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이른 새벽 선우연은 여느 때처럼 아침 수련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그의 옆방은 위천강이었다. 그렇기에 잠시 그 앞에 기다리며 몸을 풀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한참이 지나도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네, 아직도 자는가?”
선우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안을 향해 물었다.
전날 자정이 조금 넘어 방을 나가는 기척이 있었다. 설령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고 한들 듣지 못할 리가 없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련을 빼먹을 이가 아닌데.”
위천강은 겉으로는 풍류 공자니, 뭐니 하며 껄렁거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누구보다 수련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은 일 년간 붙어 다녔던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잠시간 우두커니 그 앞을 서성이던 중, 문득 무언가 좋지 않은 기시감이 들었다.
“…자네, 잠시 실례하겠네.”
선우연은 한 소리 들을 것을 각오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본래라면 굳게 잠겨있어야 할 그것이 너무나도 손쉽게 열리자 그는 경직된 표정으로 문을 밀어내며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천강?”
나지막한 목소리로 친우의 이름을 부르며 방안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하지만 그 내부는 적막에 잠겨있었고, 인적이라곤 코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
선우연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방안의 모습은 익숙했다. 마치, 마치 처음 입관했을 때의 그 정리된 모습이 아닌가.
그는 이전에도 몇 번 위천강의 방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벽이며 탁자 위며 제 친우의 수집품으로 빼곡히 뒤덮여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애초에 누가 살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벌컥-!
황급히 방을 나선 뒤 그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자신들 전용이 되어버린 수련장 위로 여러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우연은 그 안으로 들어가자니 위천강과 자신을 제외한 이들이 벌써 한 자리에 모여 수련 중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네, 늦었군. 전날 음주라도 한 건가.”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닦아낸 당천유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로서는 평소와 같이 농을 던진 것이었지만, 험악한 기세가 깃들어있는 선우연의 얼굴을 보곤 움찔하며 손끝을 살짝 떨었다.
‘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이 정도 농은 평상시에도 곧잘 주고받던 수준이 아닌가.
잠을 설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있던 것인지 그 얼굴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당천유가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나 싶어 고민하고 있을 찰나, 선우연은 성큼성큼 그 앞으로 걸어와 물었다.
“자네, 혹시 천강이 그 친구가 어디 간 줄 아는가?”
“…어디를 간다고?”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선우연은 망설임 없이 시선을 돌려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던 친우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가.”
한창 거센 기세로 창을 휘두르던 악비산이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선우연은 잠시 망설였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데 괜히 혼자 난리를 피우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다들 혹시 어젯밤 이후로 천강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네.”
“외박이라도 한 것 아닌가?”
“내가 고작 그런 걸로 이리 호들갑을 떨겠는가. 천유, 자네도 그 방에 들어가 봤으니 알겠지. 그의 취미가 이런저런 물건을 수집하는 것임을.”
“알고 있네. 천년 묵은 원목이나 벼락 맞은 바위 같은 해괴한 걸 좋아했었지.”
당천유가 살짝 웃음을 토해내며 대답하자, 선우연은 한층 더 침중해진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 모든 것이 깔끔하게 사라졌네. 마치 그 방에 처음부터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전부다?”
“그래. 그 친구의 마음이 내켜 제 수집품을 처분했다고 쳐도 다른 물건들까지 버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비록, 학관의 일정이 내일로 끝이라고 할지라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선우연은 이제야 자신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심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호들갑이기를 바랬다.
연무장 한구석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단련 중이었거나, 그마저도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밤새 술을 마셔서 늦었노라 말해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요새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지.”
철대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왔다.
“평상시엔 말이 많았기에 확연하게 느껴졌다네. 자네들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보니 그렇군.”
“저는 그 나름대로 정신을 차린 거로 생각했어요.”
천후나 남궁연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천강, 그의 출신이 분명 신강이라 했었지.”
악비산은 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근래 마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탓에 그 주위가 어수선하다고 했었다.
위천강의 사문은 분명 신강에 자리한 중소문파. 필연적으로 그들 역시 그 여파를 겪고 있을 터.
“…설마 그것 때문에 갑작스럽게 떠났다던가?”
“그렇다 한들 우리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이리 순식간에 떠날 이유가 있는가.”
“그것도 그렇긴 하지.”
“누구, 그의 사문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이가 있나?”
