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본격적인 대련이 시작되기 직전,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팽진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가끔 있지 않았는가. 세대를 뛰어넘는 고수의 존재가.”
“우리 때는 없었지.”
“대신 낭만이 있지 않았는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남궁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대련의 초반, 주호는 모든 공격을 받아주기로 했는지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혼원벽력도의 초식을 모두 막아내었다.
잠자코 그 광경을 눈에 담던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 아들 성취가 훌륭하군.”
“아직 어설프기 짝이 없네. 검절 저 친구에 비하면 햇병아리지. 이제 막 길에 섰을 뿐이야.”
팽진호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명문의 출신이라 할지라도 저 나이대에 저 정도 성취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흐뭇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팽진호는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쯧.’
남궁한의 맏아들이 비동혈사의 사건으로 명을 달리한 것이 벌써 사 년 전의 일이었다.
그간 겉으로는 초연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는 아직 제 친우가 그것에 얽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마고우였던 제 아들조차 친우의 죽음을 떨쳐내지 못했는데 그 아비라고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팽진호의 담담한 표정에서 그 마음을 깨달은 남궁한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만 보내주어야지. 나도, 저 아이도.”
“내 앞에선 애써 태연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비가 자식을 마음에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괜찮네. 언제까지고 앓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저 아이도.”
남궁한은 살짝 불투명해진 눈동자로 주호와 팽우혁을 바라보았다.
제 아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남궁세가는 난리가 났다.
더러는 당장 복수해야 한다며 칼을 갈고 일어났지만, 남궁한은 친히 그들을 말렸다.
자신은 남궁세가의 가주였다.
항상 냉정해야 했고, 전체를 위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마교와의 전쟁은 어불성설일 따름이었고, 자식의 상중인 가운데 마교와의 화평을 위해 직접 그들과 마주했다.
수족과도 같은 섬뢰단주를 비롯해 적지 않은 이들이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가인 전부가 동요하며 불안을 토해도 그만은 흔들려선 안 됐다.
명문의 이름을, 남궁의 이름을 짊어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었으니.
“…….”
팽진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아들을 잃어본 적이 없었으니 감히 그 슬픔의 깊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니 애써 그 감정을 숨기는 친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밤새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과 이런 속마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기막으로 주위와의 소리를 차단해주는 것뿐이었다.
***
“…….”
대련을 끝낸 직후 주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팽진호가 흐뭇한 얼굴로 쓰러지는 제 아들의 몸을 받아내고 있었다.
“상처 없이 끝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도절이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공치사가 아닌 진심이었다.
지켜보던 팽진호도 과장이 아님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근처로 다가온 팽가의 고수가 팽사혁을 건네받는다. 기력이 다해 혼절한 것뿐이니 머지않아 정신을 차릴 것이니 다른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팽가가 큰 은혜를 입었군. 솔직히 말해서 오늘은 서로 안면을 트는 것만 해도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네.”
“그렇습니까.”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저 친구 아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나. 우혁이에게도 죽마고우였으니 떨쳐내기 쉽지 않았겠지. 그래서 이것으로 끝내려 했지만…….”
팽진호는 슬쩍 제 미련을 보였다.
아들과 주호의 대련을 보고 그 피가 달아오른 것이었다.
그의 의중을 눈치챈 주호는 두 눈을 반짝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을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 말할 줄 알았네.”
팽진호는 주호의 대답에 씩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주호로서도 입신지경의 고수와의 대련은 전혀 사양할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팽진호는 제 아들을 쓰러뜨렸다고 해서 앙갚음할 옹졸한 성격도 아닌바. 오히려 이전까지 자신에게 보였던 호의로 보아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
주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궁한과 남궁연, 그리고 팽우혁과 주예향뿐만 아니라 막 깨어난 팽우혁을 지키고 있는 팽가의 고수들, 그리고 남궁세가의 고수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이제껏 남들의 눈이 보이는 곳에서 전력으로 싸운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짧게 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쿵-.
연무장 안의 기운이 뒤집혔다.
바닥이 잘게 떨린다. 팽사혁과의 싸움으로 생긴 잔해들이 움직이며 마치 하늘로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부여했다.
“허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것 좀 보겠군.”
남궁한은 부드럽게 기운을 내뿜어 제 아이들을 감싸는 기막을 만들어냈다.
“……!”
여유로웠던 것은 남궁한뿐이었다.
가장자리에서 자리하던 양가의 고수들은 압도적인 기세에 헛바람을 토해내며 각자 내력을 일으켜 제 몸을 보호했다.
경지가 얕은 더러는 몸을 잘게 떨며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고, 대부분은 경직된 얼굴로 연무장 위에 선 주호와 팽진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과연.”
팽진호는 이전과 다름없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내력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몸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봐왔다.
‘후우…….’
오히려 긴장되는 것은 주호였다.
자신보다 강자와 싸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까이에선 단철량과 몇 번 손속을 겨루었고, 생사결로는 산서에서 검마와 치열하게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하지만 지금 자신 앞에 선 팽진호의 기세는 완전무결(完全無缺),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일말의 틈도 찾아볼 수 없는 거성과 마주한 듯한 압박감.
주호는 연신 손을 주억거리며 제 검을 다잡았다.
“전력으로 오게. 어차피 어지간한 여파는 저 친구가 막아줄걸세.”
