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사무량이 고작 열 초식에 패배하자 홍매화의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았다.
패배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설령 학관의 후기지수와의 비무에서 전패(全敗)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친선 성격의 대련이었고, 피차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은 같았으니까.
하지만 저리도 압도적인 실력 차로 끝난다면 그것은 화산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과 같았다.
“…….”
사무량이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들어오자, 그 옆에 있던 이들이 괜찮다는 뜻으로 가볍게 등을 두드려주었다.
남은 비무는 두 번.
홍매화의 남은 둘은 서로 시선을 맞추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최소한 비등한 승부라도 내지 못한다면 홍매화란 이름을 어디 들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정천 학관 측의 남은 두 명의 기세는 이제껏 나왔던 이들과 비교해 한층 더 무거운 기운이 없잖아 있었다.
창을 쓰는 이는 산동악가의 악비산.
듣기로는 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와 정밀한 움직임을 활용해 초식을 펼친다고 하였다.
그 뒤에 도를 매고 있는 이의 이름이 천후로, 학관의 수석이라고 했으니 이들 중 제일 강한 것일 터.
“내가 먼저 나가겠네.”
사무량의 어깨를 두드려준 고인혁은 굳은 얼굴로 제 동기를 돌아보았다.
정천 학관 측에서는 악비산이 비무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상대는 그보다 강한 천후이니 이쪽에서도 걸맞은 이가 나가야 함이 옳았다.
“…….”
고인혁의 시선을 받은 조일현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홍매화 중에서도 수석과 차석을 논하는 실력을 지녔다. 그중 조일현 쪽이 조금 더 우위에 있으니 알맞은 인선이라 할 수 있었다.
“홍매화의 고인혁이오.”
“악가의 비산이다.”
악비산은 초장부터 기선제압을 하려는 듯 거친 모습을 보였다.
비무가 시작하기도 전에서부터 창을 들었고, 제 투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상대를 압박했다.
이윽고 비무를 주관하는 선진경의 신호가 떨어졌고, 둘의 신형은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차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단, 초식이라함은 단 한 번의 휘두름이나 찌르는 동작이 아니다.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이어져 흐름이 되고 형태를 갖춰야 비로소 초식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남궁연이 사무량을 열 초식 만에 꺾은 것 또한 검을 열 번 휘둘러서 끝낸 것이 아닌 열 개의 초식을 사용해 비무를 끝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악비산은 그렇게까지 길게 갈 생각이 없었고, 정말로 딱 열 번만 창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쉭-!
고인혁의 첫 검은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허초였다.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가볍게 흘려내며 오히려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 그의 의표를 찌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악비산의 창은 허초 따위가 아니었고, 의표를 찌르는 것도 불가능했다.
쿵-!
“……!”
묵직한 광음과 함께 고인현의 검이 검로에서 크게 이탈했다.
가끔 전력을 다해 상대와 손속을 겨루면 그럴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조금 궤가 다른 이야기였다.
‘이 무슨 괴력……!’
고인혁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손목이 떨어져 나간 듯한 충격에 황급히 그쪽을 내려다보았으나, 다행히 그 자리에 잘 붙어 있었다.
다만, 쉴 새 없이 떨리며 쌓인 충격을 쉽사리 흘려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쉬익-!
이격 째.
악비산의 창은 고인혁의 검과 달리 검로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우직하면서도 유려하게 자신의 목적을 따라 움직였고 이내 고인혁에 지척에 이르기까지 찰나밖에 걸리지 않았다.
“흡-!”
고인혁은 기합을 토해냈다.
고작 일합에 패배를 인정하기엔 짊어진 것이 많다. 그렇기에 몸을 빙그르르 회진시켜 그것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고, 무리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매화검법을 펼쳐냈다.
과연 홍매화의 차석을 논할 만큼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한 대처. 하지만 악비산의 두 눈엔 같잖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교관님이나 천후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잔재주였다.
더욱이 같은 화산 출신인 선우연과 비교해보아도 한참은 뒤떨어지는 수준이었으니.
비록 그 경지는 비슷할지 몰라도 요 일 년간의 대련과 수련으로 단련된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윽!”
삼격 째.
창대가 격하게 출렁거리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세찬 기세로 찍어 눌러왔다.
고인혁은 검을 가로로 눕혀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내려 했지만,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신음을 토해냈다.
화산의 절기인 매화검법을 펼치고도 밀릴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하지만 무릎을 꿇기 직전의 자세가 돼서야 겨우 결단을 내렸고 훌쩍 뒤로 물러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뒤로도 같은 양상의 반복이었다.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비무 내내 끌려다녔고, 정확히 그 창이 열 번 휘둘러졌을 때 고인혁의 검은 주인의 손을 떠나 연무장 바닥을 굴렀다.
“…졌소.”
“흠.”
악비산은 흡족한 표정으로 창을 거둔 뒤 정중히 포권했다.
고인혁으로서는 힘 빠진 표정으로 제 검을 주워들고는 사무량 때처럼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수고했네.”
남은 것은 단 한 명.
조인형은 제 동기를 위로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다른 이들은 맥없이 패배했지만, 자신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라.
그렇게 천후 앞에 섰고.
“…이, 럴수가.”
정말로 압도적인 격차로 단 세 합 만에 패배하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거, 참. 무참하기도 하군.”