선우연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리 큰 규모가 아니라고만 했지 이름은 말하지 않았네.”
“나도 그리 들었군.”
악비산과 천후가 그리 확언하자 선우연은 입술을 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교관님이라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호라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그는 몸을 돌렸고, 제 친우들이 부르는 가운데서도 거의 달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아, 선배님 안녕하십…….”
길을 가던 도중 마주친 팽우혁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지만, 선우연은 듣지 못한 듯 횅하니 그를 지나쳐 갔다.
“…….”
팽우혁의 몸이 경직되었다.
화산의 소신룡이라 함은 평소에 흠모하고 있던바. 지금에 와선 주호 다음으로 존경하는 고수였기에 먼저 나서서 인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들을 가치도 없다는 것인지 시선조차 두지 않고 지나가 버린 선우연의 모습에 내심 충격을 받았다.
“자네, 저 선배 표정 봤는가?”
“…표정?”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벌하더군. 차라리 무시당한 것이 다행일 수도 있겠어.”
팽우혁은 가느다란 시선으로 제 옆에 선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위로하기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인가 의심했지만, 살짝 긴장했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여오는 그의 모습에 정말로 사실을 말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선배님이 날 무시할 리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면 팽우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나름대로 중요한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
주호는 일찍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제 집무실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내일부로 화산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남사일 본인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
그렇기에 화산으로 돌아가 정면으로 결판을 보겠다는 그 결심엔 변함이 없어 보였다.
“…후.”
주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활짝 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름에 한층 다가선 날씨는 아직 시간이 이름에도 불구하고 공기를 뜨겁게 달구며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낙성곡의 풍경이 못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위천강.
천마신교의 소교주로 처음 자신의 밑에 들였을 때는 이리 정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마교의 정보를 흘리거나 정세를 파악하는 창구로만 여겼을 뿐.
하지만 그 끄트머리에선 많은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정말로 정이라도 든 것인지.’
주호는 쓴웃음을 머금으면서도 손을 놀렸다. 내일 있을 화산행을 위해서라도 남은 업무는 오늘 중에 끝내놓아야 했으니.
타다다닥-.
그때, 그의 귓가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내 집무실의 문 앞에 멈춰서더니, 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관님, 선우연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끼익-.
주호가 가볍게 손을 까딱이자,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문이 저절로 열린다. 선우연은 그 고절한 수법에 움찔하면서도 안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위천강의 일로 왔는가.”
“…정말로 떠난 겁니까?”
자신이 묻기도 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선우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짧은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았기에 주호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앞의 탁자로 선우연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그의 고향은 신강이다.”
“…예. 작은 무가의 출신이라 했습니다.”
“너도 알고 있다시피 근래 그쪽 상황이 심상치 않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위천강의 가문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간밤에 연락이 있었다더군. 그렇기에 급히 낙향을 결정하고 떠나간 것이다.”
“…….”
위천강이 둘러대 달라고 한 이야기는 그럴듯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연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급박하다고 해도 한두 마디 언질을 주지 못할 정도였습니까.”
“걱정시키기 싫었겠지.”
“…….”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그의 몸이 움찔했다.
“당천유의 경우를 옆에서 봤지 않느냐. 그가 자신의 가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으면 너희는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고 싶어 발 벗고 나섰겠지.”
“그렇다 한들…….”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하더라도 부담이 되는 것이지.”
주호는 침중함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그의 아버지나, 혹은 다른 가족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없, 습니다.”
“앞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다. 위천강이 나름대로 정해둔 선이지. 매정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바꿔 생각하자면 너희가 불필요한 신경을 쏟지 않게끔 했다고 할 수 있겠군.”
깊게 파고들면 궤변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선우연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짧게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날 찾아오리라는 것도 예상하였다. 말없이 사라지게 돼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하더군.”
“…언제 돌아오는 것인지조차 기약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지금까지 그럴듯하게 대답하던 주호였지만, 그때만큼은 둘러댈 수 없었다.
천마신교의 발호, 그리고 중원과의 전쟁.
혈천신교를 둘째 치더라도 이때까지의 강호 역사 중 상당 부분을 차지 않았는가.
한 번 일어날 때마다 수천, 수만이 죽고 그 난세가 몇 년이나 지속되는 일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실례가 많았습니다.”
선우연은 풀이 죽은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떠나갔다.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도 못 할 노릇이군.”
저들이 위천강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심히 걱정되는 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