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대련이라.”
남사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같은 고수와 나누는 대련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자 주호는 성큼성큼 연무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남사일 앞에 섰다.
스릉-.
신검이 뽑혀 나왔다.
남사일 역시 땀에 절은 자신의 검을 들고는 조금 전까지 수십, 수백 번을 반복했던 매화 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 내쉬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수련했다는 핑계를 댈 생각은 없었다.
무릇 고수란 어느 상황에도 의연한 모습이었기에 고수라 불리는 것이니.
이십사수 매화검법
십이 초식 매화점개(梅花漸開)
남사일은 이것저것 재지 않았다.
주호가 말한 대로 그 머리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바.
그렇기에 가감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딪쳐볼 생각이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흐드러지듯 피어난 매화가 연무장 안을 가득 채웠다.
봄은 이미 끝물에 다다랐지만, 이곳은 이제 막 시작인 듯 그 하나하나가 선명하기 짝이 없다.
“…….”
잠시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주호 역시 천천히 신검을 들어 올렸다.
남사일과 달리 그는 이렇다 할 초식을 펼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를 목도했고, 천천히 한 발자국 사선으로 내디딤과 동시에 가볍게 검을 베어 갈랐을 뿐이었다.
샤아악-.
실로 절묘한 한 수였다.
검과 검이 마주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 공간을 점한 것으로 초식의 흐름을 빼앗아왔다.
피어난 매화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주호의 검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만, 그 영역에 들어간 새하얀 잎은 순식간에 찢겨 나가 허공으로 스러질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이십사수 매화검법은 전반 십이초와 후반 십이초로 나뉘었다.
전반 십이초는 각각 흐름이 연계된 것으로 매화가 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지만, 후반 십이초는 독립된 매화의 모습을 그렸다.
십오 초식 낙매분분(落梅紛紛)
위태로이 흔들리던 매화꽃이 이내 떨어져 나와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지랑이처럼 휘몰아치는 난류에 주호가 검을 들어 제 앞을 가로막을 찰나, 남사일의 기세가 돌연 거칠게 바뀌며 흩날리던 매화꽃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으니.
십육 초식 낙매성우(落梅成雨)
한 점의 흐트러짐 없는 초식의 연계였다.
연무장 바닥 위로 날카로운 검기들이 비가 오듯 쉴 새 없이 두들겼다.
호신 강기로 막기에 제법 매서운 기세였다. 그렇기에 훌쩍 뒤로 물러난 주호는 신검을 빛살처럼 휘둘러 제 앞을 가리는 검막을 만들어냈다.
매화로 이루어진 빗방울이 그 위로 튈 때마다 위태로이 흔들리며 충격을 토해냈지만, 검막은 비가 그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제 존재감을 여실 없이 드러냈다.
“후우…….”
주호는 검을 내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매화선풍검이라 불리는 고수의 저력이었다.
비슷한 무위로 맞추어 상대했다곤 하나, 파고들 틈도 주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휘몰아쳤던 그 검은 몇 명의 강자를 쓰러뜨렸을까.
“이것을 마지막으로 하지. 괜찮겠나?”
“그렇게 하십시오.”
주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사일은 천천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수련에 이어 전력을 다한 대련이었기에 살짝 지쳤으나,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자 그 위에 서린 검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십삼 초식인 매화성류(梅香成流)였다.
본래라면 농밀한 검기가 향처럼 퍼져 나가 장내를 휩쓸어야 했지만, 그는 검기의 밀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웅웅-.
위태로이 흔들리던 검기가 어느 임계점에 이르러 불완전하게나마 하나의 형태를 이르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선 주호가 크게 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자, 남사일은 이마 위로 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건 이전 것들과 조금 다를 걸세.”
무겁게 내디뎌진 발걸음 아래 연무장 바닥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기의 제어가 완전하지 못해 그 여력이 발끝을 타고 새어나가는 것이었으나, 남사일에게 그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이십사 초식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말 그대로 눈부신 빛이었다.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검기와는 차원이 다른 여파가 퍼져나가며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굳건한 벽을 베어 갈랐으니.
“…….”
아무리 주호라 할지라도 그것을 경시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검 위에도 작열하는 빛이 피어올라 휘감았고, 이내 자신에게 닥쳐오는 남사일의 검과 부딪쳤다.
캉-.
생각했던 소음은 없었다.
그저 신검의 검날이 남사일의 강기를 부드럽게 베어 가르며 그 검 끝에 닿았을 뿐이었다.
곧 한 줄기 고성과 함께 그 검은 주인의 손에 벗어나 허공을 날았고,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을 부유하다 끝에서부터 바닥에 박혀 들었다.
“으음.”
남사일은 제 오른손을 부여잡고 주춤거리는 움직임으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그 눈빛은 성성하기 짝이 없었나니, 이내 고개를 들어 주호를 바라보았다.
“…어떠한가. 자네가 보기에 조금 전의 나는 어떠했는가.”
