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그 아이,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는 모습이 웃기지 않았는가.”
환영식이 끝난 후 선혁우는 그들을 배려해 각자 숙소에서 며칠간 쌓인 여독을 풀게 했다.
주호 역시 하루 정도는 느긋하게 쉬려고 했으나, 장문인이 곧바로 자신과 만나기를 청해온 탓에 그의 집무실에서 단둘이 자리하게 되었다.
“남 교관께서는 저보다 연세가 많으십니다.”
“어이쿠, 깜빡했네. 자네랑 대화하다 보면 어디 반로환동한 노고수랑 이야기하는 듯싶어서 말이네. 아, 그렇다고 자네가 늙었다느니 그런 것은 아니야. 우리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럴 뿐이지.”
무슨 뜻인지 알지 않냐며 한쪽 눈을 찡긋거려오는 것이 나이에 맞지 않게 활발한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가벼운 그 태도에 주호가 쓴웃음을 짓자, 선혁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뭇 많은 인사들의 방문이 있었겠지. 무려 십육 년만의 귀환이 아니던가. 제 스승으로서도 말릴 수 없겠지.”
“고되겠군요.”
“제 업보이지. 뭐, 그만큼 기대주였다는 소리일세. 기대를 많이 받았기에 배신감도 컸던 것이지.”
선혁우는 차향을 음미하며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주호 역시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할 찰나,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남 교관님 이야기로는 장문인께서 자신을 그리 탐탁지 않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선혁우의 태도는 더 없이 호의적이 아닌가.
외부인인 자신에게조차 도와달라고 부탁해올 정도로 성의를 보였으니 남사일의 말대로 아니꼬워하지는 않은 것으로 느껴졌다.
“흠.”
선혁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이내 주호를 바라보며 어렴풋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 아니, 실제로 그러했네.”
“…그렇다는 것은?”
“매화선풍검이라는 별호도 화산을 떠나 중원을 떠돌며 얻은 것이지. 장로라는 직분은 다섯 해 전 그 아이가 덜컥 정천 학관의 교관으로 들어가자 허겁지겁 내린 직분이고.”
선혁우는 제 손가락을 들어 탁자 끝을 툭툭 쳤다.
“사실 탐탁지 않아했다기보단 아니꼬웠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 나는 화산의 이름을 달고 화산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그 아이가 이해되지 않았다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는 파문까지 생각했지만, 전대 장문인께서 극구 말리셨지.”
“전대 장문인이라면.”
“그래, 벌써 십 년도 더 전에 타계하셨지. 당시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네. 물론 재능이 넘치고 의협심이 뛰어나긴 했으나, 아직 이립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녀석을 차기 장문인 후보로 말씀하신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선혁우는 그때를 회상하듯 깊어진 눈으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나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말씀하셨네. 물론 그때는 언제까지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네만, 결국엔 그분의 말씀이 맞았더군.”
“그렇습니까.”
“이전에 맹에서 말했듯 화산에는 변혁, 개혁이 필요하네. 다들 명문이란 이름에 취해 있어. 나 역시 이대로는 안 된다고 깨달았을 뿐이야. …한참이나 늦었지만 말이네.”
씁쓸한 회한이 서린 어조였다.
잠시간 그 감정을 곱씹던 선혁우는 이내 고개를 들더니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 교류회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
“화산에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흠, 이쪽에도 들어온 이야기는 많네. 그중 그럴듯한 것을 골라보자면 아무래도 친선 비무 정도가 있겠군.”
“친선 비무입니까. 저도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군요.”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화산의 후기지수가 뛰어나다고 한들, 자신의 밑에서 가르침 받은 제자들보다 나은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 손쉽게 격파할 수 있기에 그리 어려운 것도 없었다.
“청매화 정도면 어느 정도 비슷하겠지. 단, 너무 과열되지 않게끔 조치하세. 이쪽에도 일러둘 터이니 자네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혁우는 무언가 골치 아픈 것이 생각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에 대한 것도 있군.”
“어떤 것이었습니다.”
“화산을 대표하는 이름에는 매화검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간의 인지도에선 그만한 것이 없지. 이전에 있었던 소란에서 비록 동수를 이루었다만, 매화검수의 명성을 생각하면 더 없는 굴욕이 아닐 수 없네. 비록 그 과정과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렇습니까.”
“많은 이들이 자네와 비무하고 싶다며 들고 일어났네. 패기 넘치는 신진 고수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장로급도 있었지. 허나 전부 거절했다네.”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어지간한 이가 나선다고 할지라도 자네의 상대가 아니지 않는가. 여기서 더 망신살을 뻗칠 수도 없으니 말일세. 그렇다고 해서 자네에게 일부로 패배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일세.”
“저는 항상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렇지. 그러니 귀찮은 일은 전부 다 치워버렸다네. 그러니 마음 편히 있다 가게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군요.”
주호는 굳이 조원일을 보내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것이 장문인의 명이었음을 꼬집지는 않았다.
예전이었더라면 앞뒤가 어떻게 되었든 들이박고 보았겠지만, 그 역시 이때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며 경험을 쌓은바.
설사 명분이 이쪽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부류와 적대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뭐, 이야기는 대충 그렇네.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 것도 그러니 이만 들어가 쉬게. 대략적인 흐름은 이쪽에서 주도할 터니, 나머지는 부탁하지.”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주호 일행은 하룻밤을 푹 쉬었다.
그러곤 오전엔 모두 화산을 돌아다니며 그 경관을 구경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어제 말했던 대로 장문인이 엄명을 내렸는지 다행히 시비 거는 이는 없던바.
간혹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리 적대적인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예쁘네요.”
