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은가.”
주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전보다 생기가 조금 덜하고 창백한 것이 내상을 전부 회복하지 못한 듯싶었다.
슬쩍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몸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확인되었다.
“술은 당연히 금지고 물 대신 이것만 마시라더라.”
천우희는 죽통을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주호가 슬쩍 그 안을 들여다보니 진한 녹색의 떫은 향기가 나는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음식 먹기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기름진 것, 화기가 쌓인 것, 고기 등등. 미음 말고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어.”
“확실히 살이 좀 빠진 듯하군.”
“나는 먹고 싶어도 못 먹으니까, 당신 먹는 모습이라도 보면서 대리만족하려고.”
“그러면 술을…….”
“아니, 술은 안 돼.”
“어째서지?”
“음식 먹는 건 볼 수 있어도, 혼자 술 먹는 꼴은 못 봐.”
“…이기적이군.”
“나 원래 못된 여자야. 몰랐어?”
천우희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항상 술에 의존해 대화하기보다는 맨정신으로 멀쩡히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그래도 겨울 간 수행의 성과가 빛을 발했나 보군. 적혈마검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을 텐데.”
“정말로.”
천우희는 그때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기세에 휩쓸려 날뛴 것도 없잖아 있거든? 처음에는 내가 압도하길래 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처럼 기세가 달라지더라.”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던 암천(暗天)인가 하는 것이었지.”
“그래. 핏줄이 시커멓게 타오르는 게 강시를 보는 것 같았어.”
“강시라.”
“뒤에 애들이 있어서 죽자 살자 버텼지. 내가 쓰러지면 우리 애들도 힘들어질 테니까. 그렇게 싸우다 보니까…….”
천우희는 슬쩍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주작신공의 기운이 일어나 새빨간 열양지기를 피워 올렸다.
그것은 이내 새하얗게 물들었고, 끝에선 시퍼런 청색으로 변했다.
“말했지, 주작의 불꽃은 두 번 변한다고.”
씩 웃으며 말하는 그 표정은 어딘가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마치 모든 것에 미련이 없어진 듯 떠나버릴 것만 같았기에 주호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
천우희는 그 갑작스러운 손길에 살짝 놀란 듯하면서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그녀는 제 뺨을 살짝 쥔 주호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떼어냈다.
“하여튼 당신도 봤으니 난 내일쯤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갈 거야. 당분간 수련에 매진할 거니까 얼굴 보기는 힘들겠네.”
“휴관하면 찾아가지.”
“그러던가. 대신 오늘은 진득하니 이야기나 나눌까.”
천우희는 작게 웃음을 토해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약을 한 모금 마셨다.
“…….”
주호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천우희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
완연함에 이르러 있던 봄은 조금씩 열기로 제 몸을 덥혔고, 파릇파릇하게 솟아올랐던 봉오리도 저마다 꽃과 열매를 맺으며 결실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다.”
학관 생활도 어느덧 중반에 접어들었다.
작년과 달리 별 행사가 진행되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감도 없잖아 있었다.
“다음 강의는 사흘 뒤, 오늘과 같은 시각으로 하지. 그러면 이상.”
주호는 제 앞에 쓰러져 있던 후기지수들을 등 뒤로 한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요새는 왠지 가차 없으시군.”
잠시간 기진맥진한 눈초리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선우연은 거칠게 내쉬던 숨을 가다듬고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도 느꼈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네. 왜인지 다른 것에 신경이 팔린 상태 같았지.”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고 계신 것이려나.”
다른 이들도 그렇게 느낀 것인지 모두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소저. 혹시 뭔가 알고 계신 것이 없소?”
당천유에 이르러선 주호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남궁연에게 슬쩍 물어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글쎄요. 그런 낌새는 없으셨는데.”
남궁연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끔 시간이 나면 주호와 함께 시간을 갖곤 하는 그녀였다.
그는 이전과 달리 자신을 피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마주해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느꼈던 것처럼 주호가 어딘가 자신들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오직 천후만이 무덤덤한 태도로 천을 들어 홍령도를 휘감고 있었다.
“참, 이것 보게.”
위천강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것인지 가볍게 손뼉을 쳐서 이목을 끌어모으곤 제 앞쪽에 있는 돌을 가리켰다.
“후우…….”
운기조식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정좌한 채 깊게 숨을 들이켠다. 그러더니 단전 앞에 두 손을 모았고, 이내 그것들 천천히 가슴께까지 들어 올리며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흡-!”
요란한 기합성이었다.
동시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팔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힘의 집중을 알렸다.
툭.
쭉 뻗은 두 손의 끝으로 바닥에 놓인 작은 돌 부스러기 하나가 작은 소리를 내며 옆으로 굴러갔다.
“어떤가!”
그 확연한 움직임에 위천강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 친우들을 둘러보았다.
