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마지막 가르침을 주마, 검을 들어라.”
위천강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 허상과도 같은 관계의 종착지로는 그리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위천강은 낙성곡을 등짐으로서 주호 앞에 섰고, 이내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긴장되는군요. 무려 일 년 반만의 증명이라니.”
“너도 답답하지 않았더냐. 강호 제일을 앞다투는 신공 절학을 익히고서도 쓰지 못하는 신세라니.”
“…알아주시는군요.”
주호의 말에 위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위천강은 풍류 공자라는 별호답게 학관 내에 다른 이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고, 그 가운데 여러 인간 군상을 만났다.
간혹 자신이 익힌 무공, 혹은 자신의 가문에 큰 자부심을 지닌 이가 있었다.
물론 위천강의 시선에 보자면 전부 같잖을 따름이었지만, 티를 낼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쓴웃음만 지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무공 가운데 당연히 천마신공이 제일이다.’
주호도 신공 절학을 익혔다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만약 그와 같은 수준이었더라면 틀림없이 승기를 가져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합격 기준이라도 있습니까.”
“글쎄. 이전에 했던 것처럼 내게 닿으면 성공이라 보겠느냐.”
“…혹시 제가 뭐 기분 나쁘게 해드린 거라도 있습니까?”
위천강은 제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이전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은 주제 파악의 객관화가 끝나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바.
주호는 씩 웃으며 검을 쥐었다.
“마교의 소교주가 약한 소리를 하는구나.”
“상대가 상대여야 큰소리를 칠 것 아닙니까.”
“어설프게 보인다면 잡아다가 무림맹에 넘길 것이다.”
“…제발 그런 농담 좀 안 하시면 안 됩니까.”
위천강 역시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처음은 천마신공이 아닌, 그가 강호로 나와 요긴하게 써먹었던 무공인 무월십이검(無月十二劍)이었다.
파아앗-!
선명한 내공의 잔향이 검 위로 피어오른다. 이윽고 위천강의 신형이 공간을 꿰뚫고 솟구쳤을 때, 주호는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캉-!
부딪친 두 자루의 검 위로 선명한 검기가 넘실거렸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이내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 어지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월십이검(無月十二劍)
일월(日月), 화마의 달.
과거의 싸움에서 위천강이 제일 처음으로 사용했던 초식이 다시금 이 자리에 펼쳐졌다.
하지만 작금 검 위로 피어오르는 그 확연한 불꽃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정적이었다.
쉬아아아악-!
위천강의 검이 매서운 기세를 발했다.
요 일 년 반 동안 대련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했던 그다. 그렇기에 주호의 빈틈을 읽어냈고 그 왼쪽 옆구리를 날카롭게 찔러 갔다.
그그그극-!
물론 주호 역시 손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그는 신검의 검등을 세워 위천강의 검을 받아냈고, 발을 들어 위천강의 빈 가슴팍을 걷어찼다.
“…큭!”
“초식의 위력은 강맹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몸쪽이 비어버린다. 네 검이 일격에 적의 목숨을 끊어낸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조금 전처럼 치명적인 틈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
위천강은 이를 악물고 발을 내디뎠다.
얻어맞은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주춤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일월이 이월에 다다르고, 이월이 삼월이 되었다.
사월, 오월, 유월…….
무월십이검의 초식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내 그 정수가 극의에 달해 십삼 초식인 무월(無月)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주호의 진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우웅-.
이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파동이 어둠 가운데 울려 퍼졌다.
몇 번 보지 못한 초식이었지만, 위천강은 그것이 자신의 모든 공격을 짓눌렀던 무지막지한 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현검.”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주호로서는 오랜만에 펼치는 초식이었다.
입신지경에 이른 그는 점차 초식의 형을 탈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자들과 대련할 때를 제외하곤 초식의 수련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제된 초식은 이전보다 한층 더 무거운 기세를 내뿜었고, 주위의 땅을 짓밟으며 그 위에 선 위천강을 압박했다.
