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81화 (181/300)

#181화

학관의 전반기는 순조롭게 끝을 맞이했다.

관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짐을 싼 채 정문을 나섰고, 그 때문에 하남 시내는 한동안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북적거렸을 따름이었다.

“일찍 출발하길 잘했군.”

주호는 미리 그 상황을 예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부터 매번 이 시기마다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새벽 일찍 출발할 예정을 잡았고 시내가 혼잡해지기 전에 두 대의 마차에 나누어 화산으로 향했다.

“닷새 정도 걸린다고 했나요?”

“날이 좋으니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화산이라. 매화꽃이 잔뜩 피어있겠죠?”

“글쎄. 매화는 봄과 함께 피어났다가 저무는 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군.”

주호 맞은편에 앉은 주예향은 살짝 들뜬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로선 사신문을 제외하고 다른 문파에 가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제법 흥분되는 일이었다.

더욱이, 어중간한 곳도 아니고 구파일방 중 한 곳인 화산파가 아니던가.

강호인의 꿈을 키우며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인지라 그 호기심도 컸다.

“하하, 화산은 고도가 높아 지상보다 매화가 늦게 피고 진단다. 아직 그 위쪽은 봉오리에 꽃이 맺혀 있겠지.”

주호 옆에 앉아있던 남사일이 짐짓 자랑스럽다는 듯 말해왔다.

비록 모종의 일로 10년이 넘도록 화산을 등졌다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사문.

그러니 그것을 말하는 대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장관이었죠. 마치 수목원에 온 듯한 기분이었어요.”

당소혜 역시 이전에 화산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작게 미소 짓자, 주예향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그렇게 예뻤어?”

“응. 마음 같아선 매해 꽃놀이하러 가고 싶었는데, 그럴 상황이 되지 않았으니까.”

“아…….”

“그래도 이젠 괜찮아졌잖아. 이때까지 못 했으니 올해부터 가면 되는 거지. 향이 너랑 교관님이랑 다른 분들도 같이.”

“그렇네.”

주호는 그런 두 소녀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인원이 많기에 필연적으로 마차를 두 대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주호 쪽에는 총 다섯으로 주호와 남사일, 그리고 주예향과 당소혜, 마지막으로 남궁연이 탑승해 있었다.

“…….”

남궁연은 출발 직후부터 이때까지 줄곧 두 눈을 감은 채 등을 꼿꼿이 핀 자세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전날 그간 수련의 성과를 입증하기 위해 있었던 자리에서 주호와의 대련을 끊임없이 뇌리에 되새기고 있었다.

아직 그 체득이 끝나지 않았기에 출발 전에 일행의 양해를 구한바.

주예향이나 당소혜나 처음인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소리를 죽였지만, 무서울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 집중력에 지금은 곧잘 떠들곤 했다.

“…그나저나 저 아이들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아있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남사일은 뒤따라오는 마차를 바라보며 슬쩍 그에게 물었다.

전반기의 마지막 날이고 화산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닌가.

보통의 후기지수라면 눈앞의 주예향처럼 들뜨다 못해 신이 나야 정상이거늘, 그들의 분위기는 마치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위천강이라고 기억하십니까. 수려하게 생긴 귀공자 같은 외모의 후기지수인데.”

“잘 아네. 학관에선 풍류 공자라 불린다지. 그러고 보니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본가에 문제가 생겨 며칠 전에 낙향했습니다. 급한 일인 터라 저들과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게 됐지요.”

“그런 것인가. 침울해할 만도 하군.”

남사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들과 몇 번 여정을 함께 하지 않았는가. 후기지수들의 관계가 돈독했던 것을 알기에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나저나 일급 교관 일은 어땠나. 전반기에는 특별한 일이 없어 부담이 덜했어도 갑작스럽게 앉은 자리라 조금 거북했을 텐데.”

“처음엔 그런 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만, 잡무가 사라져서 오히려 편하더군요.”

“하하하, 그건 그렇지.”

남사일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천 학관의 일급 교관이라함은 어지간한 문파에 가서도 대접을 받을 직분이었다.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그 자리에 올랐음에도 저리 소탈한 감상이라니. 더없이 주호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 사급 교관들을 보게나.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아서 족히 한 주는 더 묶여 있어야 할 것 같더군.”

“그렇지 않아도 출발 전에 한 투정 들었습니다.”

“불만이면 자네처럼 승진해야지 별수 있겠나.”

남사일은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말했지만, 주호는 그를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긴장되십니까.”

“긴장은 무슨.”

남사일은 괜한 소리 하지 말라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하지만 주호가 계속해서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자,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티가 많이 나는가?”

“잘 숨기셨습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겠지요.”

“그것참 다행인 소리군.”

남사일은 툴툴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되는가? 저번에는 자소단의 일로 머리에 피가 끓어올라 무작정 갔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니 복잡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네.”

“저 혼자 뭘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주호가 어깨를 으쓱이자 남사일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장문인을 비롯한 수뇌부는 어떻게든 매화선풍검이라는 이름을 품에 안으려 애썼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 역시 다수 있었다.

