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벽천양은 처음부터 괴협(怪俠)이라 불리며 화산의 골칫거리였던 것은 아니었다.
삼십여 년 전의 그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선우연, 조금 더 과거로 가면 남사일보다 더 촉망받는 기재였다.
실제로 그 둘과 같이 화산의 대표로서 정천학관을 졸업했고, 강호를 떠돌며 협행을 쌓는 것으로 젊은 나이임에도 제법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가 이립이 되기 이 년 전이 되는 해, 섬서 가곡현의 운가장 일원이 전부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보통의 범죄라면 관아에서 처리했겠지만, 현장의 흔적은 그 흉수가 제법 높은 경지의 고수라는 것을 뜻했다.
그렇기에 관아는 화산파에 협조를 구했다.
섬서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그들 역시 관계가 없지 않은바.
화산파는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당시 이름을 날리던 절매검 하우혁과 그 제자인 벽천양을 비롯한 열두 제자를 파견했다.
당시 화산의 장로였던 하우혁은 흉수가 운가장을 몰살하는 데 사용했던 무공이 마공임을 깨닫고 은밀히 그 뒤를 추적해나갔다.
종래엔 마두가 몸을 숨기고 있던 안가를 발견했고, 제 제자들과 함께 일시에 습격했다.
“내가 정면, 양이가 퇴로를 막는다. 나머지는 내 뒤를 따라오너라.”
“알겠습니다.”
정면은 절매검 하우혁과 나머지 제자들이 일시에 기습하고, 퇴로는 하우혁을 제외하고 일행 가운데 가장 고수인 벽천양이 맡았다.
벽천양은 자신들이 그 마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원 제일의 문파인 화산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인 제 스승님이 나섰는데 어려울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 믿음은 단 한 순간 만에 그를 둘러싼 세상과 함께 박살 나고 말았다.
“…컥!”
일검에 스승님의 검이 부서졌다.
이검에 그 몸이 양단되었고, 삼 검에 뒤따라 난입하던 제자들이 난자되었다.
“…….”
벽천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별것 아니었다는 우쭐한 얼굴로 마두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나왔어야 할 제 스승님은 발치에서 상체와 하체가 나뉘어 따로 굴러다니고 있었고, 다른 제자들은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그저 수십 조각의 살점으로 변해버렸을 뿐이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벽천양은 눈앞에 보이는 참상을 이해하기도 전에 검을 뽑아 들었다.
머릿속으로 수천, 수만 번을 휘둘러 온 초식을 불러일으키며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허무히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어.”
복부의 밑으로 실선이 그어졌다.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그는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헛바람을 토해냈다.
“음?”
마두는 그런 벽천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상처투성이의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움켜쥐는 것으로 자신과 시선을 마주쳤다.
“소매를 보니 화산이로군. 제일 앞쪽에 있던 놈이 네 스승인가.”
“으, 으…….”
눈동자 위로 수십 개는 될 법한 실핏줄이 잔뜩 돋아 있다. 벽천양은 알 수 없는 광기가 일렁거리는 그 눈과 시선을 마주하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래도 내 일검을 버티다니. 네놈이 스승보단 낫구나.”
마두는 히죽 웃으며 벽천양의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살과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며 그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지. 쉽게 죽이면 재미가 없지.”
우웅-.
마두는 벽천양의 백회로 농밀한 마기를 흘려 넣었다.
같은 정도 계열의 내공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무리한 운용이라면 치명적일 것인데, 하물며 백회로 흘러 들어간 것이 극성에 다다른 마기였으니 즉사하지 않는 것으로 다행이었다.
“…….”
벽천양은 두 눈을 까뒤집은 채 실신했다.
마기가 그 머리를 헤집으며 온갖 신경을 건드린다. 그렇지 않아도 복부에 입은 자상으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것은 더욱더 치명적이었다.
“짧은 여흥으로 충분했나.”
마두는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홧김에 식객으로 묶던 장원을 몰살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화산이 냄새를 맡아 이렇게 습격해왔으니 무림맹의 버러지들 역시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터.
“…….”
