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장문인,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주호는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정말로 외부인인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선청우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인지 옅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화산을 떠나고 나는 곧바로 장문인에게 찾아갔네. 장문인 후보로 내정되며 받은 자소단을 그렇게 쓰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책임을 지라면 달게 받을 생각이었네. 나는 한 점 부끄럼 없이 그 아이를 가르쳤고, 그 아이 역시 그릇된 일에 자소단을 사용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물론 사문의 시선으로 보자면 잘못된 일이지. 목숨에 경중을 따질 순 없지만, 역할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장문인께 사실대로 고했는데…….”
“대노하셨습니까?”
“…그 반대라네.”
선청우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대노해서 내치기라도 했으면 더 좋았겠지. 그 아이를 품기엔 화산은 작네. 지금처럼 밖을 떠돌며 마음대로 살게 해주고 싶은 것이 스승 된 이로서의 마음이나, 장문인의 뜻은 다르더군.”
“허면 어찌 되었다는 것입니까.”
“장문인은 본 제자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네. 기꺼이 자소단을, 화산의 장문인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 만큼의 포부, 그것이야말로 화산을 이끌어 나갈 자리에 걸맞은 자격이라며 말이야.”
“그, 건…….”
주호는 쓴웃음을 내뱉었다.
자칫 엉뚱하다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선민의식은 화산뿐만 아니라 명문이라 불리는 문파에서 곧잘 앓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높은 주체 의식은 명문으로서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본질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것이 사상과 생각의 기본이 되고 외부로 표출되기 시작한다면 고고함을 잃는 것이니.
대게 경험을 쌓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감추는 법을 터득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장문인은 화산에 큰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그렇기에 남사일 그 아이를 선택한 것이고. 어차피 차기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족히 십 년 뒤의 일이니, 지금부터 그 기반을 공고히 세워놓고 싶은 것이겠지.”
“문제는 정작 그 본인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겠군요.”
“그렇네. 만나주지 않으니 직접 서신을 전달해보아도 자소단을 본래 용도와 다르게 썼으니 자신은 자격이 없다는 허울 좋은 핑계만 내뱉고 있지. 이 빌어먹을 것.”
심려가 큰 것인지 깊게 푹 한숨을 내쉰 선청우는 이내 손을 저었다.
“잡설이 너무 길었군. 어여 가세, 장문인께서 기다리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부담 갖지 말게나. 장문인 역시 비슷한 이야길 할 걸세. 그러니 내게 미리 언질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거창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야. 다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때면 그 옆에서 한두 마디 던져주는 것으로 족하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창한 부탁이 아닌가.
하지만 주호는 굳이 속마음을 입에 담지 않은 채 뒤를 따랐고, 이내 별채에 먼저 자리 잡은 화산의 장문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상태창]
이름: 선혁우
별호: 매화검존
직업: 화산파 장문인
나이: 예순아홉
소속: 화산파
무공: 이십사수 매화검법
경지: 화경(三/十)
호감도: 上中
“어서 오게.”
주호가 실내로 들어오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래도 일단 무림의 큰 어르신이기에 주호가 황급히 예의를 취할 찰나, 선혁우는 살가운 얼굴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반갑네, 반가워. 내 진즉 보고 싶었거늘, 겨우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군.”
“…하하, 대선배님께서 말학을 이리 환대해주시니 어찌할 바를…….”
“뭐 그리 거리를 두는가. 개의치 말고 어여 앉게.”
개인적으로 첫 대면이거늘 호감도가 上中에 이르러 있었다.
주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자리에 앉았고, 이내 선우혁의 모습을 자세히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선명한 눈빛을 보니 강단이 있어 보이는 성격이었다.
입신지경의 고수들이 으레 그러하듯 전신에는 신묘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과 더불어, 그 입가에 서린 옅은 미소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은 천진난만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이리 불러서 미안하네. 일장로에게 들었겠지만, 자네에게 해를 주고자 함이 아니야. 그 부분은 충분히 설명했겠지?”
“…당연한 일입니다. 애초에 저와는 그리 관계가 나쁘지 않습니다.”
한쪽 구석에 팔짱을 끼고 앉은 선청우가 그리 말하자, 선혁우는 혀를 끌끌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틱틱거리기는. 내 어릴 적부터 그 솔직하지 못한 성격 좀 고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사일이의 성격이 그리 삐뚤어졌지.”
“검절 앞에서 그게 무슨 망언입니까! 헛소리 그만하시고 본론으로 넘어가시지요!”
얼굴을 붉히며 발끈하는 사제의 모습에 그는 어떠냐는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매화검선이니 뭐니 해도 속은 밴댕이같이 좁으니. 그러니 제 사형에게 장문인의 자리를 미뤘지.”
“어허!”
“알았네, 알았어.”
선혁우는 진정하라는 듯 한 번 손을 휘젓고는 분위기를 바꾸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일 장로에게 들어 알고 있겠지만, 나는 사일이를 장문인으로서 세우고 싶다네. 그러기 위해선 노력을 아끼지 않을 셈이지. 듣기로 자네도 사일이와 적잖은 친분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네만…….”
“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호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학관에 처음 들어와서 큰 도움을 여럿 받지 않았던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혁우는 잘 되었다는 듯 작게 손뼉을 쳤다.
“다행이로군. 일단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말하자면 우선은 자네와 얽힌 사소한 오해를 풀고 싶다네.”
