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밤이 깊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주점 안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학관 첫날을 맞이한 관생들이 저마다 기분을 내고 있을뿐더러,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 일행 역시 분위기에 한껏 취해 목소리를 올리고 있었다.
“교관님께도 권유해볼 것을 그랬나?”
“하긴, 교관님도 우리와 그리 나이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
“가끔 나도 그걸 잊어버리네. 간혹 보면 어지간한 노고수보다 무서운 기세를 내뿜으시니.”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와 그들의 나이는 고작 여섯 살 차이. 한두 해 늦게 입관하여 졸업을 앞둔 이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중했으니 감히 스스럼없이 친한 척하는 이들은 이 자리에 있는 일곱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생활도 이제 삼 년인가. 다들 학관을 졸업하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선우연이 운을 띄우자 다들 술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여행하고 싶군. 여기저기 떠돌며 경험도 쌓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거지.”
“여행이라, 나쁘지 않겠군.”
당천유가 살짝 들뜬 얼굴로 말해오자 철대환 역시 흥미가 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같이 갈 생각이 들면 말하게. 혼자 가는 것보단 둘이 낫고, 둘보단 셋이 나을 터니.”
당천유의 권유에 선우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 각자 사문이 있었다. 학관을 졸업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개인의 몸으로 얼마간 강호를 주유하며 떠도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긴 하군.”
“어떤가, 자네도.”
“고민해보겠네. 확실히 혼자보단 같이 돌아다니는 것이 더 재밌겠군.”
사파의 시정잡배들에게 고통받는 마을을 구해주며 선행도 하고, 마주치는 고수와 비무하며 서로 손속도 나누고 그러면서 강호인으로서 경험을 쌓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우연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들은 다른 이들 역시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남궁연 흥미를 드러낸바. 물론, 동행하고 싶은 상대는 이들이 아니었을 따름이었다.
“여행이라.”
제 친우들이 다시금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이, 유일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위천강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옅은 한숨을 뱉어냈다.
같은 정도(正道)의 길을 걷는 이들과 달리 그는 마도(魔道)의 출신이었다.
즉, 태생부터가 괴리되지 않았는가.
당장 하반기까지 계속 학관에 다닐 수 있을지부터 불투명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네.”
“혼자 가도 괜찮겠나? 헛디뎌서 넘어지지 말게.”
농을 던져오는 선우연의 말에 피식 웃은 그는 가볍게 손을 휘젓고는 밖으로 향했다.
봄이 왔지만, 아직 밤공기는 쌀쌀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거리낌 없이 어둠 가운데로 발걸음을 내디딘 위천강은 구석진 벽에 등을 기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말소리가 적막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듯싶다. 그는 고개를 들어 홀로 청명한 달을 바라보며 시조 몇 마디를 흥얼거리고는 이내 두 눈을 감았다.
‘너무 빠져들었나.’
타성(惰性)에 젖었다.
중원에 나와 정천학관에 온 것은 단순한 유희였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만남이 계속되자 인연이 되었고, 흔치 않은 난관은 그 우애를 끈끈하게 만들었다.
위천강은 찰나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자신이 평범한 무관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들과 만났었더라면.
“쯧.”
할 필요가 없었고, 하지 말았어야 할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짧게 혀를 찬 그는 이내 잡념을 털어버리곤 어둠에 잠긴 골목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다, 무영(無影).”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온몸을 검은 일색으로 둘러싼 흑의인이었다.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이 가는 호를 그리며 작은 주인에게 예의를 표한바. 위천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개를 든 그는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신수가 훤해지셨군요. 이 무영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자그마하던 소교주님께서 벌써 이리 장성하시다니.”
“매번 실없는 이야기는.”
그 스스럼없는 태도에 위천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천마신교 교주 직속 무영대.
그 대원은 각각 숫자나 색으로만 불리며 철저하게 물밑에서 움직여 교주인 천마의 뜻을 전하는 조직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반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필시 좋은 소식을 가져온 것이 아니리라.
“교주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어이쿠, 첫 마디부터 너무 무겁군.”
“저는 그저 그 말씀을 전할 뿐이니까요.”
무영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위천강을 향했다.
