밑으로 펼쳐진 풍경에 아찔한 심경이 들었겠지만, 그는 두 눈을 감고도 일말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 위에 서 있었다.
사락-.
등 뒤에서 들려온 희미한 발자국 소리에 혼돈의 두 눈이 뜨였다.
밤이 깊은 가운데 까마득한 무저갱을 내려다보는 눈동자 안으로 짙은 마기가 휘몰아친다. 그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뇌(魔腦)께서 어인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굳이 자신의 사색을 방해할 정도의 일이냐 가볍게 꾸짖는 것이었다.
불청객은 그 서늘한 음색에 살짝 손끝을 떨었다.
십만 마인을 다스리는 천마신교의 총군사이며, 당대 천마의 총애를 받아 마뇌(魔腦)라 불리는 백무혁에게도 이 남자는 어려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메마른 입술을 핥는 것으로 숨을 돌리곤, 혼돈이 그러한 것처럼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소교주가 돌아왔네.”
“청룡 밑에 있던 그 아이 말입니까.”
“그렇네. 지금은 교주와 인사를 나누고 제 거처로 돌아갔네.”
“문제는 없겠지요.”
“썩어도 신교의 소교주다. 고작 일 년 남짓한 중원에서의 삶에 감화되었겠는가.”
“어릴 적부터 예뻐하셨지요.”
“장차 대를 이어 꼭두각시가 될 예정이 아닌가. 품 안의 것인데 아껴야겠지.”
“천마는 어떻습니까.”
“천망은 감히 인간의 몸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리 이름 붙여졌다지. 겉으로는 건재해 보이나 그것뿐이네. 물밑에서 십이천가(十二天家) 중 칠가의 포섭도 끝났고, 신교의 조직 대부분도 이쪽을 따르기로 맹세했네.”
혼돈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백무혁을 바라보았다.
“당부드렸다시피 그들은 보험입니다. 반란은 최후의 수단인 것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염려 말게. 위력적인 패는 손안에서 존재할 때 더 강력한 법을 모를 정도로 미련하지 않으니.”
백무혁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혼돈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대체 저 밑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짙게 깔린 구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어슴푸레한 어둠밖에 없었다.
‘알다가도 모를 사내야.’
백무혁은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좁혔다.
얼핏 보면 젊은 청년과 같은 외모였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과 같았다.
우스운 것은 자신보다 압도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상 존대했다는 것이었다.
또 그러면서 자신에게 말을 편히 하라고 했으니 무언가 모순되는 모습이었지만, 백무혁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주위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준비된 대계(大計)가 아니던가.
어쩌면 그 기원은 백 년, 아니 이백 년이 더 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얼 그리 보는 건가?”
백무혁은 조심스레 물었다.
밑을 바라보던 혼돈의 시선은 어느덧 별빛이 반짝거리는 하늘로 향해 있었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마치 누군가 반짝거리는 가루를 털어놓듯 수 없이 제 존재를 나타내는 별빛이었다.
“…….”
물론 혼돈은 미동조차 없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듯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저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백무혁은 괜한 오기가 생겼다. 그렇기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덤덤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 말년에 이르러 어렴풋이 천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지. 그렇다고 해서 당장 눈앞의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리 머지않을 때…….”
물 흐르는 듯한 설명을 이어나가던 백무혁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별자리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순환하기 마련이었다. 천기를 읽는다는 것은 그 중간에 끼어든 변수를 찾아내어 해석하는 것으로 굉장히 많은 계산과 심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간혹 문외한이 바라보아도 그 이질적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때도 있었으니.
“…개벽(開闢)? 어디 소림이나 무당에서 누군가 등선이라도 한 것인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혼돈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재야에 숨은 고수는 많다. 하지만 천기가 이리 요동칠 정도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바.
얼마 전 산서에서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그의 뇌리로 진하게 떠올랐다.
“대법은 잘 끝났습니까?”
“…으응? 아, 얼마 전에 끝났네. 이곳으로 온 목적 중 그 이야기도 있었거늘, 경황 중이라 깜빡했군.”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숫자는 얼마나 되지요.”
“애초에 구상했던 한 개 부대는 나올 듯싶네. 백(白)이 셋, 적(赤)이 스물, 흑(黑)이 일백 정도지.”
“도합 일백스물하나라.”
“…시험 제작한 것이라 지금 당장은 수가 적네만, 충분한 물자를 확보했으니 곧 양산할 수 있을 것이네.”
턱을 쓰다듬으며 그 숫자를 중얼거리는 혼돈의 모습에 백무혁은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시일은 충분했지만, 워낙 복잡한 대법이라 오래 걸린 것이었다.
예전에도 큰소리를 떵떵 쳐놓은 것이 있기에 살짝 걱정되었으나, 혼돈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첫 실전은 화산으로 합시다.”
“…화산? 곤륜이 아니고?”
당초에 계획했던 것과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않냐는 백무혁의 의문에 혼돈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화산으로 하지요.”
“…하여튼, 알겠네. 지체할 이유는 없으니 곧바로 움직이겠네.”
할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라는 듯 백무혁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갔다.
홀로 남은 혼돈은 이전과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경지에 오른 첫 선물로는 더 없이 적당하겠군. 부디 기뻐해 주면 좋을 텐데.”
그 눈동자에 가득 찬 마기가 기이하게 일렁거렸다.
***
“오늘로 엿새째인가.”