마두가 떠나고 벽천양은 삼도천을 넘기 직전의 상태로 같은 화산의 무인들에게 발견되었다.
급히 옮겨져 극진한 치료를 받았고, 턱 끝까지 차올랐던 죽음에서 겨우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기가 어지럽힌 그 머리는 어찌할 수 없었고, 그것이 괴협이라 불리는 광증이 시초였다.
화산에 그것을 아는 이는 이제 몇몇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장문인인 선혁우가 그러했고, 남사일의 스승인 선청우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매번 소란을 일삼고 말썽을 피우는 벽천양을 차마 내치지 못하던 것이었다.
몸을 회복한 벽천양은 이따금 자신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화산의 구석진 곳에서 홀로 여생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 증상은 점점 심해져 갔고, 종래엔 하나의 목적에 집착하게 되었다.
‘복수.’
스승님과 사제들을 죽이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에 대한 복수였다.
당시 강호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수라혈마는 이미 당시 검협으로 불리던 단철량의 검에 쓰러져 죽었다.
하지만 그 배후인 마교는 여전히 남아 있던바. 그렇기에 벽천양은 마교를 멸하기 위한 검을 깎았다.
화산의 무공으로는 부족하다. 매화 검법이 약한 무공은 아니지만, 꽃이 피어난 나뭇가지는 강한 힘에 부러지기 마련.
하지만 그가 익힌 검은 화산의 무공뿐. 그렇다고 화산을 나서기에는 뇌리에 자리 잡은 광증이 심했다.
벽천양은 한정된 조건 가운데 새로운 검을 창조했다.
삼십여 년.
땅에 심어진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 가운데, 벽천양은 겨우 제 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시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질이 너무나도 패도적이고, 흉흉한 탓에 같은 화산의 제자에게 겨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간간이 본산을 거닐며 방문하는 이에게 시비를 빙자한 대련을 신청하곤 했다.
매번 같은 흐름으로 소란이 일어났으나, 장문인의 입김으로 어떻게든 넘어가게 되곤 했다.
그 과정에서 화산괴협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제법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은가. 광증에 휩싸인 천재는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광소를 터트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 평소와 같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교류회의 이야기 중 검절이란 이름을 듣고 여느 때와 같이 난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자신의 검을 받아줄 상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운 무공을 발견했습니다.]
[「이름 없는 검」에 대한 기원을 기록합니다.]
“…….”
주호는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아주 짤막한 시간, 한 호흡의 시작이 지나기도 전이니, 찰나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순간이었다.
벽천양이 지닌 과거가 자신의 눈앞으로 지나간 것은 상태창의 조화인 듯싶었다.
‘어째서?’
허면 무황의 영령은 어째서 자신에게 그러한 것을 보여준 것일까.
이 불쌍한 광인을 향한 이해를 구하려는 것인가, 아니라면 비참한 과거에 사로잡힌 그를 구원해달라는 것인가.
기기긱-.
그 바람이 어느 쪽이든 주호는 신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서로 간의 격차는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했지만, 벽천양은 제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아니, 더 불타오르며 이전보다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자신을 바라봐왔다.
기기기기기긱-.
바닥을 긁는 검 끝의 소음이 점차 길어진다. 이윽고 그것이 절정에 달했을 때.
파아앗-!
바닥을 긁던 검이 순식간에 그 위에 기다란 잔흔을 내며 휘둘러졌다.
단순히 검기를 쏘아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 궤적을 따라 시뻘건 불꽃이 일어나며 사방을 달궜다.
“…….”
주호는 가볍게 청룡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린 것으로 그 열기를 해소했다.
하지만 벽천양의 검은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주위를 뒤덮은 열양지기의 기운이 극한에 치달음에 따라 미약한 뇌성이 그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 진동을 반복하더니 이내 폭발적으로 그 기세를 부풀리며 주호에게로 쏘아졌다.
콰르릉-!
하늘은 분명 청명하건만, 지상에는 수평의 뇌성이 내리꽂혔다.
시뻘건 겁화와 함께 자신에게로 쇄도한 그것에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검을 놀렸다.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오랜만에 펼친 초식의 형이었다.