“끄으윽-!”
위천강은 이를 악문 채 자신을 짓누르는 그 힘을 견뎌냈다.
아무리 무월십이검이 천마신공 같은 신공 절학이 아니라곤 하나, 한 초식 정도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감히 비교하기도 부끄러울 수준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다시 검을 다잡았다.
파아아앗-!
어둠의 색을 품은 마화(魔火)가 위천강의 전신으로 피어올랐다. 그것은 일 년 전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농밀해졌고, 더욱 거센 기세로 타오르며 주변을 장악했다.
천마의 독문 무공.
천마신공(天魔神功).
만마(萬魔)를 아우르는 절대 신공이 위천강에게서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적-.
천마신공의 기운과 현검(絃劍)의 힘이 충돌하며 땅 위로 깊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하아아아아아-!”
위천강은 기합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뱉어냈고, 그 끝에서 현검의 기운을 훑어버리며 승리를 쟁취해낼 수 있었다.
“…….”
주호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동자가 시커먼 흑염으로 불타올랐다.
치켜든 검 위로 짙은 마기가 뒤덮였고, 이내 위천강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으로 땅을 박찼다.
타다다닷-!
주호 역시 그에 호응하듯 달려나가며 검을 나눴다.
서로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거친 광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낙성곡의 절벽이 들썩였지만, 그 둘은 이미 대련에 흠뻑 빠져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더 끌어올려라! 네 천마신공은 겨우 그 정도에 그치느냐!”
주호는 도발하는 말을 내뱉으며 위천강을 자극했다.
평화의 아성에 젖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예상보다 살짝 미치지 못하는 힘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로 자극해도 막힌 둑이 터지지 않았기에 주호는 스산한 표정을 지었다.
“…어림없다. 작년의 너는 분명 지금보다 못한 기세지만, 그 패기만은 압도적이었다.”
파아아앗-!
주호의 검 위로 시퍼런 검기가 휘몰아쳤다.
말로서 알아듣지 못하니 직접 그 몸에 자극을 새겨줄 생각이었다.
쉬이이이익-!
수십 줄기의 검기가 허공에 난무했다.
“씨팔-!”
위천강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의 수준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살벌한 것이었다.
파바바밧-!
위천강의 검이 허공을 가득 채운다. 선이 모여 면을 이루었고, 면이 모여 막을 이루었다.
절정에 달한 검막이었다.
그것은 위태로이 출렁거리면서도 쏟아지는 검기의 비를 막아냈고, 이내 목적을 끝마치고는 허공으로 다시 흩어져갔다.
“허억, 허억…….”
위천강은 더 앞으로 달려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
이마를 타고 뜨끈한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것을 훑으니 찐득하고 축축한 피가 그 위에 묻어나왔다.
오랜만에 맡는 짙은 혈향이었다.
그 피 냄새는 위천강의 본능을 자극했고, 친우들과 어울려 지내느라 억눌러있던 본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래, 해보자는 거지요.”
위천강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검대에 매인 검집에 검을 수납했고, 몸의 무게중심을 기울여 살짝 낮춘 채 사선 상에 주호를 올려놓았다.
천마검식(天魔劍式)
일식(一式) 극마(極魔)
극에 이른 발검술이었다.
뽑혀 나온 검은 이미 최고 속도에 달해있었다.
어둠과 공간도 그 검날을 피해내지 못했다. 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경로의 모든 것이 베어졌고, 그 끝에 있던 주호를 목표로 맹렬히 나아갔다.
“정말로, 오랜만이군.”
주호는 씩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청룡신공(靑龍神功)
멸천(滅天)
청룡신공에서 가장 패도적이자, 작년 그 싸움 당시에도 쌍벽을 이룬 최강의 초식.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그들 중심으로 뿜어지며 주위에 있던 모든 것을 휩쓸었다.
위천강은 그 결과를 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또 다시 공멸(共滅)인가.’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옛날과 달랐다.
