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주호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자,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몇 없는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향아.”
시야 한 편을 차지하며 등장한 동생의 얼굴에 그는 서서히 두 눈을 크게 뜨고는 헛바람을 토해냈다.
언제 쓰러졌던 것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짧게 숨을 토해내자, 팽진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미안하네. 무심코 힘이 조금 들어가서.”
“…….”
주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대련 도중까지 연무장은 비교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건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연무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자네, 괜찮나.”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궁한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남궁연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으로 주호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다친 곳은 없는지 세세히 살폈다.
“…예. 대련으로 기력이 쇠한 것만 빼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팽가야, 그 나이 먹고 힘 조절 못 하느냐.”
“설마 이기어검까지 나오리라 예상이라도 했는가.”
남궁한의 핀잔에 팽진호는 무안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
주호는 안개가 낀 것처럼 두루뭉술했던 감각이 각성하는 것을 느꼈다.
최후의 충돌. 혼신의 힘을 끌어낸 이기어검과 팽진호의 도가 부딪쳤다.
그 반향으로 거센 빛의 격류가 휘몰아치더니 이내 자신의 몸을 덮쳤고, 손쓸 틈도 없이 얻어맞아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끝에서 팽진호가 힘을 거둔 덕인지 아니라면 남궁한이 도와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순간이나마 진심을 내게 할 정도는 되었군요.”
주호는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려 도제(刀帝)를 당황시킨 것이었다.
본래 서로 간의 격차를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집념에 가까운 집착은 가까스로 그 끄트머리에 다다랐고, 결국엔 이러한 결과를 도출해내었다.
“물론,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네.”
“자네는 조금 부끄럽게 여기게나.”
물론 제 친우를 향한 남궁한의 핀잔도 함께 동반되었을 따름이었다.
***
대련이 끝나고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팽진호는 자신이 호언장담한 대로 성대한 식사를 대접했다.
팽가의 저력을 자랑하듯 진귀한 음식들이 상 위에 가득 채워졌고, 주씨 남매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
다른 이들이 쉬러 갔을 때 주호는 남궁한, 팽진호와 함께 가볍게 담소 자리를 가졌다.
“맹의 회합도 내일로 마지막이군. 자네는 참석하는가?”
“첫날만 맹주님의 부탁을 받아서 갔을 뿐입니다.”
팽진호의 질문에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목적한 바는 첫날에 이루지 않았는가. 각 문파의 장문인과 가주에게 주호라는 이름 두 글자를 확실하게 인식시켰으니 더는 발품을 팔 이유가 없었다.
“그런가. 아쉽게 되었군. 연이를 데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소개해주려 했거늘 말이야.”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참, 회합 내용은 들어서 알고 있는가?”
“예. 맹주님께 들었습니다.”
“마교와의 전쟁은 기정사실이지. 문제는 시기인데, 길어도 몇 달 이내일 테지.”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설마 내 대에서 또 전쟁이 일어날 줄은.”
남궁한의 말에 팽진호가 쓴웃음을 보태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도 무림이든, 천마신교든 서로 오랫동안 너무 평화로웠다. 중간중간 비동혈사 같은 사건으로 깨어질 뻔했던 적도 있었으나,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다.
곪았던 상처가 터지는 것이니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학관 측도 전쟁이 일어나면 자체적으로 편성을 한다지.”
“예, 이미 끝내두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희망자에 한해서 그럴 예정입니다.”
“아마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의 후기지수들은 그곳에 속하게 할 것이라네. 적어도 세가 연합의 대부분은 그리하겠다고 결론을 내렸어.”
“본가로 불러들이지 않고 말입니까.”
남궁한의 말에 주호는 의문을 표했다.
공훈에 조급한 것은 중소 문파들이다.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곳들은 굳이 그런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전쟁은 어찌 될지 모르네. 세가 연합은 사천 쪽의 전선을 지원할 예정이니 차라리 무림맹 본대랑 같이 움직이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
팽진호가 그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전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네. 우리로선 후대까지 생각해야 하는 법이지.”
“후기지수의 사수는 단연 중요한 것이야.”
“그렇습니까.”
“이미 옛적부터 임시 경계 체제가 구축되어 전쟁 준비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네. 이제 마교가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할 기미가 보인다면 맹주가 정식으로 무림첩을 보내겠지.”
“첫날 회의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감숙과 사천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할 걸세.”
“…정말이지, 이번 대의 무림맹은 유능해서 다행이야. 지나간 역사를 보면 항상 값비싼 희생을 치른 끝에 정신을 차리곤 했으니.”
“그게 말이네.”
팽진호가 내뱉는 안도의 한숨에 남궁한은 흐뭇한 시선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팽진호는 알지 못했지만, 이러한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바탕에 주호의 공훈이 컸다.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 이제 조금씩 그 이름의 위상이 높아질 터.
‘맹주의 사문은 점창이지. 속가제자가 장문인이 된 적은 없지만, 만약 이 친구가 이대로 입신지경에 이른다면 또 달라질 수도 있다.’
이때까지의 관행을 깨부순다고 하여 파격이라 불렸다.
주호 정도의 고수라면 다소의 관행을 무시하고 제 문파로 데려가려 하리라.
더욱이 그의 스승은 한 세대 전, 점창을 대표하는 고수가 아니었던가.
남궁한은 콧김을 내뿜으며 팔짱을 꼈다.
