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도절(刀節) 팽사혁.
하북팽가의 젊은 호랑이는 제 가문과 이름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핏줄이 내려준 재능에 자만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았다.
강호는 넓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쏟아져 나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명문은 기나긴 역사 동안 고고히 군림했기에 명문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팽사혁은 그런 무게를 짊어지고자 피를 토하는 고통과 뼈를 깎는 고난을 감내했다.
도절이라는 별호에는 그러한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그는 같은 오절에서 자신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이는 검절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자신과 같이 남궁이라는 명문의 출신으로 차기 가주가 될 계승자.
어릴 적부터 막역한 사이였고, 이때까지 몇 번이고 겨룸에 있어 승패를 반복하였다.
언젠가, 언젠가 그를 꺾으면 자신이 비로소 오롯이 바로 설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것이 오래되었지만, 결국 결착을 내지 못한 채로 끝을 맞이했다.
비동혈사는 그에게 있어 소중한 친우, 그리고 동시에 둘도 없는 호적수를 앗아간 재앙이었다.
오절 중 한 명이 죽었으니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호사가들은 수많은 신진 고수를 거론했지만, 그중에는 감히 검절의 이름을 승계할 마땅한 이가 없었다.
팽사혁은 내심 그 빈자리가 영영 채워지지 않길 바랐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도절이라는 신진 고수의 껍질을 탈피할 때까지만이라도.
아쉽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궁과 팽가의 손님이다. 잘 모셔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팽사혁은 제 아버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예의를 다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잘 모셔오라는 말까지 한 것은 그 의미를 강조한 것이리라.
“…….”
그는 장원의 밖에서 저 멀리 다가오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검절 주호.
정천학관의 최연소 교관이자, 가장 단기간에 일급 교관으로 승진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세운 공적과 풍문처럼 흘러다니는 이야기도 제법 매력 있는 것이, 호사가들이 좋아할 법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직접 마주할 때까지 주호를 검절로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주호가 소문보다 형편없는 자라면 자신은 참을 수 있을까.
검제와 도제가 스스로 나서 챙길 정도이니 예사로운 수준은 아닐 터.
그렇기에 걱정과 설레는 마음을 반반씩 품었고, 이내 주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북팽가의 사혁이라 합니다.”
짐짓 정중한 태도의 인사였다.
하지만 팽사혁은 제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가빠지려 하는 숨을 억눌렀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휘몰아치는 피는 안구에 몰려 시뻘겋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결코 내 밑이 아니다.’
가늠할 수 없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신보다 몇 수 위,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는 감히 그의 경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정천의 일급 교관으로 있는 주호라 하오.”
“…안으로 드시지요. 두 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팽사혁은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소매 밑으로 숨기며 그리 말했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었다.
서로의 힘을 겨루며 누가 우위를 지닌 지 명백하게 가리고 싶었다.
물론 그 결과는 뻔해 보이나, 그렇다고 해서 꺼리는 마음은 없었다.
자신은 하북팽가의 도절.
승리함은 당연하고, 패배한다면 그것을 양분 삼아 다시 딛고 일어서야 했다. 그것이 명문이었다.
‘호전적인 성격인가 보군.’
물론 그 사정을 알지 못했던 주호는 쓴웃음을 토해내며 그의 전신에 번들거리는 투기를 흘려 넘겼을 뿐이었다.
“왔는가.”
“오랜만이네.”
검제와 도제, 그 둘이 친히 나와 주호를 맞이했다.
그가 가볍게 포권하려 하자, 팽진호는 번거로운 예는 생략하자며 손을 휘저었다.
“됐네, 됐어. 그나저나 생각보다 오래도 걸렸군. 회의라도 있었는가?”
“예. 학관 행사에 관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마교의 발호 때문인가.”
“아마 어지간한 것은 전부 다 취소될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럴 때일수록 더 크게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작년의 일이 있으니 윗선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작년 교류 대회 당시 마교의 습격으로 적지 않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는 만큼 다들 소극적이었고, 그 결과 잠정적으로 중지하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오라버니!”
“…향아?”
씁쓸한 표정으로 그 내용을 곱씹던 주호는 돌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오셨군요. 저희는 한참 전에 먼저 와서 있었는데.”
“너도 초대를 받았느냐.”