발검된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고, 그대로 상단 베기의 자세로 다음 초식을 이어나갔다.
천마검식(天魔劍式)
이식(二式) 탈마(奪魔)
내공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천마신공의 무공은 그 하나하나가 막대한 소모를 필요로 하는바.
물론, 그만큼의 위력을 냈기에 아깝지 않을 따름이었다.
쉬이이이익-!
하늘 위로 어둠이 떨어져 내렸다.
검강에 가까울 정도로 농밀한 검기의 집합. 그것은 쏟아지는 폭우가 되어 주호의 사방을 두들겼다.
“……!”
위천강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서로 간의 경지에 차이가 크게 나긴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천마신공은 최강의 무공.
얼마의 경지를 뛰어넘고 그 윗선의 고수에게 타격을 주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교관님!”
지진이라도 난 듯 떨어져 내리던 폭우가 끝난 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가운데 위천강은 살짝 목소리를 떨며 그를 불렀다.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흘렀고, 자욱했던 먼지를 걷어내며 여전히 건재한 주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가 당할 줄 알았더냐.”
“…후. 괜찮으시면 괜찮으시다고 빨리 말씀해주십시오.”
그 말에 주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과연 천마신공의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위력이었다.
원래는 그에 맞서 검을 휘두르거나 검막을 펼쳐 막아내려 했지만, 문득 그 위력을 몸으로 실감하고 싶어졌다.
그렇기에 호신강기를 둘렀고, 쏟아지는 폭우에 몸을 맡긴 것이었다.
“오너라. 천마신공의 검식이 고작 이 초식으로 끝나진 않겠지.”
“…가겠습니다.”
위천강은 조용히 제 기운을 가다듬었다.
세 번째 초식이자, 마지막 초식은 아직 그로서도 제대로 펼치기 어려운바.
그렇기에 잠시 뜸을 들였고,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천마검식(天魔劍式)
삼식(三式) 신마(神魔)
‘과연.’
주호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천강의 검을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일식 극마는 선(線)이었다.
발검을 이용해 그 위력을 극대화했고, 오롯이 직선의 대상을 목표로 노렸다.
이식 탈마는 면(面)이었다.
검기의 비, 두 개의 축만 사용하던 일식에 높이라는 새로운 축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삼식 신마는 얼핏 보면 그 모든 것과 동떨어진 개념이었다.
공간 자체를 허물어뜨리며 그 경로상에 있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무지막지한 모습이었으니.
보통의 인지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막아낼 방법조차 찾지 못한 채 그것에 휘말려 갈가리 찢어지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주호는 천천히 검을 놓았다.
그것은 곧 누가 쥐지 않았음에도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 끝이 위천강을 향해 겨눠졌다.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아라. 이것이 지금 당장 네가 목표로 해야 할 경지이니.”
우우웅-.
작열하는 빛이 신검 위에 피어오른다. 그것은 이내 일 점이 되었고, 기나긴 궤적의 꼬리를 물며 허공을 꿰뚫었다.
“…….”
위천강은 주호의 말대로 멍하니 두 눈을 뜨고만 있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그것이 어떻게 신마를 파훼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모든 것이 어그러졌고, 이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을 뿐이었다.
푹.
신검이 힘을 잃고 땅에 박혀 들었다.
천천히 그 앞까지 다가선 주호는 검을 회수했고, 멍하니 있던 위천강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 가르침은 이것으로 끝이다. 허나, 네 길은 이제부터 시작이겠지. 끊임없이 정진하도록 하여라.”
하산(下山)을 고하는 말이었다.
위천강은 이내 정신을 차렸고, 조용히 검을 거두었다.
그러곤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공손한 자세로 절을 올렸다.
부모와 스승에게만 취한다는 계수 배였다.
비록 학관이란 명목에 묶인 관계였지만, 그에게 있어 큰 영향을 준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
주호는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청명한 만월이 짙은 구름에 잠깐 가려졌다 나왔을 때, 낙성곡에 어린 그림자는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