“사소한 오해 말씀이십니까.”
매화검수장 조원일과의 충돌.
그 전말은 이미 강호에 자자하게 알려진 상태였다.
화산파에서는 숨기고 하고 싶어 하는 치부에 속할 터. 그럼에도 그리 퍼진 것은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정학이 손을 쓴 결과일 것이리라.
“사건의 앞뒤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화산으로서 무고한 이를 핍박하려던 것이었으니 말이야. 이를 두고 여기저기서 많이 이야기가 나왔다네. 화산에 속한 이들도 그리 곱게만 보고 있지 않네. 매화검수장 그 친구에게는 당분간 근신하라는 명을 내렸지.”
“저도 잘한 것이 없으니…….”
주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상황이 급박했다곤 하나 그 당시 자신 역시 머리에 피가 끓어오른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그 때문에 상대의 도발을 받아들였고,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가. …어찌 되었든 이러한 은원은 서로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것.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감하는 바입니다. 다만, 그 방향에 있어서…….”
“물론, 강제할 생각은 없네. 자연스럽게 원만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지.”
선혁우는 잠시간 탁자를 두들겼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한 채 생각에 잠긴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행보엔 나름대로 관심이 있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이 있다네. 작년 전반기에는 남궁세가, 하반기에는 사천당가로 갔었다지. 그것도 자네가 가르치는 후기지수들과 함께.”
“…그렇다는 것은?”
“올해 전반기 휴관에는 화산에 오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중한 초대로 맞이하겠네. 검절이라면 그러한 값어치가 있지.”
“…….”
뒤쪽에 있던 선청우 역시 생각지 못했던 묘안이라는 듯 무릎을 쳤다.
“나쁘지 않군. 화산에서 얽힌 은원은 화산에서 풀면 되는 것이니.”
“자네로서도 고수와의 대련은 마다할 것이 아니겠지?”
“대련입니까.”
제법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신지경의 벽에 가로막혀 정체에 이른 상태였다.
학관을 벗어나 화산의 고수와 비무를 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받는 계기가 될 터.
“물론 자네 휘하 후기지수들도 성심껏 대접하겠네. 이쯤이면 괜찮은 제안이지 않은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하, 호탕해서 마음에 드는군. 자세한 이야기는 정해지는 대로 우연이 그 아이에게 전달해놓겠네.”
화산 쪽에서 내미는 손을 굳이 뿌리칠 이유는 없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면 생각을 좀 해보겠지만, 상태창에 표시된 호감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밑에 있는 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더욱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남사일의 의지가 아닌가.
필요할 때 조언을 해줄 뿐, 앞에 나서서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미안허이.”
자리에서 일어난 선혁우는 다시금 주호의 손을 다잡고 크게 흔들었다.
“후우…….”
그 뒤쪽에 있던 선청우는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아 다행스러운 한숨만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
무림맹에서 한창 구파일방과 세가연합의 회합이 있을 무렵, 남사일은 제 개인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역시 무림맹에서 있는 회의에 초청을 받았지만, 정중하게 거절을 표명했다.
이전에도 몇 번 무림맹과 연계해 마교의 뒤를 추적하거나 조사를 해왔기에 같은 맥락이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의의 참석자 중 반갑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 장문인을 하라면서 압박해올 것이 분명하거늘.’
당소혜를 치료하기 위해 자소단을 사용한 것에 한 점 후회는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저리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학관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노라면 오히려 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자소단은 장문인의 자격.
그것을 주호의 손에 넘길 때부터 장문인의 자리를 포기했지만, 사문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후우…….”
남사일은 잡념을 지운 채 재차 검을 휘둘렀다.
매화선풍검이라는 별호에 걸맞은 유려한 매화 검법이었다.
작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지로 어느덧 절정의 완숙에 이르러 그다음 영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사일은 두 눈을 감은 채 사문의 다른 고수들을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제 스승인 선청우와 화산의 장문인, 그리고 매화검수장이 펼치는 고절한 수준의 매화 검법이 그려졌다.
자신과 같은 원류를 둔 검들이었지만, 남사일은 어째서인지 그것이 전부 와닿지 않았다.
‘원인은 그 친구일 테지.’
주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뿜어지는 푸른 섬광을 그는 아직 잊지 못했다.
특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아선 매화검수장 조원일을 꺾은 그 검은 남사일에게 있어서 크나큰 충격을 지었다.
절그럭.
한바탕 초식을 펼치고 연무장 위에 우뚝 멈춰 선 남사일은 조용히 제 검을 바라보았다.
주호의 생각이 머릿속에 떠나질 않았다.
물론 그 이전에는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다.
어찌 된 것인지 교관으로 들어왔을 당시에도 그리 젊은 나이에 자신과 비슷한 경지였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울 지경이었지만, 순식간에 추월당하고 말았다.
질투도 그 범주가 있기 마련이다.
격차가 아득해지면 그저 경외밖에 들지 않았으니.
“……?”
남사일은 문득 연무장 문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고, 이내 그곳에 서 있던 주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네, 여기까지 어인 일인가.”
남사일은 반가우면서도 사뭇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는 무림맹에서 있는 회의에 참석해있을 터인데,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인가.
하지만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온 주호는 제 허리춤에 있는 검을 툭 치며 말했다.
“많이 복잡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가볍게 대련이라도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