“네. 이른 아침에 언니가 찾아왔어요. 오라버니도 올 예정이라고 하셔서 냉큼 따라왔죠.”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 했어요.”
주예향의 뒤를 따라 남궁연이 변함없이 화사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동생이 여기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기에 주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 젓자 그녀는 제 의도가 성공한 것에 대해 주먹을 불끈 쥐며 웃음을 토해냈다.
“원래라면 정오쯤에 만나 천천히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말이네…….”
남궁한은 씩 웃으며 주호 옆에 있던 팽사혁에게 눈짓했다.
“어지간히 몸이 달아올랐나 보군. 그리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아, 아닙니다. 그런…….”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진 이야기에 팽사혁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팽진호는 그런 제 아들을 보며 씩 웃어주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호승심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팽가의 기상은 강자를 만날수록 더욱 불타오르지.”
“소싯적의 자네와 닮았어. 고수와의 싸움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하하하, 자네가 웬일로 날 칭찬하는가.”
“칭찬이 아닐세. 이립이 되기 몇 해 전,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흑백쌍야(黑白雙夜)에게 무턱대고 싸움 건 것을 잊어버렸는가.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덤볐다가 뻗어버렸던 탓에 나는 피투성이가 된 자네를 둘러업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
“…거, 언제 적 이야기를. 결국엔 쓰러뜨렸지 않느냐.”
“자네가 퍼질러 싼 똥을 치우느라 고생했던 일이 생각나서 말해봤네. 그에 반해 자네 아들은 훌륭하다 할 수 있지. 호부 밑에 견자는 없다지만, 훌륭히 잘 자라주었어.”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팽사혁은 남궁한의 칭찬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의아한 시선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검제와 도제가 젊을 적 함께 강호를 주유하며 협행을 쌓았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당시 사파를 주름잡던 흑백쌍야와의 일전 역시 유명한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계절, 칠주야를 이어진 추격전과 핏빛이 서린 황야에서 끝맺은 사투는 뭇 많은 젊은이의 심금을 울리던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흑백쌍야에게 까불다가 얻어맞고 뻗은 채로 도망갔다니,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흠흠,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것도 그러니 자리를 옮기지.”
팽진호는 무안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말 돌리기는.”
“시끄럽네. 어차피 부탁하려 했어. 검절과 도절 아닌가. 이번 세대에서 강호를 이끌어나갈 신진 고수의 만남인데 이리 허비할 수는 없지.”
의중을 묻는 듯한 그의 시선에 주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저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지요. 고수와의 대련은 오히려 환영입니다.”
“저녁은 내 성대하게 대접하겠네. 잘 부탁하지.”
주호는 팽진호의 의도를 깨달았다.
단순히 대련을 시키려는 목적은 아닐 것이다. 벽을 마주함으로써 제 아들의 성장을 촉진하고, 더불어 주호와 인연을 쌓게 하려는 의도일 터.
팽가의 소호(少虎)와 안면을 트는 것은 주호에게도 그리 손해가 아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조금 발품을 파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보아라. 저것이 작금 세대를 이끌어나갈 고수들의 모습이니.”
주호와 팽사혁이 연무장 가운데 마주 섰을 때, 팽진호는 제 옆에 선 막내아들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힘을 준 것은 팽우혁 뿐만이 아니었다.
남궁한 옆에 자리한 남궁연 역시 주예향의 손을 살포시 쥔 상태로 주호와 팽사혁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나보다 높은 경지야.’
이런 대련을 볼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러니 움직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생각이었다.
남궁한은 별말을 하지 않아도 금세 진지한 기색이 깃든 딸의 모습에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따름이었다.
“…처음, 소문으로 주 대협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전부 믿지 못했소. 단시간에 이룩해냈다기엔 너무나도 허황된 것처럼 보였으니. 본래 소문이란 현실보다 부풀려진 것이 대다수가 아니오?”
주호와 마주 선 팽사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차에서 만났을 때 파악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는지 지금은 도를 쥔 손이 저릿저릿해질 정도의 여파가 전신에 닥쳐왔다.
하지만 그는 짧게 숨을 내뱉었고, 서서히 가라앉아있던 제 기세를 일으키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허나, 지금은 그것이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소. 아니, 오히려 축소되었겠지.”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오.”
“감히 바라옵건대 내가 그 진심을 일말이라도 끌어낼 수 있길 바랄 뿐이오.”
