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78화 (178/300)

#178화

낙성곡(落星谷).

이름 그대로 별이 떨어져 내려 생겼다 하여 생긴 골짜기란 뜻이었다.

축시에 이르러 밤은 깊었지만, 하늘 위로 청명한 빛을 뿜는 만월이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어 그리 어둡진 않았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라 간간이 산짐승들이 돌아다니는 소리만이 고요한 적막을 채웠다.

하지만 오늘은 느닷없는 불청객의 방문이 있었다.

“…….”

주호는 천천히 낙성곡의 골짜기를 둘러보았다.

완연했던 봄 날씨는 이미 끝이 났다. 벌써 초여름에 접어들어 태양 빛이 뜨거웠지만, 아직 그 열기는 밤공기를 데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그곳을 거닐었고, 이내 벼랑 끝에 다다라 달을 올려다보았다.

탁.

누군가 의도적으로 낸 발걸음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주호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점차 모습을 드러낸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흑의에 시커먼 복면을 착용한 괴한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주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오랜만이로구나.”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복면을 벗은 위천강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태창]

이름: 위천강

별호: 소천마(少天魔)

직업: 천마신교 소교주

나이: 스물하나

소속: 천마신교

경지: 절정(二/十)

무공: 천마신공

잠재력: 上中

호감도: 上中

일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확연한 성취였다.

초일류 초입에 불과하던 그 경지는 어느덧 절정의 벽을 허물고 그 위에 올랐다.

지금 위천강의 경지는 주호가 막 비동에 나왔을 당시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물론, 그 성장세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과연 천마신교의 소교주라 할 수 있는 재능이었다.

“슬슬 이리될 거란 것도 예상했지.”

“혹시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당연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에 위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름대로 잘 숨기며 연기했다고 생각했거늘 한 눈에 간파당하고 말았는가.

하지만 동시에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절 두고 보셨습니까. 천마신교의 소교주를 사로잡거나 죽인다면 큰 공적일 텐데. 더군다나 작금은 전쟁을 목전에 둔 상황이 아닙니까.”

“…혼자 왔구나.”

주호는 위천강의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그 뒤를 바라보았다.

초목이 무성한 낙성곡의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 너머에 느껴지는 기척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정말로 혼자 이곳에 자신을 불러내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차피 혼자 오나 몰려오나 교관님 일 검에 쓸려나가는 건 같을 테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위천강은 주호가 자신을 사로잡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굳이 이때까지 놓아주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했으니 그럴 기회는 차고 넘쳤을 터.

“잠시 걷겠느냐.”

“…안 될 것은 없지요.”

그들은 곧 낙성곡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위천강은 주호의 옆을 함께 걸으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중원의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제 천마신교가 본격적으로 웅크렸던 몸을 일으킨다면 천지는 전화(戰火)에 잠기게 된다. 그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호기심, 말입니까.”

“그래. 교관으로 일하게 된 해에 관생으로 마교의 소교주가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으니. 마교가 전쟁을 일으키리라 생각하진 못했지만, 가까이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에 관한 것을 알아내려 했다.”

“…평범한 사람이 하긴 힘든 생각이군요.”

위천강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무공에 자신이 있다 할지라도 본교와 척을 지는 일은 보통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지만 주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월영사신이라고는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설마?”

“학관에 들어오기 전에 한동안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를 부수며 돌아다녔지.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어.”

고작 절정의 경지로 천하제일인이 된 것처럼 자만하지 않았는가.

조금이라도 발목을 잡히거나, 마교나 사도맹 측에서 더 강한 고수를 보내왔다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을 터.

“본교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던 이름입니다. 더 피해가 커지기 전에 고수를 보내 해결하려던 찰나에 흔적이 끊겨 다들 분통을 터트렸는데, 설마 교관님이 그 본인일 줄은…….”

“이쪽도 나름대로 대의가 있었으니까.”

비동혈사에 희생당한 동료들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그것까지 말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젓자, 위천강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이들도 저에 대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한 명도.”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

“…그렇습니까.”

“원래 공적은 독식해야 하는 법이지. 알맞게 여물면 취하려 했다.”

“거, 살벌한 소리를.”

위천강은 슬쩍 주호를 바라보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랐기에 내심 긴장했지만, 그 가벼운 태도에 겨우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야말로 어떻게 느꼈지?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겪었던 중원에서의 삶은.”

“이쪽에서의 삶 말입니까.”

위천강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낙성곡의 끝이 머지않았다. 그렇기에 앞서 나가던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저 역시 시작은 호기심이었습니다. 본교에도 정천이나 천무 같은 교육 기관인 마학관이 있었지요. 원래는 그곳에 갈 예정이었으나, 차기 교주로서 중원을 경험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려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정천에 왔다?”

“예. 솔직히 길어봐야 반년이라 생각했습니다. 서로 살아온 환경도, 사상도, 생각도 다르니. 실제로 입관 심사에서 교관님과 그렇게 다투지 않았습니까.”

위천강은 일 년도 더 전의 어느 날을 회상했다.

