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그러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겠소.”
사도 맹주인 철혈패검의 중독과 더불어 주호가 검마를 쓰러뜨렸다는 사실로 장내의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해졌다.
회의 일정은 한 주에 걸쳐서 진행되는바. 오늘만 날이 아니었기에 단철량은 얼마 후 회의의 끝을 고했고, 그 직후 참석자들을 위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회의에 동석할 수 있는 것이 두 명 내지 세 명이었지 무림맹 방문에 있어서 인원에 제한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각 가주나 장문인 대부분 후계 구도를 잇는 후기지수나 명성 있는 고수들과 동행했다.
연회장 안은 열여덟 문파의 인원들로 북적거렸다.
이번 모임은 회의도 회의였지만, 구파일방과 세가연합 간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각자 삼삼오오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기도 하구나.”
구석에 있던 주호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장내를 바라보았다.
누가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연회장 절반을 기준으로 왼쪽이 세가연합, 그리고 오른쪽이 구파일방으로 딱딱 나뉘어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듯하다. 간간이 그것을 넘어 대화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주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장문인과 가주를 비롯해 각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은 그가 어릴 적부터 현역에 있던 이들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우러러보게 되는 명성이었거늘, 함께 한자리에 있게 되다니.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명 한명 상태창으로 그 신상을 파악하여 혹시라도 있을 간자를 색출해내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그들 사이에는 혈천신교의 간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전의 섬뢰단주와 같은 특별한 유형이 아니라면 남부럽지 않을 그들이 굳이 외세와 손을 잡을 이유는 없었으니.
‘맹주님 쪽은 잘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군.’
단철량은 소림의 방장, 그리고 무당의 장문인과 함께 다른 곳에서 긴밀한 이야기 가운데 있었다.
주호의 부탁으로 사신문과 혈천신교에 관한 논의를 하는 중으로, 무당은 몰라도 소림은 긴 역사 동안 몇 번의 공조를 통해 서로 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협력을 끌어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터.
“…….”
사색에 잠겨있던 찰나, 문득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회의장에 있었던 일이 새어나간 것이리라.
사도 맹주 쪽의 이야기는 대외적으로 발설하지 않을 것을 부탁했지만, 그가 검마를 쓰러뜨린 것은 맹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근래 화제가 된 상황에서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여기 계셨네요.”
슬쩍 눈치를 보내던 이들이 그에게로 다가오려던 찰나, 먼저 선수를 친 이가 있었다.
남궁연은 짐짓 친분을 과시하듯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처에 있던 여성 후기지수들을 향해 시선이 닿았을 때 그 눈동자가 살짝 싸늘해졌던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리라.
“둥둥 뜬 느낌이다. 예상은 했지만, 다들 노골적이군.”
“교관님은 아직 어디 소속도 아니시니까요. 내친김에 어떠세요? 남궁 세가에 적을 두시는 것은. 부담스러우시다면 식객으로부터 있으셔도 괜찮은데.”
주호가 물잔을 두들기며 말하자 그녀는 슬쩍 눈을 빛내며 권유해왔다.
제 딴에는 자연스럽게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노골적으로 보이는 그 목적에 주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입을 열 찰나, 한 남자가 남궁연의 뒤를 헐레벌떡 쫓아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 대협, 오랜만입니다. 격조하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이제는 단주 님이라 불러드려야겠군요.”
“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섬뢰단의 부단주였던 남궁진영이었다.
그는 저번 일로 공백이 되어버린 섬뢰단의 단주 직에 올랐다.
비록 좋은 계기로 얻은 기회는 아니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전보다 더욱 진중해지고 중후해진 분위기에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흘렸다.
“그나저나 어째서 혼자 계시는 겁니까. 저희도 방금까지 주 대협을 주제로 열띤 이야기 중이었는데.”
“너무 잘나서 부담스러운 건가 봅니다.”
“하하하, 그렇기도 하겠군요. 하긴 대협께서 워낙 뛰어나셨어야죠.”
남궁진영은 넉살 좋은 태도로 그 말을 받았다.
“맞아요. 사실 명문이라는 족속이 다 그렇거든요.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단 은근한 관심을 드러내서 상대 쪽에서 다가오게 만드는 그런 고약한 족속이니.”
“하하…….”
남궁연의 날 선 어조에 남궁진영은 애써 당황을 숨기며 제 뒤쪽을 가리켰다.
“참, 가주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냐고 여쭈어보셨습니다.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도 있으시다더군요.”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검제의 초대였다.
거리낄 것도 없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들을 따라 세가 연합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남궁세가에선 섬뢰단이 가주의 호위로 왔다.
보통은 세가 제일 무력 조직인 제왕단이 움직였지만, 작금의 일로 위축되어 있던 그들의 위상을 다시 높여주기 위한 처사였다.
“어서오게!”
안쪽 상석에 자리하고 있던 남궁한이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엔 거나하게 취한 상태인 백발의 노인이 함께 앉아 있는바.
한쪽 벽에 기대어 있는 커다란 도를 보아하니, 그 신분 내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제(刀帝) 팽진호.