자신은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그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데릴사위로 들여 남궁의 품에 끌어안을 것이다.
자신보다 자신의 딸이 더욱 안달이 난 것 같지만… 하여튼 그 숙원을 이루리라.
“…….”
팽진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녀 관계는 어렵지만, 다른 부분을 공략해 팽가와 연을 쌓아간다면 필시 나중에 큰 도움이 될 터.
다만, 주호는 그 둘의 속셈을 짐작하지 못한 채 조금 전에 있었던 대련을 조용히 복기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각자 생각이 많아진 밤은 천천히 지나갔다.
***
정천 학관의 전반기도 어느덧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정되어 있던 행사가 전부 취소되고 강의만 진행되었기 때문일까, 일급 교관이 된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업무가 적었다.
담우양을 비롯한 다른 교관들도 학기 초에 비해 비교적 한가해졌다며 모두 한시름을 놓을 정도였다.
다만, 주호는 개인적으로 일급 교관 가운데 제일 바빴다.
뒤로는 사신문과 무림맹의 공조를 조율하고 있었고, 앞으로는 후기지수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거기에 학기 도중 원래 인원에 넷이 추가되어 더욱 그런 감이 있었으니.
팽우혁, 남궁휘, 당소혜, 주예향.
주호와 팽진호의 대련을 기점으로 팽우혁은 그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다.
처음엔 맡은 일이 있어 거절하려 했지만, 입신지경의 고수와 대련할 수 있었던 은혜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수락했고, 이왕이면 자신의 동생을 포함해 함께 다니던 그 넷을 모두 가르치고자 했다.
물론 선배 된 노릇을 하려는 것인지 주호가 나서기 전에 선우연을 비롯한 그들이 솔선수범해서 후배들을 교육했다.
그렇게 학관의 전반기 휴관이 얼마 남지 않게 된 가운데, 강의를 끝낸 주호는 열한 명의 후기지수와 마주 섰다.
“화산의 장문인께 초대를 받았다. 휴관하면 내 밑에 있는 후기지수들과 함께 방문해주지 않겠냐는 권유를 해오시더군.”
“화산 말입니까.”
“장문인께서…….”
그 이야기에 후기지수들, 특히 선우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 역시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이때까지 검절과 화산의 불편한 관계가 마음에 걸렸었기에 환영할만한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남장로님께도 동행하시겠군.’
남사일이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것은 옛적부터 유명한 사실이었다.
십 수 년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였으나, 마교의 발호에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이리라 추측되었다.
“…천강?”
“음?”
당천유는 멍하니 있던 위천강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거, 풍류를 쫓는 것도 좋은데 잠은 제대로 자게나. 우리가 아무리 무인이라 할지라도 관리는 중요한 법이니.”
“…자중하지.”
당천유가 보기에 근래 그의 생각은 항상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도 여럿 보였던 모습이었기에 핀잔을 주자, 위천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선약이 있는 이는 없겠지. 그러면 모두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겠다.”
화산행의 이야기는 선우연 일행뿐만 아니라 팽우혁이나 남궁휘, 그리고 다른 두 소녀에게도 설레는 이야기였다.
“화산파라. 매화가 많이 피어 있으려나?”
“향이 넌 화산이 처음이야?”
“응.”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는 주예향의 모습에 팽우혁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중턱까지는 매화가 많이 피어 있지만, 화산파 위쪽은 가파른 절벽인지라 나무가 없다.”
“화산이라. 십 년 만이군.”
누구의 반대도 없이 화산행이 결정되었다.
날짜는 휴관 일에 맞춘 일주일 후. 다들 들뜬 기색으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위천강은 씁쓸한 시선으로 제 친우들을 바라보았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대부분의 강의가 끝을 맞이했고, 휴관 일보다 일찍 예정이 끝난 후기지수들은 누구보다 먼저 학관을 떠나 제 가문으로 되돌아갔다.
주호는 이번 학기에 들어 첫 야근을 하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제 집무실에 앉아 강의 평가를 비롯한 여러 서류를 처리하는 작업의 반복이었다.
원래는 삼, 사급 교관들에게 맡길 수 있는 수준의 업무였지만, 그들은 당장 쌓인 일만 하여도 해가 뜨기 전까지 퇴근은 무리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홀로 여유롭게 해치워나갈 찰나,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으로 한 줄기 파공성이 쇄도했다.
쉬이익-.
밖에서부터 화살이 쏘아져 안쪽 벽에 박혔다. 서찰이 묶여 있는 화살대가 부르르 떨리며 진동을 토해냈고, 주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희인가?’
밖에서 어른거리던 기척은 이미 옛적에 느끼고 있었다.
업무 때문에 다른 교관이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느닷없이 화살을 쏘아 연락을 취하다니.
그런 웃기는 짓을 할 이는 당장 천우희밖에 생각나지 않았으나, 아쉽게도 발신인은 그녀가 아닌 듯했다.
「축시(丑時), 낙성곡(落星谷)」
유려한 필체로 간단명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낙성곡이라 함은 하남 성읍 밖에 있는 곳으로, 산세가 험하고 길이 정비되지 않아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오지였다.
서찰에는 발신인이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오라고 하는 것인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은바.
하지만 주호는 자신을 불러낸 이가 누군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 끝내야겠군.”
달이 가득 찬 보름의 날.
흘깃 탁자 위에 쌓인 업무를 바라본 주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