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화산괴협(華山怪俠) 벽천양.
어릴 적 강호에 대한 동경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고수를 꿰뚫고 있는 주호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검절(劍節)이 누구더냐.”
상태창을 훑고 있던 그의 귓가로 호기심이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호가 슬쩍 고개를 들자 좌중을 훑어보던 벽천양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호오.”
쿵.
가볍게 내디딘 걸음이었지만, 그를 중심으로 호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주위를 가리지 않고 발산한 그 기세에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청매화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윽.”
천후를 비롯한 후기지수 일행 역시 버티기 버거울 정도로 강렬한바. 그렇기에 그들 모두 인상을 찌푸리며 뒷걸음질쳤다.
그 갑작스럽고 무례한 행태에 주호는 싸늘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뒤로 물러나는 주변인들과 달리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 그 앞에 섰다.
파아앗-.
주호를 중심으로 주변을 뒤덮는 부드러운 기운이 뿜어진다. 그것은 어렵지 않게 벽천양의 기세를 밀어냈고, 동시에 좌중을 좀먹고 있던 압박을 해소했다.
“호오.”
벽천양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감탄을 흘렸다.
그 전신에 투기가 가득 피어오르는 것이, 금방이라도 주호에게 덤벼들 모양새였다.
교류회 진행을 위해 한쪽 옆으로 물러나 있던 선진경은 험악해지기 시작하는 분위기에 헐레벌떡 자신의 사숙에게로 뛰어갔다.
“사, 사숙. 여긴 어떤 일이십니까.”
“잠시 주변을 거닐던 와중에 본산이 묘하게 부산스럽기에 대충 물어보니 교류회를 연다고 하더구나.”
선진경의 물음에 가벼운 태도로 대답한 벽천양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가운데 검절(劍節)이라는 명망 높은 고수가 있다기에 내 화산을 대표해 가볍게 손속이나 나눌까 싶어 온 것이다.”
“허, 허나…….”
“거참, 아직 네 나이가 한창때거늘 이런 간단한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다니. 교류회이니 화산의 대표로 나온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번 교류회는 후기지수 위주로 진행됩니다. 장문인께서도 조용히 진행되길 원하셨…….”
“한 번만 더 장문인 이름을 꺼내면.”
벽천양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 완고한 모습에 선진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기협이라 불리는 이 고수는 아는 이들만 아는 노괴(老怪)였다.
젊을 적부터 유망한 고수였지만, 성격이 고약해 화산 내에서도 기피의 대상이 되었고 작금에 이르러서까지 그 고약한 성정은 유명했다.
다행이라면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은 덕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하지만 간간이 한 번씩 나타날 때마다 사고를 치는 바람에 요주의 경계 대상이었다.
더욱이 장문인이나 매화검선 정도의 배분이라면 그를 강제할 수 있지만, 선진경으로선 배분이면 배분 무공이면 무공 둘 다 어찌하긴 힘들었다.
‘…그렇다고 알겠다고 할 수도 없고.’
끝까지 확답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 하지만 벽천양의 기세가 점점 매서워지기 시작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질을 보아하니 네놈도 강자와의 싸움은 꺼리지 않는 성격인 것 같은데, 어떠냐.”
벽천양의 시선이 다시금 주호에게로 향했다.
저만한 고수가 자신과의 싸움을 마다할 리는 없다. 그렇기에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으나, 주호는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강호의 말학이 감히 선배님께 말씀드립니다.”
“음?”
“본인은 화산의 무인이 아닙니다. 이번은 강호의 후배 된 도리와 장문인의 얼굴을 보아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파아아앗-!
항거할 수 없는 기세가 해일처럼 휘몰아쳐 연무장 가운데 있던 선진경과 벽천양을 덮쳤다.
그 가운데 서린 흉포한 살기는 예사 것이 아니었다.
선진경은 주춤하며 물러났기에 그것을 느끼지 못했으나, 온전히 주호의 기세를 받아낸 벽천양은 전신을 난도질할듯한 살기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처럼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인다면, 두 번은 없을 것이다.”
존대를 거둔, 더 없이 직설적인 말이었다.
‘끄응…….’
선진경은 낭패 서린 표정을 지었다.
주호가 저렇게 드센 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도 할 수 있다면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벽천양의 존재는 일종의 천재지변으로 아무리 선진경이라 할지라도 그의 등장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장문인께 고해야.’
하지만 자신이 이 자리를 비운다면 큰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다.
주호가 일으킨 거대한 기운에 맞서는 벽천양의 기세도 심상치 않아지고 있지 않은가.
“좋다, 그렇다면……!”
벽천양이 제 손을 꿈틀거리며 검대에 매인 자루를 움켜쥐었을 찰나, 주호는 순식간에 제 기운을 거둬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청옥당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류회는 후기지수 간의 비무로 이루어집니다. 굳이 저와 겨루고 싶으시다면 그것이 전부 끝난 후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사숙.”
선진경 역시 그 옆에서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해왔다.
벽천양은 잠시간 제 턱을 긁으며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쯧, 대신 빨리 끝내도록.”
그래도 화산의 어른이라는 일말의 자각은 있는 것인지 다짜고짜 소란을 키우진 않을 것으로 보였다.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선진경은 그 찰나에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이었다.
‘이걸 어찌할꼬.’