“무엇이?”
“방금 내가 허공섭물의 묘리를 통해 이 돌을 움직인 것을 똑똑히 보았으면서 무얼 그리 시큰둥한 태도인가!”
“자네가 움직였다고?”
“바람이 불어와 움직인 것이 아닌가?”
그 의기양양한 태도에 선우연과 당천유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굴러간 돌을 바라보았다.
“허어, 바람이라니! 내가 밤잠 줄여가면서 연습해 끌어낸 성과를 모욕할 셈인가!”
위천강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과 함께 그리 발악하며 다시 두 손을 쭉 뻗었다.
얼굴은 재차 터질 것같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내공이 다한 것인지 돌 부스러기가 다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거, 보게.”
“…힘을 너무 소비해서 그렇다. 만전의 상태에서 무려 한 치 넘게 움직인 적도 있다고!”
“그래, 그래. 대단하네.”
선우연과 당천유가 놀리기 시작하자, 위천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사자후가 터져 나오려 할 때, 악비산은 그런 위천강의 옆으로 털썩 주저앉으며 흥미 어린 시선을 보냈다.
“대단하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려줄 수 있나? 나도 교관님의 이기어검을 보고 혼자 궁리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거든.”
“흠, 역시 자네는 제대로 된 안목도 없는 무지렁이들과는 다르군. 그렇다면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가감 없는 칭찬에 위천강의 화가 사그라들었다. 그는 입가를 씰룩이며 선우연과 당천유에 시선을 거두고는 제 옆에 앉은 악비산을 바라보았다.
“우선은 평정일세. 흔히 명경지수(明鏡止水)라 하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리게나. 손끝까지 밀도 있게 퍼트리고, 그래 옳지. 그 상태로 움직이고자 하는 대상 쪽으로 쭉 뻗게. 교관님 정도 되는 고수라면 의념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직 햇병아리지 않는가. 그래, 그렇게. 그리고 손에 창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게. 그것이 저 돌멩이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고. 신검합일의 묘리와 비슷하네. 아, 자네에겐 신창합일이려나. 교관님께선 어검 경지가 검 본연의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라 하셨지. 어차피 우리는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니 조금 꼼수를 부려도 문제없을 거야. 신창합일, 창을 자네 팔의 연장선이라 생각한 것처럼 내뿜은 내력을 신체 일부라 생각하게. 그리고 그 끝이 저 돌멩이에 닿으면…….”
쭉 뻗은 악비산의 손 앞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무형지기에 위천강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단숨에 성공하기 힘든 묘리였다.
그러니 그 방법만 직관적으로 체득하게 하고자 세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앞에 있던 돌이 갑자기 더럭 하고 움직이자 위천강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아, 아니. 어떻게…? 이 나조차 칠주야를 쉬지 않고 연습한 끝에 겨우 부스러기 하나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거늘…….”
그는 진심으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이들과 비교해 노력은 뒤질 수 있으나, 재능만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악비산이 단 한 번의 시도로 그것을 성공해내자, 그 자부심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자네, 어떻게 한 건가. 아니, 몰래 연습했군. 이전부터 할 수 있었는가? 우릴 놀라게 하려고 준비한 것인가?”“내가 움직이려고 했던 건 더 가까이에 있던 돌인데.”
“뭐?”
위천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을 때, 그들의 뒤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니, 천후가 저 앞을 향해 내밀었던 팔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 어렵진 않군. 가르침 감사하네.”
“…빌어먹을, 누구는 밤잠 설치며 고생했거늘.”
재능의 차이인가, 아니면 애초에 자신보다 훨씬 더 앞에 있는 경지인가.
위천강은 처음으로 남의 재능에 억울하단 마음이 들었다.
“호오.”
천후마저 미약하게나마 허공섭물을 성공하자 선우연과 당천유도 흥미를 보냈다.
“교관님도 그러셨지. 수련하기 나름이라고.”
“그래,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있는가.”
“잘만 한다면 써먹기에도 좋을 것 같고.”
“…가령, 이성의 앞에서라든가?”
“…….”
남궁연은 히죽거리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한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호기심이 생긴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위천강이 알려준 방식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뻗었지만, 그 어렴풋한 감각에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후유…….”
위천강은 그것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신교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자신조차 애먹는 수법이었다.
천후 같은 괴물이 아닌 이상 단번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이걸 구실로 다가가면…….’
그는 슬쩍 끙끙거리는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마침 좋은 핑계도 생겼겠다, 설명해주는 척 거리를 좁힐 생각이었다.
“남궁 소…….”
그렇게 입을 연 순간, 다른 쪽에 있던 돌이 바닥을 튕기며 데구루루 그 앞을 굴러갔으니.
“음? 움직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뻗은 철대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
그것을 보곤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는 위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