“아무래도 남궁 소저의 비무를 보고 불이 붙은 듯싶네.”
“그렇지?”
선우연과 당천유는 머쓱한 표정으로 도를 거둬들이며 돌아오는 천후를 보며 쑥덕거렸다.
친선 목적의 비무이니 선우연과 당천유는 적당히 상대와 무공을 겨뤘다.
하지만 남궁연부터는 너무 압도적으로 비무를 끝냈고, 그 뒤에 있던 악비산과 천후에게도 불을 붙인 듯싶었다.
그들이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떠드는 것과 달리, 홍매화는 초상이라도 난 듯 침울한 분위기였다.
“…눈이 썩을 것 같군. 고작 그 정도 무공으로 매화검수임을 칭하며 자랑하고 다녔느냐.”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비무 내내 차가운 눈길을 보내던 벽천양은 홍매화를 보며 일갈했다.
하다못해 한 명이라도 승리했다면 할 말이라도 있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비무를 주관하던 선진경으로서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이제 되었지. 네놈의 말대로 비무가 전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알겠소이다.”
벽천양의 부름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제 뒤에 선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두 눈 크게 뜨고 잘 보아라.”
“하나도 놓치지 않을게요.”
남궁연이 대표로 결연한 표정과 함께 대답하자,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내 벽천양이 기다리고 있던 연무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비무에 조건이 있소. 내공은 서푼으로, 서로 가급 적 살초는 자제고.”
“원하는 것도 많군. 좋다, 장문인의 입김이 들어갔으니 그 정도는 따라줘야겠지.”
선진경이 비무의 시작을 선언하지 않았음에도 벽천양은 거친 기세를 피워 올렸다.
다만, 서푼의 내공만 사용하라는 말은 따라주는 것인지 이전과 같이 이 공간 전체를 아우를 법한 압박감은 없었다.
쉬익-.
일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주호는 그때까지도 검을 뽑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지만, 시야의 사각에서 자신을 향해 닥쳐오는 살기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살초는 자제할 생각이 없나 보군.’
쉬익- 캉!
더없이 매끄러운 발검이었다.
일순간에 뽑혀 나온 신검이 벽천양의 공격을 쳐내자 연무장을 중심으로 거센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거, 교관님이랑 우리의 단위가 다른가? 서푼 따위가 아닌 것 같은데.”
“총량을 생각해야지 않겠나. 자네의 서푼과 교관님의 서푼이 같을 것 같은가.”
당천유가 벙찐 표정으로 말하자 악비산이 한심하단 눈빛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이 이해될 정도로 서로 격렬한 싸움이었다.
휘릭-.
몇 번의 연격 이후 제 모든 공격이 막힌 벽천양은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힘을 가미했다.
그러곤 공중에 붕 뜬 채로 떨어져 내리며 주호의 왼쪽 관자놀이를 향해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콰앙-!
마치 폭탄이 터진 듯한 소리였다.
신검이 부들부들 떨리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음을 알려온다. 하지만 그것을 쥐고 있던 주호의 표정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좋아, 이 정도로 동요를 보이면 섭섭하지.”
벽천양은 그 너머에서 씩 웃으며 광기 어린 눈동자로 짙게 웃었다.
타다다닥-!
그는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땅을 박차며 우방향으로 파고들었다.
주호 역시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려나갔고, 백중지세의 모습으로 벽천양과 싸워나갔다.
“…그나저나 화산괴협이라 불리는 저분은 누구인가? 내 식견이 그리 짧지 않음에도 처음 들어 보는 것인데.”
철대환의 물음에 선우연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도 그리 잘은 모르네. 가끔 화산에 소란이 일어나면 대부분 그 중심에 있었던 이름이라는 것밖에…….”
얼버무리는 대답이었다.
그 역시 어릴 적부터 화산괴협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바.
선우연의 스승인 선혁우는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매번 한숨을 내쉬며 그 뒤처리를 하곤 했었다.
선우연은 의아한 마음에 대체 그가 누구냐는 듯 묻자, 한숨 섞인 목소리로 절대 그와 엮이지 말라는 충고가 되돌아왔다.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했기에 선우연은 독자적인 조사에 나섰고, 이내 한 사질에게 대략적인 전말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재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해 광증이 도진 천재.
만일 그 정신이 온전했더라면 차기 장문인은 그가 되었을 거란 이야기가 자자할 정도로 유망한 고수라고 하였다.
“…….”
선우연은 고개를 들어 주호와 싸우고 있는 벽천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 빨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낡은 도복,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게 자란 수염, 그리고 핏발 선 눈동자까지.
저잣거리에서 마주쳤다면 광인(狂人)이라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공에 관해서는 동년배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도의 천재라고 하니, 대략적인 위치는 장문인의 아픈 손가락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지금 생각지도 못한 강적을 맞아 두 눈을 크게 떴다.
쾅-!
선우연의 두 눈은 조금 전 서로의 경합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담아내지 못했다.
다만, 주호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반면 벽천양은 훌쩍 뒤로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고 반쯤 주저앉은 채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승부의 행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믿기가 힘들구나.”
“…….”
주호는 한없이 오만한 눈으로 벽천양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만난 이들 중 강자라 할 수 있는 기준선 안쪽에 드는 이긴 했지만, 그것 뿐으로는 자신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러자 벽천양은 그의 생각을 읽은 듯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이 무공을 받아낼 이가 나타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