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교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관주 설우진부터 수석 교관 팽대환, 그리고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일급 교관까지 전부 참석했고, 그 휘하 급수의 교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의제는 앞으로 있을 행사에 관한 것이었다.
본디 올해 역시 교류 대회 겸 학관 자체적인 내-외부 행사가 다수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교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이상 작년과 같이 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대비를 잘한다고 하여도 구멍은 생기기 마련. 그렇기에 교관들은 한자리에 모여 행사 자체에 관한 존폐를 결정했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지. 다들 수고했네.”
정오부터 시작된 회의는 설우진의 마무리에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이 돼서야 겨우 끝을 맞이했다.
“후유, 지루하기 짝이 없군. 수석 교관님께서 눈을 부라리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한 시진 전쯤부터 졸았을 것이야.”
“사실 저는 눈만 뜨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예는 또 어디서 익혔는가?”
“기예라기보단 잡기입니다. 담형도 익혀보시겠습니까?”
교관들은 회의장을 떠나면서도 삼삼오오 모여 내일부터 시작될 주말에 무엇을 할지 이야기했다.
주호 역시 담우양과 회의장을 떠나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다음엔 다른 교관들과 술자리가 있는 상황. 특히 담우양은 근래 주호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기분 전환이라도 시켜주고자 했다.
“음?”
그렇게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회의장 입구에서 서성거리며 서 있던 한 인영이 주호의 눈에 들어왔다.
“교관님.”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살짝 지친 표정이었다.
하지만 서로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그런 기색은 말끔히 사라졌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주호로선 실전의 이해 첫 강의 이후로는 직접적으로 대화한 적은 없었기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아버님께서 청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식사하지 않겠냐고 전언을 부탁하시더군요.”
“팽가주께서?”
“예. 검제께서도 동석하신다고 전하셨습니다.”
“음.”
무림맹 회합은 얼마 전에 끝을 맞이했다.
반절은 제각기 속한 문파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반은 여전히 하남에 남아 있었다.
검제 남궁한과 도제 팽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나중에 따로 보자고 했었지. 그것이 오늘이었는가.’
거절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미안하단 시선으로 담우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오늘 밤은 우리끼리 마셔야겠구먼.”
“또 밤새 달리실 것 아닙니까. 저쪽의 일이 끝난다면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네와의 우정을 생각해 해뜨기 전까지는 기다려주도록 하겠네.”
담우양은 우스갯소리를 내뱉고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팽우혁은 왠지 자신이 죄인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움츠려 있었다.
팽가에 속한 이로써 가주의 말을 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선약이 있었다면 방해한 꼴이 아닌가.
막, 발걸음을 내디디려던 주호는 팽우혁의 눈동자 속에 서린 그 생각을 읽어내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것이 더 먼저 된 약속이다. 그리고 굳이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도제께서 보고자 하시는데 가지 않을 수가 없지.”
“그, 그렇습니까.”
팽우혁은 아직 주호가 어려웠다.
주예향과는 어찌어찌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곤 하나, 주호는 저 하늘 위의 존재가 아닌가.
“수련을 열심히 하고 있나.”
“…예, 매일 두 시진씩 자면서 매진하고 있습니다.”
“휴식은 제대로 취하도록. 그것 또한 수련만큼이나 중요한 법이니.”
“새겨듣겠습니다.”
주호는 팽우혁에 관한 이야기를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옆에는 그의 담당 교관인 담우양이 있었고, 동생인 주예향도 있었다.
그리고 선우연이나 당천유 같은 이들이 주예향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정신 교육을 하고 있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니 그가 자신에게 깨진 이후로 정말로 밤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하는 것을 알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마차?”
학관 입구에 다가가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팽가의 마차에 주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는데 마차까지 필요한 것인가.
“아, 하남 근교에 따로 장소가 마련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무림맹 회합이 끝나고부터는 그곳에서 머무르고 계셨습니다.”
“그런가.”
주호는 별말 없이 마차에 탑승했고, 그것은 이내 내달리기 시작했다.
“…….”
마차 안은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주호는 단순히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지만, 팽우혁으로서는 섣불리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담되었을 따름이었다.
사실 그는 주호에게 관심이 많았다.
물론 자신이 사모하는 주예향의 윗사람인 것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나머지는 무인으로서의 순수한 열망에 따른 것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그 시선을 의식한 주호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마차를 대령한 것을 보니 목적지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 자명한바.
이때까지 회의로 지루하기도 했고, 잡담을 통해 시간이라도 죽으려는 것이었다.
“어,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리 어려운 태도를 보일 것은 없다. 어찌 되었든 나는 교관이라고 너는 관생이니 문답을 주고받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팽우혁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마음 같아선 주예향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무인 팽우혁으로서 묻기로 했다.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그런 고강한 무공을 가지실 수 있던 것입니까?”