그 완고한 표정을 보아하니 주호가 자신을 상대해주기 전까진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촉즉발의 상황 가운데 입을 꾹 닫고 있던 후기지수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화산의 어른으로 배분과 무공 모두 만만치 않은바.
하지만 그를 상대로 조금의 밀림 없이 상대해 기를 꺾어 놓지 않았나.
잠시간 날카로운 시선으로 벽천양을 바라보던 주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제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아니 이렇게 되었기에 더더욱 말하겠다. 확실히 꺾어 놓도록.”
주호는 서로 간의 예의도 모르는 이를 선배로 대접해줄 생각은 없었다.
화산괴협이니 뭐니 하고 불린다고 하여도 어차피 자신에게 있어서는 생판 관계없는 남이 아니던가.
그 정도의 고수가 다짜고짜 강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것은 잘못하면 치명적인 일이 되는바.
화산의 제자들도 상관치 않고 압박해온 그 모습을 보아하니 평소에도 안하무인인 태도로 지내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박살내겠습니다.”
“일말의 틈도 보이지 않을게요.”
“그러겠습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요.”
“독은 쓰면 안 됩니까. 한 칠주야 정도는 피똥 싸게 만들 수 있는데.”
각각 악비산, 남궁연, 천후, 철대환, 당천유 순으로 내뱉은 대답이었다.
각자 자신의 패배는 조금도 상정하지 않은 듯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
오직 선우연만이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자네는?”
옆에 있던 당천유가 슬쩍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다. 그러자 선우연은 그제야 고개를 떨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겠나. 패배는 내 성미에 맞지 않거늘.”
그들이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을 찰나, 겨우 상황을 수습한 선진경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예정대로 교류회를 실시하겠네. 홍매화의 여섯과 정천학관의 후기지수 여섯으로 진행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경의를 가지고 비무에 임하세. 비무는 언제든 참관자인 나나 주 교관의 판단으로 중지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고.”
“예!”
우렁찬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내가 먼저인가.”
정천 학관의 순번은 이전 천무 학관과의 교류를 위해 치러진 선발 대회의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이 철대환. 그는 이전과 사뭇 다른 형태의 권갑을 보이며 두 주먹의 끝을 가볍게 부딪쳤다.
“개시-!”
선진경의 선언에 철대환은 홍매화의 매화검수와 마주 보았다.
같은 초일류의 경지로 그 전신에서 제법 매서운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바로 그 직전 벽천양의 기세를 받아내어 그런 것인지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듯 잠시 서로를 가늠하는가 싶더니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보법 하나는 정말로 매끄럽단 말야.”
뒤쪽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우연은 감탄을 터트렸다.
그 역시 이전에 몇 번이고 철대환의 기묘한 보법에 낭패를 본 적이 있는바.
처음 상대하는 입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홍매화의 매화검수는 미끄러지듯 달려온 철대환의 움직임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매화검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 검을 유려하게 휘두르며 매화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氣)의 발출이 제한된 대련이라 검기가 쏘아지고 권기가 허공을 꿰뚫는 그런 광경은 아니었으나, 허공에 터지는 초식 하나하나가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약 오십 초가 지났을 무렵 홍매화의 매화검수는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고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패도적인 권법 사이에 섞여 펼쳐진 위력적인 장법이었다.
제 실력을 전부 펼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곧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으나, 실전이었더라면 방금의 일격으로 치명상을 입었을 터.
그렇기에 긴 한숨을 내쉬며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이어진 양상도 그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당천유는 제 특기인 독을 쓰지 않고 암기만 사용하는 것으로 철대환과 비슷한 시간에 승리를 거두었다.
선우연 역시 마찬가지로 비등비등한 모양새를 보이다가 한순간에 흐름을 비틀어 날카로운 승부를 본바.
거기까지는 서로 간에 어느 정도 훌륭한 양상을 띠었다고 볼 수 있었다.
비무를 지켜보던 청매화의 무인들 역시 직전에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 비무가 끝날 때마다 환호를 지르며 승자에 대한 예우를 보였다.
그 환호가 뚝 끊어진 것은 남궁연이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연무장 가운데에 섰을 때부터였다.
“…명성이 자자한 검화(劍花)와 마주하게 되어 영광이오.”
홍매화의 매화검수인 사무량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명불허전이라 생각했다.
강호제일미를 논하는 그 미모는 소문보다 과장됨이 없었고, 은은하게 풍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검의 기재라 불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그 투명한 눈동자에 등 뒤로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리는 듯했다.
‘…이 무슨.’
분명 가만히 서로 마주보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압도되었다.
서로 간에 실력 차이는 그리 없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백과 압박감이라니.
사무량은 머릿속에서 강호제일미 운운하는 것을 지우고 그녀를 한 사람의 무인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늦었을 따름이었으니.
휘릭-.
완성에 이른 창궁무애검법이 화산의 하늘을 뒤덮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필사적인 몸부림과 꼴사나운 발악뿐. 화산을 대표하는 홍매화의 매화검수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무력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작 열 초식이 지났고, 그 목젖에 남궁연의 검이 겨눠지는 것으로 승패가 판가름이 났다.
“…졌소.”
압도적인 격차.
사무량이 살짝 목소리를 떨며 말하자, 그녀는 싱긋 미소 짓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로서는 멍하니 멀어져 가는 남궁연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