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섬서성 화음현.
주호 일행이 탄 마차는 예정보다 하루 빠른 나흘 차에 화산파가 있는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구파일방 중 한 곳이 있는 도시인 만큼 하남 성읍에 밀리는 규모가 아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거미줄처럼 이어진 거리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성읍에 도착한 그들은 먼저 잠시 쉬어갈 객잔에 자리 잡았다.
일단 공식적인 방문인 만큼 화산에서도 주호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바.
원래라면 그 혼잡함에 객잔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터.
하지만 화산의 이름을 빌린 덕분에 손쉽게 좋은 자리를 점할 수 있었고, 그들이 마중을 나올 때까지 잠시 여독을 풀면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음…….”
그러던 중 주호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언가 고심에 찬 표정을 짓는 동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러느냐.”
“별것 아니에요. 제가 생각했던 모습이랑은 조금 달라서요.”
“다르다? 이곳의 모습이?”
“네. 화산파가 있는 곳이니 뭔가 조금 더 정갈한 모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회음현은 화산파의 영역.
이곳으로부터 조금 올라가면 곧바로 화산파의 본산이 나타났다. 주예향은 구파일방이나 오대 세가 쪽은 서책으로만 접했기에 그곳의 묘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모습은 정천 학관이 있는 하남과 별다른 것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해오는 듯한 표정에 주호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들 법도 하구나. 화산은 일단 도가 계열의 분파이니.”
“그렇죠?”
“허나 무림의 문파는 필연적으로 세속과 긴밀한 연을 쌓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명성이 높다 한들 그런 규모의 문파를 운영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니 말이야.”
“음, 그런가요.”
아직 그런 것들과 거리가 먼 주예향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그녀가 살짝 미간을 모은 채 인상을 찌푸리자 옆에 있던 당소혜가 씩 웃으며 그 어깨에 제 턱을 올려놓았다.
“학관을 졸업하면 당문에 올래? 그러면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사천당문?”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는지 주예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딱히 당문에 소속되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같이 경험도 쌓고, 이리저리 여행도 다니고.”
당소혜는 한 점 흑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저의에는 주호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놓으려는 속셈이 있었지만, 주예향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은 한 점 거짓 없는 생각이었다.
“…소저. 팽가의 문도 열려있소. 팽가라면 소저가 강호의 고수로 발돋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오.”
그 뒤쪽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팽우혁이 나지막한 헛기침을 내뱉고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것이라면 남궁 역시 좋지 않겠습니까. 아가씨와의 친분도 있고, 주 교관님과 깊은 인연이 있으니…….”
남궁휘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그러면 좋지 않겠냐는 뜻으로 말을 보탠 것이었으나, 곧 자신에게로 닥쳐온 두 쌍의 날카로운 시선에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팽가보단 당문이지. 그 시커먼 소굴에 어떻게 여린 향이를 보내?”
“팽가는 호쾌한 호걸들이 있는 곳이다. 시커멓기로는 당가만한 곳이 없겠지.”
“어머, 팽가는 몰라도 네 속마음은 그렇지 않잖아? 하수의 오물보다 거무튀튀… 읍!”
팽우혁은 일그러진 얼굴로 당소혜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애써 미소 지었을 따름이었다.
“하하, 소혜가 농이 짙군. 부디 오해 없길 바라오, 소저. 내 마음은 그저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니.”
“…아하하, 둘은 여전히 서로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반년 동안 학관 생활을 하면서 곧잘 보곤 했던 광경이었기에 주예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그 옆의 후기지수들도 제 각자 떠들며 이야기하는 와중 남궁연은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향이가 남궁세가에 오면 교관님도…….’
근래 주호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천우희가 사신문의 본산으로 돌아간 지 오래되었기에 둘의 만남도 오래되었을 터.
남궁연은 그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들었고, 쉬는 날이 되면 주호에게 권유해 곧잘 놀러 다니곤 했다.
물론 주예향이나 다른 이들도 함께이긴 했으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바.
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주호 쪽에서는 아직 망설이고 있는 것이 역력한 모습. 그렇다면 자신 쪽에서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되지 않는가.
“…왔군.”
그때, 주호의 시선이 계단을 향했다.
남사일은 살짝 경직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고, 다른 이들 역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화산의 무인들을 볼 수 있었다.
“사형!”
남사일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선우연 역시 눈치를 보다가 슬쩍 그 옆으로 물러섰다.
“오랜만이다.”
인자한 얼굴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남사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할 이야기가 많이 쌓인 듯했지만, 손님을 방치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바.
그렇기에 곧바로 몸을 돌려 옆에 서 있는 주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검절을 뵙소. 장문인의 대리로 마중 차 나온 선진경이라 하오.”
[상태창]
이름: 선진경
별호: 난매검(亂梅劍)
직업: 화산파 청옥당주
나이: 쉰둘
소속: 화산파
무공: 이십사수 매화검법
경지: 초절정(三/十)
호감도: 中上
선진경의 상태창을 확인한 주호는 이내 미소 지으며 그 인사에 화답했다.
“주호입니다. 난매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영광입니다.”