하북팽가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검제 남궁한과 쌍벽을 이루는 고수였다.
“검제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얼굴빛을 보니 잘 지낸 듯하군.”
“자네가 말한 것이 이 청년이었나.”
팽진호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아까 전 회의장에서 주호가 기세를 드러내었을 때부터 흥미가 가득했다.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이토록 고강한 경지라니.
마음 같아선 가문의 여식과 짝지어주고 싶었지만, 남궁한의 거센 견제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주호라고 합니다. 과분하게도 검절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주호가 포권을 하자, 그 주변에 있던 이들 역시 흥미를 표했다.
하지만 남궁한과 팽진호를 의식한 것인지 티를 내진 않고 각자 이야기를 나누었다.
“검 좀 쓴다지.”
“아직 어설플 따름입니다.”
“하하하, 검제 이 친구가 그리 칭찬했는데 어설프기는 무슨. 자자, 일단 한 잔 마시게.”
팽진호는 소문대로 호탕한 성격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호에게 술잔을 쥐여주고 손수 그것을 가득 채웠다.
거리낄 일은 아니기에 주호가 그것을 시원하게 비워내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주호의 몸이 들썩일 정도로 그 어깨를 두들기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듣던 대로 화통하군. 이러니 내 아들내미가 그렇게 된통 당할 수밖에 없겠지.”
“허어, 참!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니까!”
“아니, 해야겠네. 그렇지 않아도 제 재능만 믿고 오만방자하던 놈인데 이번에 제대로 임자를 맞는 것이지.”
서로 투덕거리기 시작한 둘을 보며 주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실전의 이해 강의 첫날, 팽우혁과 남궁휘에게 기세를 내뿜어 압박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일은, 무심코 힘이 들어갔었습니다.”
“아니, 이해하네. 내 아들놈이지만, 성격이 좀 꽉 막혀있긴 하지. 원래 제 잘난 맛에 사는 그런 뒤틀린 부분은 일찍 고치는 게 낫지 않은가.”
언제 한 번 진짜배기 천재에게 코가 깨질 줄 알았다며 그는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천재라.’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배기 천재는 입신지경에 이른 눈앞의 둘이 아니던가.
범인(凡人)은 감히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영역에 도달했으니.
“……?”
그렇게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주호는 뒤쪽이 조금 어수선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시선을 보내자, 가득한 인파 사이로 익숙한 얼굴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화검선 아니시오.”
“여긴 어쩐 일로?”
화산파의 일 장로로, 매화선풍검 남사일의 스승인 선청우였다.
“오랜만이외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팽진호는 잘 알지 못했기에 그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남궁한은 화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옛적에 전해 들었다.
그렇기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보냈을 때, 선청우가 주호를 향해 말했다.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는가.”
“…….”
주호로서도 느닷없는 권유였다.
하지만 어색한 그의 표정을 보니 자의로 하는 것은 아는 듯했다. 아마 그보다 더 높은, 아마 높은 확률로 장문인의 명이라 예상되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이라.’
주호가 슬쩍 남궁한을 바라보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오늘만이 날은 아니지. 나중에 따로 보세.”
“나도 잊지 말고 불러주게나.”
“이해해주셔서 감사하오.”
선청우가 남궁한과 팽진호에게 정중한 태도로 포권했다.
“…교관님.”
이때까지 주호 옆에서 잠자코 있던 남궁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동행하고 싶은 기색이 굴뚝같아 보였지만, 앞뒤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애써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곧 돌아오마.”
“네.”
주호는 곧바로 선청우의 뒤를 쫓았다.
자소단의 일로 입은 은혜가 있기에 군말하고 따른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한 번은 거절했으리라.
“…미안하네, 자리를 방해해서.”
“아닙니다. 헌데 어쩐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 물음에 선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문인께서 자네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군. 다만, 세간의 이목이 있어 좋게 비치지 않을 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조용하게 말이야.”
“이전의 소란 때문이군요.”
주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당소혜를 위해 화산에 갔던 일이 천파만파로 퍼져 있었다.
매화검수장 매화검객 조원일과의 일전은 검절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니.
“자넬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네. 그 건은 화산으로서도 면목이 없는 일이야. 장문인께서는 매화검수장에게 엄한 질책과 함께 당분간 근신의 명을 내리셨네.”
“그렇군요.”
사실 주호로서는 통쾌할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남사일과의 일이 얽혀 있다고 할지라도 주호는 엄연한 외부인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다짜고짜 그렇게 습격을 가해오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선청우는 잠시간 말을 머뭇거렸다.
도대체 무얼 말하고자 하기에 그가 그런 것일까, 주호가 시선을 보내자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외부인인 자네에게 부탁할 것도 아니고, 부탁하기도 미안한 이야기네만.”
연회장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자리까지 도달했다.
주호는 내심 긴장했다. 혹시라도 선청우 되는 경지의 고수가 기습을 가해온다면 성히 막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의 예상을 조금 벗어나는 일이었다.
“남사일, 그 아이가 화산의 장문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