얼핏 들으면 무례한 질문 이어 보일 수 있겠으나, 팽우혁은 주호의 도량을 믿었다.
“피나는 노력과 재능, 따위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예.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곳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에 제대로 정신머리가 박힌 이라면 노력하지 않는 이가 없지요. 가끔 궤를 뛰어넘은 고수가 나타나긴 하지만, 교관님의 경우는…….”
말문을 여는 것이 어려웠지 한 번 열린 입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주호는 잠시간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팽우혁과 시선을 마주쳤고, 이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삼 년, 아니 이제 사 년 전이군. 비동혈사를 기억하느냐.”
“…예?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난 그때의 생존자고 무황의 무공을 계승했다. 고금제일인이라 불렸던 고수의 무공이니 지금의 경지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
“…….”
그 말에 팽우혁의 입이 쩍하고 벌려졌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미간에 주먹을 꽂았겠지만, 그것이 주호의 입에서 나오자 절대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화, 확실히. 그렇다면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 전부 설명된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조각의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검절이라는 출중한 고수의 배경에는 그런 비사가…….
따악-!
“……!”
팽우혁은 제 미간을 때리는 강렬한 타격에 뒤로 넘어갔다.
일순간 시야가 시커멓게 변했고, 아찔한 통증이 뇌리를 감쌌다.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지옥을 보고 온 그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정신을 수습하자 머쓱한 얼굴로 손가락을 내밀고 있던 주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거, 참. 농담도 못 하겠군.”
“…예? 예?”
어째서 자신을 때린 것인가.
그런 질문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저 침을 줄줄 흘리며 멍한 표정으로 주호를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비동혈사는 미제(未濟)로 남았다. 그 누구도 안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지금까지 그 진전을 이었다고 공인된 이도 없지.”
“하, 하지만 방금 교관님께서 자신이…….”
“말하지 않았느냐. 농담이라고.”
주호는 팔짱을 낀 채 한심스럽다는 눈길로 팽우혁을 바라보았다.
“뭐,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런 풍문을 좋아하는 것은 이해하겠다만, 조금 더 사람의 말을 의심하는 법을 배우도록.”
“…아니,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리 고강한 무공을 손에 넣으신 겁니까.”
“현 무림맹주이신 검선께서는 내 사형이시다. 같은 스승께 가르침을 받았지.”
“…….”
팽우혁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림맹주는 자신의 아버지인 팽진호보다 배분이 더 높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한술 더 떠 맹주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니.
차라리 비동혈사 쪽이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였다.
“믿는 얼굴은 아니군.”
“그러기 힘든 이야깁니다.”
“비동혈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으면서?”
“…그건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무황은 교관님 말씀대로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고수였으니까요.”
“죽은 무황보다 아직 정정하신 무림맹주 쪽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은가.”
“미간이 얼얼합니다. 그런 충격이 있었는데 어찌 쉽사리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짐짓 반항하는 듯한 그 기색에 주호가 슬쩍 손을 올리자 팽우혁의 몸이 다시 움찔했다.
사람은 학습하는 생물이었고, 그는 이미 그 충격을 공포로써 학습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뭐, 나중에 가주께 여쭈어보거라. 내가 그분들과 인연이 닿을 수 있던 것은 사형이신 맹주님의 배려였으니.”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섰다.
잡담을 끝낸 주호가 창밖을 바라보자 정말로 하남 성읍을 떠나 한참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였다.
굳이 무림맹이 아니더라도 하북팽가와 남궁세가 정도의 힘이라면 하남 한복판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필시 그런 이유가 있을 터.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
그리고 그 머나먼 곳으로 굳이 자신을 불러냈다는 것은 그저 이야기만 나누려는 것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끼익-.
밖에 있던 누군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주호는 이미 기척으로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팽우혁은 문밖으로 보이는 얼굴에 두 눈을 크게 뜨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
“하하, 우혁아 오랜만이다.”
팽우혁과 비슷한 얼굴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천지 차이로, 예사롭지 않은 기세가 전신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며 절정의 기도를 뿜어내었다.
‘도절(刀節) 팽사혁.’
주호는 흥미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은 오절(五節)에 속한 고수로 다음 대에 팽가를 이끌어 가리라 알려진 하북팽가의 소호(少虎).
올해 스물일곱으로 동갑이며 벌써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런, 손님께 결례를.”
팽사혁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주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북팽가의 사혁이라 합니다.”
정중한 태도의 인사였다.
하지만 주호는 그의 전신에서 은은하게 들끓는 투기를 볼 수 있었다.
‘과연.’
오절(五節).
그것은 강호의 신진 고수를 뜻하는 말이었다.
검, 창, 도, 권, 독.
명문 문파의 출신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대를 풍미한 고수들이 모두 거쳐 지나간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따라붙은 명제가 있었으니.
「오절 중 최강은 누구인가.」
주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팽사혁의 시선이 씩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