팽진호의 눈짓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궁한이 쓴웃음을 지은 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주호는 제 감각을 정립했다.
쓸모없는 것은 버렸다. 시야가 온통 어둠으로 거멓게 물들어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공간의 구조는 새하얀 선으로 구축했고, 그 가운데 오로지 팽진호의 존재만을 새겨넣었다.
번쩍-!
예고도 없이 터져 나온 눈부신 섬광이 그 주위를 집어삼켰다.
이윽고 그 빛이 가라앉았을 때, 팽진호는 언제 꺼내 쥐었는지 모를 도를 들고 있었다.
웅웅-.
도 끝이 잘게 떨린다. 모습 그대로 섬전과도 같은 일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쾌속한 일 검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과연 한 손가락 안에나 꼽을 수 있을까.
‘이건 생각보다 더.’
팽진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초절정의 경지가 완숙에 이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 저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이라니.
벽에 다다른, 흔히 말하는 탈각(脫殼)의 직전이 아닌가.
자신의 이목조차 주호의 수준을 제대로 판별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는 짙은 흥미를 느꼈다.
“그것으로 끝은 아니겠지.”
“…제대로 가겠습니다.”
그렇기에 가벼운 도발을 내뱉자, 주호의 얼굴이 서늘해지며 그 기세가 한층 더 부풀렸다.
쉬이이이익-!
하늘 높이 뛰어오른 그가 휘두른 검에서 수십 줄기의 시퍼런 강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전력으로 덤벼오라곤 했지만, 정말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인정사정없는 공격이 아닌가.
“이것 참, 괜히 도발했군.”
팽진호는 쓴웃음을 지은 채 가벼이 도를 들었다.
그 위로 옅은 진동이 서림과 동시에, 그는 제 머리 위로 가볍게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주호가 쏘아 보낸 강기는 그 어느 것도 버텨내지 못했고, 전부 산산이 조각나 깨어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졌을 뿐이었다.
탁.
바닥에 내려앉은 주호는 검을 쉬지 않았다.
곧바로 검 끝을 잡았고, 청룡검식의 기수식을 펼쳤다.
쿠웅-.
이전과 사뭇 다른 압박이 좌중을 아울렀다.
펄럭이던 소맷자락은 바닥으로 축 늘어지는 것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솟구쳐 전신을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자네의 진신절기인가.”
팽진호는 아이같이 순수한 눈으로 주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고절한 무공으로 보였다.
어쩌면 본가의 절기인 혼원벽력도와 비견되거나 그 이상으로.
콰아아아앙-!
무형의 강기가 사방을 갈가리 찢었다.
그 거센 기세는 아무리 팽진호라 할지라도 전부 억누르긴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지척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음.”
주호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모든 초식을 그 앞에 떨쳤다.
때로는 무거운 바위처럼, 때로는 거센 폭풍처럼, 때로는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야수처럼.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항상 같았다.
“…….”
가라앉은 눈으로 자리에서 멈춰 선 주호는 천천히 제 검을 가운데로 거두었다.
“…대단하군. 정말로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
팽진호는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지금껏 그가 보여준 것만 하더라도 그 경지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칭찬의 말을 꺼내며 도를 내리려 했지만,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주호의 모습에 한쪽 눈을 꿈틀거렸다.
‘…설마, 아직도?’
아직도 보여줄 것이 있다?
전과 같은 위력의 초식이라면 소용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으리라.
그렇다는 것은 지금부터 펼치는 것은 적어도 그것보다 한 수 위라는 소리일 터.
“만검.”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무장 가운데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팽진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도를 쥐었다.
청룡검식(靑龍劍式)
만검(萬劍), 경계의 검
쉬이이이이이익-!
주호를 중심으로 연무장 바닥에 깊고 기다란 선이 그어졌다.
족히 수십 줄기에 달한 그것은 이내 팽진호를 향해 몸부림치며 날카롭게 쇄도했다.
파아앗-!
그의 도 위에 처음으로 묵색 강기가 피어올랐다.
대련이 시작된 직후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강기에 휩싸인 도는 더 없이 패도적인 기세로 휘둘러졌고, 이내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보이지 않는 선들과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바닥이 들썩이며 거센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마찬가지로 어느 것 하나 팽진호에게 닿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발은 분명 원래 있던 것보다 약 한 치 정도 뒤로 밀려나 있었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입을 떡 하니 벌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련은 자신들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겨우 정신을 차린 제 형님을 돌보던 팽우혁은 그 직후 나타난 현상에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부릅떴다.
웅웅-.
신검(神劍)이 그 손을 떠나 천천히 허공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바닥과 수평이 되도록 눕혀지더니, 그 끝이 팽진호를 향해 겨눠졌다.
“…이, 이기어검.”
남궁연과 주예향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팽우혁과 팽사혁은 생전 처음으로 보는 경지였기에 맞잡은 두 손을 벌벌 떨며 황홀한 시선으로 그것을 향했다.
“…….”
팽진호는 얼굴에서 여유를 거두었다.
이기어검.
단순히 기로서 검을 움직이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 기반인 어검의 묘리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펼칠 수 있는 고도의 수법이 아니던가.
자신과 남궁한만 하더라도 입신지경에 이르러 겨우 그것을 깨달았거늘.
‘정말, 격세지감이로구나.’
이윽고 작열하는 한 줄기 빛이 연무장 가운데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