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탁.
적막한 내부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옅은 김이 일렁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남사일은 침중한 낯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장문인께서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아직 모르겠습니다.”
“네 스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러한 표정이더구나. 더러는 내게 다그치며 설명을 구하기까지 했지.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야.”
화산의 장문인 매화검존 선혁우는 제 말과는 달리 사뭇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때까지 내가 보낸 서신에도 많은 내용을 적어놓았고, 네 스승에도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의 시선이 남사일의 옆으로 있는 선청우를 향한다. 무언가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한 눈짓이었지만, 그는 질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남사일은 제 스승을 향한 그 시선에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 표면적인 이유가 아닙니까.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자리는 그런 것으로…….”
“화산의 장문인이.”
선혁우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남사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것은…….”
정도 무림의 대표, 구파일방.
그 일각을 차지하는 문파로 남사일은 단연 화산파가 그 어느 곳보다 으뜸이라 생각했다.
장문인이라 함은 그 가장 정점에서 문파를 이끌어가는 막중한 직위. 자신이 세간에 명성이 있고 경험을 쌓았으며 경지에 올랐다곤 하나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 할지라도 당장 이 직분을 맡으라는 것은 아니다. 네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오 년, 아니 십 년은 더 매진해야 겨우 구색이 나오겠지.”
“허면.”
허면 어째서 이리 성급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가.
그 물음에 선혁우는 처음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큰 규모의.”
수많은 이가 죽을 것이다.
중원 곳곳에 전화에 휩쓸리고, 적지 않은 문파가 문을 닫을 것이다. 어쩌면 구파일방 같은 명문도 그러한 운명이 될 수 있을 터.
“구파일방을 비롯한 세가 연합은 이미 후계 구도를 굳건하게 정해놓았다. 나도 그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르지.”
“…….”
남사일은 함께 화산에 온 남궁연에 기억이 미쳤다.
남궁세가는 지난 비동혈사로 직계 소가주를 잃었다.
그 때문에 몇 년간 봉문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였던바.
그런 그들 역시 다시 활동을 시작하며 유일한 직계인 남궁연을 후계로 삼았다.
“화산 역시 만만치 않게 죽어나겠지. 어쩌면 나조차.”
“…어찌 그런!”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시대가 바뀌면 물러나야 함이 옳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격언이 있지 않은가.”
선혁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명문은 항상 대비했기에 명문이라 불릴 수 있었다.
전란에 대비했고, 악재에 대비했으며, 풍파를 견뎌왔다. 그 모진 계절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꽃을 피워냈으니, 이때까지 화산이란 이름이 명맥을 유지한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금 입을 열 찰나, 선혁우와 선청우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문가로 향했다.
“자, 장문인.”
백매화에 든 매화검수 한 명이 숨을 헐떡거리며 그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괴협께서 정천 학관과의 교류회에 난입하셨습니다.”
“…이런,”
남사일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외부에서 사람이 방문하면 곧잘 있는 일이곤 했다. 선혁우나 선청우 역시 또, 라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백매화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교류회 이후 검절과의 대련에서 패배하셨는데…….”
“패배했다고? 그분께서?”
남사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괴협이라 불리고 있지만, 벽천양의 무공이 화산 내에서도 수위를 달리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광증의 천재라고까지 불리며 어지간한 장로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거늘 검절에게 패배하다니.
하지만 선혁우나 선청우나 모두 덤덤한 것이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있었겠군.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이 있느냐. 혹시라도 천양이의 패배에 반발한 이는 없겠지.”
그런 인망도 없을뿐더러 두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그 정도 고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설마 화산의 제자 중 그런 후안무치한 자가 있느냐는 물음에 백매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조금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
“이상하게 되다?”
“괴협께서 쓰러지신 탓에 그 신형을 수습해야 하지만, 누구도 그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남사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물으려 할 찰나, 선혁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나지막한 중얼거림. 그것에서 제 사형이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깨달은 선청우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어, 저희도 따라가야 할까요?”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둘의 행동에 백매화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찬가지로 의아한 얼굴이던 남사일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발을 옮겼다.
***
딱히,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상태창이 보여준 집념과 광기가 얼룩진 세월, 몰락한 천재의 광증은 주호로서도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기원에는 경의를 보냈다.
수십 년간을 은거해 오직 하나의 목적을 바라보는 일념으로 보낸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일 터.
그 일할인 삼 년에 가까운 시간을 비동 안에서 홀로 어둠과 함께 버틴 그였기에 어렴풋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런 감상을 품은 끝에 주호는 어째서 자신이 입신지경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집념과 함께 간절함이 부족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내심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만족했던 것 같았다.
쌓여 가는 명성, 치켜세워주는 주위, 앞길을 가로막는 적은 자신보다 몇 년에서 수십 년은 더 많은 세월을 보낸 이들이었지만, 이제 일부를 제외하고는 눈에 둘 정도가 아니게 되었다.
고작 무림맹 삼류 무사였던 청년이 강호를 아우르는 명성을 지닌 고수가 되었으니.