현검의 기운이 주변을 장악하며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벽천양의 검도 분명 그 영역 안에서 휘둘러지는 것이 분명하건 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움직임에 제한을 받지 않은 듯하였다.
쉬이익-!
주호는 몸을 비틀어 제 어깨를 찔러오는 공격을 피해냈다.
주호 정도의 고수라면 상시 호신기가 운용되어 제 몸을 감싸고 있기 마련이었다.
어지간해선 그 끄트머리가 살짝 스친다고 해서 흔적이 남지 않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벽천양의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그 옷자락에 타들어 간 자국이 생겨났다.
‘마치 그녀를 보는 것 같군.’
절정에 이른 주작신공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물론 천우희의 경지로 아직 자신에게 닿는 것은 무리였지만, 벽천양 정도의 천재가 삼십여 년 동안 깎아낸 검은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왔다.
“화산의 검이지만, 화산의 것과는 다른가.”
“용케도 알아보았군.”
나지막하게 뱉어진 주호의 말에 벽천양은 씩 웃었다.
오직 마(魔)를 멸하기 위한 검이었다.
화산의 골조가 되는 매화를 태워 강렬함을 끌어냈고, 우연히 목격한 벽조목(霹棗木)에서 영감을 얻어 벽력의 묘리를 섞었다.
뇌성이 서린 불꽃, 마를 멸하기엔 더없이 훌륭한 것이지 않은가.
쉬이이익-!
초식도, 일정한 형도 없어지는 검이었지만, 그 위력만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화산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검보다 패도적이고 강렬했으며, 맹목적이었다.
그렇기에 화산의 제자들에게 펼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검은 그들의 존재를 뿌리부터 부정하는 것이니.
“으하하하-!”
벽천양은 수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진심이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검을 막아내는 주호의 모습을 보아하니 가슴에 쌓인 무언가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마음껏 검을 휘둘러 모조리 막혔음에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
주호는 주위를 달군 열기에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주위에서 비무를 관전하던 이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이미 멀찍이 물러난 지 오래였다.
그러니 자신 역시 손대중할 이유가 없었다.
“염뢰(炎雷)-.”
주호의 기세가 바뀐 것을 깨달은 벽천양은 제 전력을 끌어내었다. 휘몰아치던 불꽃이 한곳에 모여 재단되었고, 이내 검의 형태를 띠며 더없이 강렬한 기세를 보였다.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흘렸다.
괴협이라 불리며 광인 취급을 받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저런 검을 깎아 내다니.
가히 대종사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기질이 아닌가.
상태창을 얻은 자신이라 할지라도 아직 헤매고 있거늘.
그렇기에 최소한의 경의를 담아 신검을 다잡고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벽천양을 향해 일도양단했을 뿐이었다.
저적-.
작열하는 빛이 그 궤적 가운데로 터져 나왔다.
괴협의 검은 매서웠지만, 주호의 어검은 그보다 한 차원 위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파각-.
벽천양이 쥔 검 위로 균열이 인다. 그것은 곧 반으로 갈라져 떨어져 내렸고, 뇌성이 서린 불꽃 또한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검의 이름이 무엇이지?”
주호는 자신을 지나쳐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선 벽천양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더니 무언가의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들었다.
“지어주겠나?”
“…….”
비교적 가까이 둘의 비무를 지켜보던 선진경은 사숙의 모습을 보곤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장문인이나 선청우와 같이 벽천양이 광증에 걸리기 이전부터 함께 지내왔던 사이였다.
그렇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벽천양의 눈은 과거 그가 한창 화산의 고수로서 이름을 알렸을 때와 똑같은 선명함을 품고 있었다.
“…….”
주호는 벽천양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로선 상태창에 기록을 더하기 위해 물은 것이었으나, 그 검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불꽃은 제 앞의 모든 것을 태우며, 그 위에 서린 벽력은 가히 뇌성과 같다 하여…….’
멸염진천뢰(滅炎震天雷).
그 이름을 들은 벽천양은 형형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법의 이름으로는 썩 어울리는 것이 아니군. 허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서렸다.
“…썩 마음에 드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벽천양의 신형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