남궁연과의 만남이 시작이었다.

제 외모를 믿고 그녀에게 치근덕대다가 주호에게 얻어맞고 추하게 뻗어버렸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로서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주호를 찾으며 복수하기 위해 벼루고 벼루던 중 우연히 심사관으로 배정되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결과는 전과 그리 다르지 않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나중엔 밤 중에 찾아가서 전력으로 싸웠어도 패퇴하고 말았지요.”

“대단한 기세였지. 과연 천마신공이라 할 수 있었다.”

“…교관님께선 대체 무슨 무공을 익히신 겁니까.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건.”

“내 쪽도 신공이라 불리는 무공을 익혔다. 천마신공과 쌍벽을 이룬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아니, 오히려 내 쪽이 더 경악스러웠다. 서로 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그러한 결과가 나왔으니.”

“손속에 사정을 두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했지.”

어찌 보면 아찔했던 기억이었다.

주호가 조금 더 냉철하고 단호한 성격이었더라면 자신은 무림맹 뇌옥에 갇혀 있거나, 싸늘한 주검이 되어 썩어갔을 테니.

“처음엔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마도와 정도. 서로 정반대에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소위 명문이라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 제가 그랬던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무시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더군요.”

위천강은 두 눈을 감았다.

남궁연, 선우연, 당천유, 악비산, 철대환, 그리고 천후까지.

익숙한 얼굴들이 그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만남으로 제 재능을 최고로 여기던 자부심이 박살 났고, 정파에 대한 선입견도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만일, 저를 밑에 두신 의도가 그러한 것을 알려주시려고 한 것이라면.”

위천강은 두 눈을 뜨고 주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솔직히 교관님과 단둘만 있으니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아쉽습니다. 제가 마교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무가에서 나고 자랐다면 이후에도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욕심이군.”

“네. 과분할 정도로 비참한 욕심이지요.”

굳이 그렇게까지 꼬집을 것이 있냐며 위천강은 제 발밑에 있던 돌을 툭 찼다.

바닥을 굴러간 그것이 절벽 너머 저 밑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그는 착잡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아주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천마(天魔)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호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위천강은 입술을 씹으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곤 생각했지요. 그것이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도래할 줄은 몰랐지만.”

“네 말 대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온 중원이 전화에 휩싸일 겁니다. 마교의 저력은… 저들로서는 막아낼 수 없을 겁니다.”

“길었던 역사 가운데 전쟁을 일으킨 마인들은 항상 그리 말했지.”

“하지만, 이번은 정말로 다를 겁니다.”

위천강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마교의 위세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은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정파인이 다 되었군.”

“귀화한다면 받아주실 겁니까.”

“맹주께서 발 벗고 뛰쳐나오실 거다. 마교의 소교주면 받들어 모시겠지. 소림의 방장도 환영하지 않을까.”

위천강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하건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제 친우들과 보냈던 기억들이 더 생생히 떠오르는 듯했다.

“제가 누군지 알게 된다면 그들은 실망을 많이 하겠지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냐.”

“어찌 되었든 그들을 기만한 건 접니다. 구구절절한 말로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네가 그리 선택하겠다면, 나 역시 함구해주마.”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정이라도 들었나 보지.”

“저는 마인(魔人)입니다.”

“동시에 내 제자지.”

“천마신교의 소교주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천마의 자리에 앉아 교를 이끌어나가겠지요.”

“먼 미래의 이야기로군. 네 아버지께서는 아직 정정하지 않으시더냐. 손수 병력을 이끌며 전쟁을 일으키실 정도로.”

“…수많은 정도의 고수가 제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도에 선 이상, 그것은 필연적인 이야기겠지요.”

“애초에 서로 다른 길에 서 있었다. 그딴 숙명 따위를 탓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것 또한 네 삶이니. 그렇지만.”

주호는 고개를 들어 시퍼런 귀화가 깃든 눈으로 위천강을 바라보았다.

“너 역시 무인이라면 네 가슴 속에 의와 협이 있을 터. 비록 마도(魔道)를 걷는다고 할지라도 난 그리 믿는다. 그러니 너는 네가 믿는 의와 협을 따라 걸어가도록 해라.”

위천강은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으며 솟구치는 무언가를 참았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던 그 시선은 이내 주호를 향했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끝까지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원래는 소일거리로 생각해서 맡은 것이지만, 교관 일이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더군.”

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둘은 어느덧 낙성곡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그 앞으로는 인적이 드문 평야가 펼쳐져 있으니, 이내 주호는 몸을 돌려 위천강과 마주 섰다.

“뭐,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삐뚤어져서 탈선이라도 한다면 잘못 가르친 내 책임이니 손수 찾아가 교정해주도록 하마.”

“…무서운 이야기군요. 본교가 쑥대밭이 되지 않도록 처신을 잘해야겠습니다.”

위천강은 코를 문지르며 몇 번인지 모를 웃음을 토해냈다.

그 눈가가 살짝 붉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주호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가르침을 주마, 검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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