악비산은 턱을 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산의 백매화와 교류회가 있던 것이 벌써 이레 전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그 사이로 난입한 벽천양에 의해 난잡하게 되긴 했어도 정천 학관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마지막에 있었던 주호와 벽천양의 비무 역시 이쪽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던바.
하지만 그다음부터 벌어진 현상은 그 누구도 속 시원히 설명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주호는 화산의 장문인인 선혁우를 따라 자취를 감췄다.
나중에 남사일이 그들에게 말해주길, 주호가 중요한 기로에 들었기에 잠시 얼마간 화산의 은밀한 곳에 기거하며 제 기운을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원래 화산에서 일정이 아흐레였지.”
“이틀 남았군. 교관님 없이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며칠 더 이곳에 머물게 되겠구먼.”
저녁이 지나 밤에 가까운 시각.
그들은 선우연의 방에 모여 떠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화산도 오래 보니 지루해지는군. 진득하니 수련이라도 하고 싶거늘, 그러지도 못하니.”
“동감일세. 어서 돌아가고 싶군.”
당천유와 철대환은 화산에서의 생활이 사뭇 불편했다.
대접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거처는 정갈했고, 식사는 훌륭했다.
자신들과 비무했던 백매화들 역시 이쪽의 무공에 감명받아 친근한 모습을 보여오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너무 끈덕지게 찾아온 탓에 오히려 귀찮아져 버린 그들이었다.
“남궁 소저는 어디 있는가?”
“향이랑 소혜를 데리고 수련하러 갔네. 밤이 깊어지기 전에 끝낸다고 했으니 곧 돌아오겠지.”
“변함없이 열심히군.”
“조금 전까지 땀 뻘뻘 흘리며 수련하던 자네가 할 소린가.”
“흠.”
선우연의 핀잔에 악비산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기지수 중 최고 인기를 자랑하던 것은 단연 남궁연이었다.
고강한 무공과 더불어 남궁이라는 뒷배, 그리고 그 아름다운 외모까지.
화산의 젊은 후기지수들의 마음이 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지간한 이는 선우연의 날카로운 기세에 떨어져 나갔고, 그것을 넘어온 이들 또한 일말의 가능성도 찾지 못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릴 정도로 격퇴당했다.
“…그 친구는 무얼 하고 있으려나.”
당천유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름 이때까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늘, 이리 훌쩍 떠나버린 그가 야속할 뿐이었다.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돌아오겠다며 말을 남겼다고 교관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래도 말이네.”
옆에 있던 선우연이 다독거렸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음?”
잠자코 있던 천후가 의문성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은 그때까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던바. 천후는 천천히 창가 쪽으로 나아가 내려앉은 어둠 너머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왜 그러는가?”
느닷없는 천후의 모습에 선우연과 당천유가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에 웃고 있던 철대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후는 잠시간 침묵하더니 이내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제 친우들을 돌아보았다.
“불이 난 듯하군.”
“…화산에 불이?”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선우연이었다.
고산 지대라 더위가 덜하다곤 하지만, 운무가 자주 끼는 곳이기에 습기가 가득하다.
어지간해선 자연적으로 불씨가 일어날 수는 없는바. 그렇기에 천후와 같이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저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보이는 주홍빛을 볼 수 있었다.
“뭐, 곧 꺼지지 않겠는가.”
“큰일이었다면 사람이 찾아왔겠지.”
악비산과 당천유는 별일이 아닐 거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으나, 잠시 그 위치를 어림짐작하고 있던 선우연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기는 연무장 쪽인데. 분명 남궁 소저랑…….”
남궁연과 주예향, 그리고 당소혜까지 그곳에서 수련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악비산과 당천유의 신형이 방안에서 사라졌다.
“…우리도 가세.”
천후가 말의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팽우혁은 그저 주예향을 따라 세 여인이 수련하는 연무장에 찾아갔을 뿐이었다.
혼자 오기에 멋쩍어 남궁휘를 끌어들였고, 남궁연의 배려로 인해 주예향, 그리고 당소혜와 같이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슬슬 밤이 깊어져 감에 따라 각자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돌아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번 화산행으로 그녀와도 제법 거리를 좁힌바. 먼저 대화를 거는 것에도 스스럼이 없어졌고, 간간이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올 정도로 친밀해졌다.
부담스럽지 않게 천천히.
오늘 역시 그렇게 끝날 줄로만 알았던 하루는, 연무장의 벽을 넘어 갑작스럽게 난입한 괴한들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렸다.
“웬 놈들이냐!”
팽우혁은 잔뜩 인상을 쓴 채 앞으로 나서며 바로 옆에 있던 주예향을 보호했다.
흑의를 입은 괴한이 열셋.
아니, 더 가까이 다가왔을 찰나 그들이 몸에 두르고 있던 것이 흑의가 아니라 검은 붕대임을 깨달았다.
‘그렇다 한들!’
어찌 화산이 이런 이들의 침입을 허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위기는 곧 기회, 압도적으로 적을 쓰러뜨린다면 주예향에게 잘 보일 기회가 아닌가.
그렇기에 팽우혁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고, 힘껏 도를 휘둘러 괴한의 허리를 베었다.
까아앙-!
“……!”
하지만 호기롭게 나섰던 것과 달리 그의 도는 괴한의 몸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손목을 타고 흐르는 반동에 도를 놓칠 뻔까지 하지 않았나.
“…이, 무슨.”
사람의 몸이 어찌나 이리 단단한 것인지, 마치 통으로 된 쇠를 내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