주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팽사혁의 수준으로 자신에게 전력을 다해 부딪쳐 와달라고 했으면 그것은 자만과 오만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렴풋이라도 서로 간의 격차를 파악했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절정의 완숙을 바라보고 있군. 비동을 나온 직후의 나보다 높은 경지인가.’
과연 명문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도호 팽대환조차 얼마 전에 절정 초입에 들지 않았는가.
그 반절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에 훨씬 뛰어넘는 경지를 보아하니 도절이란 별호가 아깝지 않았다.
“…….”
팽사혁은 몸을 살짝 낮춘 채 손에 쥔 도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하북팽가의 후계자에게만 전승되는 가문의 절기인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의 시작을 알리는 기수식이었다.
쐐애액-!
묵색(墨色)의 섬광이 허공을 베어 갈랐다.
과연 벽력이라 이름 붙을 만큼 매섭고 쾌속한 도법이었다.
그 파공성이 한 박자 늦게 따라붙었을 때, 팽사혁의 도는 이미 주호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아직도 반응하지 않아?’
지금이라도 반응하지 않으면 찰나 후엔 자신의 도가 그의 목을 베어 가르고 있을 터다.
하지만 주호의 검은 아직 검집에 수납된 상태. 그렇기에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야 싶었지만, 그는 제 아버지인 도제와 그 친우인 검제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캉-!
거센 고성이 연무장 한가운데 울려 퍼졌다.
‘…어느새?’
팽사혁은 잘게 떨리는 눈으로 제 앞을 바라보았다.
분명 검집에 있던 검이 어느새 뽑혀 나와 자신의 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멈춰 섰다면 도절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을 터. 그렇기에 거칠게 도를 뿌리치곤 머릿속에 깃든 망설임을 지웠다.
‘생각은 자만이다. 이것저것 가늠할 상대가 아니야. 오로지 일념만을 담는다.’
눈앞의 적을 벤다. 그것 이외의 잡념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혼원벽력도의 초식이 섬전처럼 쇄도해 연무장 안을 가득 채웠다.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그 바닥은 이내 자잘한 잔흔이 남았고, 더러는 벽이 무너진 곳도 있었다.
우스운 것은 팽사혁의 주위로만 그렇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검을 휘둘러 그 공격을 팽사혁의 공격을 막아낸 주호의 주위는 대련을 시작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후우.”
팽사혁은 훌쩍 뒤로 물러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느 초식도, 어느 기예도 통용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피어오른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채 도를 다잡았다.
“이젠 이쪽에서 가겠소.”
그와 동시에 주호가 처음으로 먼저 발을 내디뎠다.
길게 호흡을 뱉어낸 팽사혁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을 찰나, 신검이 허공에 아스라이 흩어지며 짙은 잔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환검?”
환검인지 산검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고절한 수법이었다.
그 유려한 모습에 위축될 법도 했지만, 팽사혁은 이를 악물며 오히려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북팽가의 도는 패도의 극치.
그림자가 눈을 어지럽힌다면 그것을 모두 깨부수면 그만이 아닌가.
힘껏 도를 휘둘러 베고, 찌르고, 짓이긴다. 묵색 섬광이 빛살처럼 주호가 만들어낸 잔영을 걷어냈다.
무아지경의 순간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아가며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냈다.
“…거기까지.”
그때, 그의 귓가로 엄숙한 선고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팽사혁은 시퍼런 불꽃이 깃든 한 쌍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조금 전의 그 황홀한 감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수고했다.”
등 뒤로 묵직한 기세가 자신을 끌어안았다.
팽사혁은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의복은 베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치 날카로운 검에 찢겨 나간 듯 수십, 수백 개의 흔적이 그 위로 남아 조용히 불어온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하나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단 한 번의 대련으로 모든 기력을 소모한 그의 의식이 어둠 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연한 어둠에 가라앉기 직전 팽사혁은 자신의 정신을 일깨워 발걸음을 멈춘 주호의 나지막한 일갈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
거기까지가 자신이 닿을 수 있던 경계선이라는 것이었다.
다섯 보라면 조금 멀었고, 여섯 보라기엔 조금 가까운.
그 거리를 메우기까지 얼마의 세월과 얼마의 노력이 필요로 할까.
어느 것 하나 어렴풋이도 알 수 없었지만, 딱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자신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