주예향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제 머리 위까지 내려온 나무줄기에 피어난 매화꽃을 건드렸다.
지상은 한여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산은 아직 완연한 봄과 같았다.
형형색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꽃이 사방에 자리하고 있는 그 광경은 어느 명산보다 더 아름답기 그지없어 연신 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오후부터는 본격적인 교류회가 있다고?”
“그렇네. 청매화와 비무를 한다더군.”
악비산의 물음에 선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매화면 어느 정도인가?”
“음, 학관에 갓 입관한 후기지수 정도인가.”
“그러면 저들 정도?”
당천유가 팽우혁을 비롯한 후배들을 바라보자 선우연은 아마 그럴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매화는 화산의 모든 후기지수가 거쳐 가는 곳이지. 나 역시 정천 학관에 입관하지 않았더라면 청매화가 되었을 것이네.”
“매화검수가 되기 위한 첫 단계라고 들었거늘 그렇게 되는가.”
“청매화 중에 상위 몇 명만 그 위 단계인 홍매화가 되지.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가네.”
“그러면 상대하기 그리 어렵진 않겠군.”
악비산은 벌써 비무가 기대되는지 두 주먹을 맞대며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네 사형인 신룡은 어디에 계시는가?”
천후가 짐짓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폐관 수련 중에 계시네. 나도 얼굴을 보지 못한지 한참이 되었군.”
“그런가, 아쉽네.”
선우연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화산의 신룡(紳龍) 선위연.
후기지수 때부터 출중한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냈고, 그 이후에는 출중한 실력으로 화산신룡이라는 별호까지 붙었다.
하지만 선위연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본산에 은거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화산에서는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내놓았지만, 그것이 몇 년 동안 계속되자 강호에 점차 그 이름이 잊혀 갔다.
사실 선위연이 계속 강호에서 활동했더라면 검절이란 별호도 그의 것이 되었으리라는 의견도 분분한바.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의 이야기였다.
***
정오가 지났다.
화산 구경을 끝내고 점심 식사를 마친 주호 일행은 무인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곧 청매화의 수련 기관인 청옥당(靑玉堂)에 도착했고, 한창 수련에 열중 중인 일백의 청매화를 볼 수 있었다.
“음.”
주호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제법 그 기세가 매섭긴 했지만, 제 밑에 있는 후기지수들과 비교하자니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전부 열 초식을 버티기도 힘들어 보이는군.’
너무 압도적으로 비무를 끝낸다면 도리어 논란이 생길 수도 있을 터.
어차피 그것을 감내하는 것은 정천 학관 쪽이겠지만, 그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흠.”
선우연을 비롯한 다른 후기지수들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냐는 뜻으로 주호를 바라봐왔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청매화를 교육하고 있던 청옥당주인 선진경에게 다가갔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편히 하대하셔도 됩니다. 남 교관님의 사형이시면 제게도 윗사람 되시는 분이니.”
“하하, 호쾌해서 좋군. 그래, 무슨 일인가.”
“그것이…….”
주호는 슬쩍 자신들의 주위로 기막을 둘렀다.
그 은밀한 수법을 눈치챈 선진경은 감탄을 내뱉으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할 이야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비무에 관해서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청매화를 상대하기엔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하여…….”
“무슨 소리인가? 비무에는 홍매화가 나설 것이라네.”
“……?”
주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장문인은 분명 청매화를 비무의 상대로 내보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홍매화라니?
물론 이쪽에서 상대를 바꿔 달라고 요청하려 했긴 했지만, 미리 상의한 것과 다른 이야기지 않은가.
“듣지 못했나 보군. 장문인께서 직접 부탁하셨다네.”
“…괜한 우려였군요. 알겠습니다.”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제 후기지수들에게로 다가갔다.
“상대가 바뀌었다. 홍매화의 검수들이 나선다고 하는구나.”
“…홍매화, 입니까.”
선우연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매화는 최소 일류부터 초일류까지의 고수들로 구성된바.
화산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니 학관 쪽과 관련된 친선 비무로 나서기엔 그리 적절치 않은 인선이었다.
“어찌 되었든 다들 최선을 다한다. 눈앞의 상대에게 전력을 다해 임하도록.”
“알겠습니다.”
후기지수들은 다들 자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청매화의 수련이 끝나고 저 멀리서부터 붉은 매화의 복장을 한 홍매화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예사롭지 않은데.”
철대환이 가늘어진 눈으로 말했다.
그 하나하나가 초일류에 이르렀다.
단순히 경지로만 따지자면 이쪽과 백중지세를 이룰 정도. 제법 치열한 비무가 될듯하였다.
“지는 사람이 돌아가서 술 사는 것이다.”
“절대 그럴 순 없지.”
악비산과 당천유는 의욕을 드러내며 전의를 불태웠다.
천후는 언제까지 그랬듯 담담히 제 도를 매만졌고, 남궁연은 조용히 주호 옆에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그러면 화산과 정천의 교류회를…….”
쉬이이이익-!
본격적으로 서로 간의 교류회를 시작할 찰나, 밖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주호였다.
그보다 조금 늦게 선진경이 고개를 돌렸고, 이내 저 멀리서부터 연무장 한가운데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
갑작스러운 괴한의 등장에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숙!”
선진경이 사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몇 배분 높은 고수일 터.
[상태창]
이름: 벽천양
별호: 화산괴협(華山怪俠)
직업: -
나이: 예순둘
소속: 화산파
무공: 이십사수 매화검법
경지: 초절정(八/十)
호감도: 中中
벽천양은 연무장 한가운데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전의가 번들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검절(劍節)이 누구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