“하하, 그 구닥다리 별호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검절의 식견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
“구닥다리라니요. 십 년 전 감숙에서 칠곡삼흉과의 혈투는 제 세대에서 가히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과장이 아니었다.
난매검(亂梅劍) 선진경이라함은 근래 잠잠해지긴 했지만, 주호가 약관에 이르기 몇 해 전 강호에 대한 동경을 부풀리고 있을 무렵엔 온 중원을 강타하던 것이었다.
특히 감숙에서 있었던 사도맹의 절정 고수인 칠곡삼흉과의 혈전은 당시 협행을 쌓으며 강호행을 하던 매화선풍검의 이름보다 더욱 위세를 떨칠 정도였으니.
“이거 쑥스럽군. 십 년이면 벌써 옛날인데.”
선진경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작금 화산의 젊은 무인들은 남사일뿐만 아니라 화산에 망신을 준 주호까지 그리 곱게 보고 있지 않은 눈치다.
장문인이 자신을 보낸 것은 비교적 남사일과 원만한 관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세속적인 일에서 초탈했기에 딱히 주호에게 별 감정이 없었지만,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하자 은연중에 호감이 생겼다.
“그러면 곧바로 움직이겠소이까. 장문인께서 기다리신다오.”
“…장문인께서.”
그 말에 남사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 가득한 사제의 얼굴에 몇 번 어깨를 토닥거려준 선진경은 고개를 돌려 그 옆에 있던 선우연을 바라보았다.
“우연이 너도 오랜만이로구나.”
“장로님을 뵙습니다.”
“흠.”
선우연의 인사에도 선진경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폈다.
선우연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살짝 긴장하자, 그는 이내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어왔다.
“얼마 전 무림맹에 있었던 회합에서 장문인께서 널 보았다고 하셨지.”
“예, 중원에 나오셨다길래 인사드리러 갔었습니다.”
“돌아오셔서 하신 말씀이 네 성취가 제법이라고 하셨다. 허나 내가 보기에 이 정도라면 네 사형인 신룡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구나.”
“…아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선우연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무언가를 떠올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남사일에게 했던 것처럼 선우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화산을 방문한 손님들을 이리 세워둘 것은 못 할 짓이지. 화산을 대표해 정천의 명망 있는 후기지수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인 바요.”
선진경은 그 뒤쪽에 있던 다른 후기지수들에게 포권을 올리곤 곧 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달리 할 일이 남아있소?”
“바로 출발하면 될듯합니다.”
“알겠소.”
선진경이 뒤쪽에 눈짓하자 그와 함께 온 청색 무복의 무인들이 다가와 일행의 짐을 받아들었다.
‘청매화인가.’
그들의 상태창을 바라본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매화는 화산의 후기지수로 매화검수의 후보생이기도 했다.
물론 그 전부가 매화검수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 각자 실력과 적성을 판가름해 뛰어난 일부만 매화검수에 올랐고, 나머지는 화산의 각 기관으로 흩어졌다.
나이는 모두 이들과 비슷한 또래.
하지만 선우연 쪽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났을 따름이었다.
“이동하지.”
곧 주호 일행은 준비된 마차에 탑승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나갔고, 머지않아 화산파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
입구에서부터 적지 않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호가 시선을 가늘게 좁히며 그 너머를 살피자, 남사일은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은데.”
“장문인께서 하신 일이다. 화산과 얽힌 은원도 풀고 떠난 지 오래되었던 널 맞이할 겸 말이지.”
“…끄응.”
즉, 자신에게서 비롯된 일이라는 뜻이었다.
남사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자. 주호는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장문인께서는 저희에게 호의적이셨으니.”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곧 마차에서 내린 그들은 주호와 남사일을 필두로 화산파에 입성했다.
“…오.”
후기지수 중 누군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지막한 감탄을 내뱉었다.
정문부터 시작해서 두 줄로 쭉 정렬한 화산의 무인들이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그 뒤로 자리한 화산파 본산의 모습과 한여름에도 아직 저물지 않은 채 곳곳에 남아있는 매화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이곳이 왜 화산이라 불리며, 어떻게 강호를 대표하는 구파일방에 속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에 명확한 대답을 해주는 것 같았다.
“…….”
수많은 이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그 가운데, 말하지 않아도 저 너머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서 자신에게로 오라는 듯한 그 노골적인 기세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끄응.”
바로 뒤쪽에서 남사일이 신음을 흘리며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그저 이전의 은원에만 신경 쓰면 되는바.
차기 장문인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이쪽에서 그리 깊이 생각할 요소는 아니었다.
이윽고 주호는 행렬의 끝에 닿았다.
“화산에 온 것을 환영하네.”
화산의 장문인인 매화검존 선혁우가 그 가운데서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반겼다.
그 양옆으로 남사일의 스승인 매화검선 선청우를 비롯해 화산을 대표하는 명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 여러 고수가 함께 자리한바.
“…….”
슬쩍 자신의 뒤를 따라온 남사일의 표정을 보니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듯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문인을 비롯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가 많았지만, 그와 반대로 곱지 않은 분위기를 띠는 이들도 여럿 있었으니.
“주호라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호는 가볍게 그들에게 인사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