근래 벽에 다다른 무공이 조금씩 퇴보하는 것 같은 감각 역시 그러한 것에서 기인했다.
스스로 조급해하지 말자,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속으로 다독였지만, 그 원흉조차 인식하지 못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만은 나태를 나았고, 오만은 방심을 가져왔다.
더는 예전처럼 간절하지 않았고, 그 이름에 집념이 사라졌다. 벽천양의 과거를 보며 주호는 그러한 것들을 깨달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다.
주호는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있음을.
쿵-.
막, 쓰러진 벽천양의 신형을 수습하려던 선진경이 기묘한 울림을 느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
나지막한 의문성. 그것이 그 순간 선진경이 낼 수 있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변한 것은 없다. 고산(高山)의 바람은 여전히 서늘했고, 탁 트인 하늘은 변함없는 청명함을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고, 주위에 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으로 경지가 약한 이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백매화 전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 일행 역시 손끝을 잘게 떨며 연무장 가운데 우뚝 선 주호를 바라보았다.
“…대체. 처, 천후. 자네, 자네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손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떨려왔다.
선우연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제 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행 중 가장 경지가 높은 그라면 무언가 아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담아 시선을 보냈지만, 천후 역시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겠네.”
그도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같은 사신수의 일원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주호가 익힌 신공 쪽의 이야기였다.
그 정도의 경지라면 청룡신공의 대성도 머지않았을 터. 그것이 지금의 현상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가설을 세웠다.
‘주작신공 쪽엔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하지만 기억을 뒤져보아도 그러한 전승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주호 개인에게서 비롯된 변화라는 것일 터.
쉬이익-.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연무장 벽 위로 선혁우가 내려앉았다.
다른 이들이 어버버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것과 달리 그는 눈앞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천지가, 몰려드는구나.”
가득한 자연지기가 이곳을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광경이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무슨 현상인지 아는 것은 이 자리에 단둘뿐이었다.
“허허, 설마 했지만.”
촌각의 차이로 선혁우에 뒤를 따라 선청우는 연무장 위에 서 있던 주호를 바라보며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때와 같지.”
“허나 저 친구의 나이는 이제 고작 스물일곱이 아닙니까. 어찌…….”
“이 경지를 고작 나이로 재단하기엔 그렇지 않은가. 누구는 마흔의 나이로 올랐으며 누구는 일흔의 나이로 겨우 그 끄트머리의 편린을 보았지.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이 순리라면.”
“난세를 말씀하신 겁니까.”
“미증유의 위험이 감도는 상황일세. 사실 나는 놀랍다기보단 두려움까지 드는군. 이 앞으로 얼마나 험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기에 저리 걸출한 인물이 나오는지.”
선혁우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연무장 가운데 오롯이 선 주호를 바라보았다.
천지 가운데 몰려든 진기가 그의 백회를 타고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범인이 본다면 사람의 몸에 어찌 저 많은 기운을 품을 수 있을까 생각했겠지만, 그러한 인지의 한계를 초월하기에 입신지경이라 부르는 것이기도 했다.
스산한 바람이 분다. 이때까지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고, 청명했던 하늘은 어느덧 먹구름이 끼어 추적추적한 빗발까지 흩날렸다.
“…이건.”
그제야 장문인과 스승님의 뒤를 따라 그곳에 도달한 남사일은 눈앞에 상황에 의문을 표했다.
“사일아, 잘 보아라. 이 시대가 낳은 기린아가 탈각에 이르는 저 광경을.”
“탈각이라니.”
등선이라도 한다는 것일까.
대체 무슨 말인지 궁금했지만, 남사일은 그 둘의 진지한 분위기에 말을 아끼며 연무장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무실을 찾아온 백매화의 말대로 그 중간에 벽천양이 쓰러져 있고, 근처로 선진경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주호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하늘 위로 고개를 들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풀리며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금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있던 이들 역시 하나 같이 긴 한숨을 토해냈고, 더러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며 뭔지 모를 상황에 의문을 표했다.
탁.
선혁우는 몸을 날려 주호 앞에 내려섰고, 곧 자신을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막대한 기운을 단번에 갈무리하다니.’
얼핏 보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저 몸이 건장한 귀공자의 모습과 같다.
반박귀진(返樸歸眞)의 경지.
내가기공의 운용이 극한에 달해있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막 벽을 허물고 그 경지에 올랐을 때는 체내에 들이닥친 막대한 공력을 억누르느라 여념이 없었거늘.
“청옥당주.”
“…아, 예. 장문인.”
그 나지막한 부름에 선진경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그 곁으로 달려왔다.
“천양이 이 친구를 수습해주게. 단지 일시에 너무 많은 힘을 끌어내어 혼절한 것뿐이니 달리 조치할 건 없을 것이야.”
“명을 받듭니다.”
곧 선진경이 쓰러진 벽천양의 신형을 수습해 떠나갔을 찰나, 주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선혁우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고, 한층 더 진중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말게. 당장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곧바로 날 따라오게.”
선혁우는 담벼락 위에 있던 사제를 바라보았다.
뒷수습을 부탁하는 시선에 선청우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 선혁우와 주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동시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