스스로 섣불리 단언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여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
주호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러곤 두 눈을 감은 채 그 물음을 생각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氣)는 농밀하여 빈틈이 없고, 체(體)는 단단하여 부족함이 없으나, 심(心)이 굳건하지 못하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무릇 강기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경지에 오름에 따라 얻는 전유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전체를 보십시오. 무엇이 그리 조급하십니까.”
주호의 물음에 남사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심 집히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어렵구먼.”
“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호가 검을 수납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남사일 역시 바닥에 꽂힌 제 검을 뽑아 그 끝에 묻은 흙을 털어내었다.
“중요한 것은 심상입니다. 기와 체는 수양으로 얻을 수 있지만, 마음은 본인의 생각에 따라 갈리는 것입니다.”
“심상(心想)이라.”
제법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자네의 심상은 무엇이었는가?”
“삶(生)이었습니다.”
주호는 그 질문에 망설이지 않은 채 즉답했다.
비동을 나오고 나서부터도 그것엔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강자라 할지라도 죽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자신은 죽어서 명성을 남기는 것보다 산몸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삶이라.”
“저와 교관님의 외모가 다른 만큼 사람마다 생각 또한 다르겠지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부터 다음 경지에 드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는군.”
“대련과 조언 몇 마디 정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그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남사일은 너털웃음을 토해내었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친구였다.
저만한 나이에 저런 경지에 올랐으면 콧대가 높아질 법도 하건만, 지금에 이르러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단순히 대련을 위해 온 것은 아닐 테고…….”
한창 무림맹에서 회합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찾아오려 했는데, 역시 시기가 문제인가 봅니다.”
“…스승님께서 손을 썼군. 아니면 장문인인가?”
“두 분 다입니다.”
주호로서는 딱히 감출 마음이 없었기에 가벼운 태도로 털어놓았다.
“연회 중에 이야기하고 싶다며 부르시더군요. 용건이야 뻔했습니다. 저와 화산이 얽힌 은원을 풀고 싶다. 전반기 휴관에 저를 비롯한 후기지수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겸사겸사…….”
“날 불러들이려는 목적이겠지.”
“앞쪽의 이야기는 제게 손해될 것이 없어 수락했습니다. 교관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은 다른 맥락이지만, 어쩌시겠습니까.”
“…….”
남사일은 침묵했다.
표정을 보니 대련 때보다 더 심력을 기울이는 듯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주제넘은 질문이나, 교관님께선 그 자리에 뜻이 없으십니까.”
“화산이라는 대문파를 대표하는 자리이네. 그곳에 속해 있는 이들 중 단 한 번이라도 탐내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렇다면…….”
“하지만 장문인이라는 이름은 결국 정치적인 의미가 다분한 것이네. 설령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작금의 답답한 화산을 개혁하려 한다면 사사건건 방해해올 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겠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 모르는 일이네. 솔직히 어릴 적엔 선망하기도 했었지. 막상 장문인이 되면 잘할 수도 있겠고.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화산의 이기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껴 내려온 것이라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들 사이에서 과연 내가 변하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것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네.”
“…어려운 문제로군요.”
“그렇지. 허나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만도 없는 노릇일 터. 장문인께서 자네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신 것 같네. 더는 물러서지 말고 맞서라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던 머지않아 결착을 내어야겠지.”
“장문인께서는 교관님이 제 뒤를 이으시기를 강력하게 바라고 계십니다. 제게도 옆에서 강하게 입김을 넣어 달라 하셨고요.”
“하하, 자네의 입김으로 내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면 화산을 박차고 뛰쳐나오지도 않았다네. 대사가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가. 순리에 따라야지.”
“…맞는 말입니다.”
남사일은 끝에 와서는 체념한 듯한 기색이었지만, 그 눈은 이전과 달리 방황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
저녁이 한참 지난 때였다.
주호는 발걸음을 서두르며 길을 걸었고, 이내 익숙한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늦었잖아.”
텅 빈 주점 안쪽엔 천우희 혼자 자리에 앉아 심통이 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남사일과의 대화가 예상보다 길어진 탓에 약속한 시각보다 한참이나 늦고 말았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하다, 일이 예정보다 늦게 끝나는 바람에.”
그녀가 제 앞에 차려진 음식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것을 본 주호는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본래 약속은 철석같이 지키는 그였지만,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연무장을 나설 때까지 약조를 까먹고 있었다.
“얼른 들지. 허기졌을 텐데.”
“…풉.”
살짝 안절부절못한 태도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그 모습에 천우희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놀려주고 싶었거늘, 평소의 그 근엄한 모습과 달리 연하의 분위기가 여실 없이 느껴지지 않는가.
“당연히 먼저 먹었지. 그럼 늦게 온 주제에 그것까지 기다리게 할 생각이었어?”
“…할 말이 없군.”
주호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제 뺨을 긁었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평소였다면 가득했을 술병이 보이지 않는바.
그것만은 기다려주었나 싶어 술병을 꺼내려 일어났지만, 천우희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당분간은 금주야. 의원이 먹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