매화검수장인 조원일도 그랬고, 특히 젊은 신진 고수들이 보는 시선 또한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잘하실 겁니다, 선배님은.”

“나도 자네처럼 확언할 수 있으면 좋겠네. 벌써 속이 쓰리군. 장문인과 내 스승님은 호의적일 테지만, 그 밑의 제자들은 지금도 불만을 거두지 않고 있으니 말이야. 보나 마나 이상한 명분을 운운하며 비무를 신청해오겠지.”

“장문인의 손님으로 가는 저희도 있는데 설마 그리하겠습니까.”

“그러니 더 그럴 수 있겠지.”

남사일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명문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고고한 척하지만, 제 자리를 위협하거나 자존심이 상한다면 기를 쓰고 상대를 꺾으려 하는 것이 그들의 본성일세.”

“그렇습니까.”

“특히나 매화검수장이 자네에게 망신을 당하지 않았나. 겉으로는 티를 내진 않겠으나, 설욕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이들도 분명 있겠지.”

“하하.”

주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매화선풍검이라 불리는 강호의 명사(名士)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서로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주예향과 당소혜 역시 살짝 깼다는 시선으로 바라봐왔지만, 남사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무언가 시커먼 어둠이 깃든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라도 그래온다면 차라리 작살을 내주게. 힘의 격차를 보여준다면 그들도 쉬이 움직이지 못하겠지.”

“…참고하겠습니다.”

주호로서는 그저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였다.

***

앞쪽의 마차와 달리 뒤쪽의 마차는 고요하기 그지없다.

천후와 철대환의 말수는 평소와 같은 것이었지만, 원래라면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갔을 터인 선우연과 당천유가 입을 다물자 침묵만이 감돌았다.

“…….”

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던 남궁휘는 좌불안석이었다.

물론 이 분위기의 이유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학관 내에서 풍류 공자라 불리는 위천강이 그들에게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언제까지 이런 무거운 공기 가운데 있는 것도 버거웠기에 간간이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넉살 좋은 태도로 입을 열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짧은 대답이나, 그래서 어쩌라는 듯의 시선뿐이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유일한 동기인 팽우혁조차 학관을 출발할 때부터 뚱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지 않은가.

“…자네, 왜 그러는가.”

숨 막힐 듯한 분위기에 결국 굴복하고만 남궁휘는 제 친우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물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기에 심통이 난 것인가.

위천강 선배의 일 때문인가 싶었지만, 팽우혁은 그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가벼운 부류는 싫어하는 축에 속할 터.

“휘.”

팽우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앞서 나가는 마차 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건 뭔가 잘못된 처사가 아닌가?”

“…무엇이?”

대체 무엇이 잘못된 처사란 말인가.

남궁휘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팽우혁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째서 저 마차로 여성진이 다 몰려간 것이냐는 말일세.”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이때까지 꽁한 표정으로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인가.”

“겨우 그런 이유라니.”

팽우혁은 인상을 쓰며 제 친우를 바라보았다.

기껏 주예향과 거리를 좁힐 기회를 얻었다.

화산까지 대략 닷새 정도 걸리는 거리니, 며칠간 밤을 새워가며 그동안 나눌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왔거늘 설마 자리조차 같이 앉을 수 없다니 그저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땀내나는 우리랑은 같이 가기는 싫다는 소린가.”

악비산이 씩 웃으며 묻자 팽우혁과 남궁휘는 황급히 고개를 들며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단지?”

“…끙.”

팽우혁은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그저 앓는 소리만을 냈다.

그가 이미 주예향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기에, 악비산은 놀리듯 말을 이었다.

“보통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나 오라버니보다 강한 남자에게 끌린다지.”

“…정말입니까?”

팽우혁의 물음에 그 옆에 앉아있던 당천유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 쪽도 마찬가지니. 누군가 소혜를 데려가려면 날 넘어서야 할 것이야.”

다분히 누군가를 의식한 말이었다.

남궁휘는 그 살벌한 기세에 움찔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스리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보다 강하다, 라.”

악비산의 말을 곱씹던 팽우혁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많긴 했지만, 고작 스물여섯의 나이로 이기어검을 사용하는 고수와 어떻게 넘어서란 말인가.

당장 자신의 아버지만 하더라도 스물다섯의 나이에 절정에 들었으며 서른 중반에 이르러 초절정에 도달했다.

입신지경의 벽에 다다른 것은 쉰이 넘었을 때의 일. 그마저도 유례없는 성취라며 도제(刀帝)라는 이름으로 칭송받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자신이 뛰면서 발악해봤자 그 발끝조차 따라가긴 어려워 보였다.

“…뭐, 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여기 있는 이들은 다 한 번씩 쓴맛을 봤으니까.”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선우연 역시 굳은 표정을 풀곤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 휘하에 있던 후기지수들은 다 한 번씩 남궁연에게 마음을 품었던 바가 있었다.

하지만 절대 오르지 못할 산이었기에 지금은 그저 한 명의 무인으로서 존중하고 있을 뿐.

“…….”

한쪽 구석에서 그 말에 공감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던 천후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했던 건,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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