“본교의 고수들이 하산한 것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청해로 넘어가는 곳까지 장악을 완료했고, 교주님의 명이 떨어지는 즉시 곤륜파도 공격할 예정입니다.”
“그건 즉…….”
“예. 전쟁이 머지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위천강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본교가 전쟁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중원 진출이야말로 자신의 조부이신 천마께서 바라시는 숙원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평온한 일상에 젖은 지금은 지금의 삶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소교주께서도 오래 기다리셨지요.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개전의 시일은 교주님의 의중에 따라 갈리겠지만, 그리 머지않겠지요.”
위천강의 심중을 모르는 무영은 앞으로의 일이 기대된다는 듯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교주님께서 내게 남기신 전언은?”
“아, 잡설이 길어졌군요. 학관의 이번 학기가 끝나면 이곳에서의 장난을 정리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다른 장로들은 여기서 뭐 하냐고 성화였지요. 그 노친네들 성격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가.”
학관이 끝나기까지 약 석 달.
적어도 그때까지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알겠다. 교주께도 그리 전하도록.”
위천강이 손을 휘젓자 무영은 가볍게 허리를 숙이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홀로 남은 그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그리도 청명했던 것이 지금은 어째서인지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마도의 종자가 이리 유약하다니.’
위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소천마라 할 수 있겠는가.
마도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설사 소교주인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 목을 물어뜯을 이들이 여럿 있었다.
철썩.
손을 들어 제 양 뺨을 두들긴 위천강은 표정을 정리했다.
자리를 비운 지 너무 오래되었기에 서둘러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자신을 반기는 친우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침 왔군. 어디 똥통에 빠진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네.”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고작 이 정도 마신 것으로 취해? 오늘은 끝날 때까지 끝내지 못하네. 먼저 뻗는 이가 술값을 내는 것으로 하지.”
거나하게 술에 취한 당천유의 놀림에 그는 넉살 좋은 표정을 지으며 되받아쳤다.
나중 일이 어찌 되었든 어차피 나중 일이었다.
자신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기에 위천강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을 한껏 만끽할 생각이었다.
***
얼마 남지 않은 추위가 물러가고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일급 교관에 오른 주호의 일과는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라 부르기에 과언이 없었다.
할당된 강의는 일주일에 하나였고, 남궁연을 비롯한 다른 후기지수들의 수련을 봐주는 것도 매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삼사 급과 비교해 매일매일 처리해야 할 업무 또한 적었기에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학관 내부의 이야기였다.
대천산에서 내려온 천마신교의 마두들을 추적하고 그 목적을 밝히기 위해 온 강호가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대부분 그것을 정마대전의 단초라 여기는바.
그렇기에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한 시국이었다.
물론, 사신문 역시 그것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나, 지금 단계에서 주호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수련하는 것밖에 없었다.
“…….”
막, 정오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개인 연무장 한가운데 가부좌를 튼 그는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구결에 따라 청룡신공의 기운을 이끌었다.
[상태창]
이름: 주호
별호: 월영사신
직업: 정천학관 일급교관
나이: 스물일곱
소속: 정천학관, 사신문
경지: 초절정(十/十)
무공: 청룡신공(八成)
청룡신공은 어느덧 팔성에 이르렀지만, 경지는 여전히 몇 달 전과 같이 벽에 가로막힌 그대로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거듭해도 이전에 느꼈던 입신지경 그 너머의 어렴풋한 느낌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만.’
현재 이룩한 경지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나다 할 수 있다.
더욱이 세간에는 아직 자신의 실력을 반절도 채 보이지 않았거늘 검절(劍節)이라는 별호까지 얻지 않았는가.
하지만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본능. 지금 이 자리에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더욱이, 주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혼원일극신공(混元一極神功)]
신마(神魔)의 기억을 봄과 동시에 해금된 무공이었다.
이때까지 무공 목록 최상위에 있던 청룡신공을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며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 무황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기운을 다뤘다.’
하나는 정순한 청룡신공의 기운, 다른 하나는 마기에 가까운 흉악한 것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위천강이 사용했던 천마신공과 흡사한 느낌이 강했다.
감은 두 눈 위로 그 압도적인 무위가 생생하기만 했다.
정도와 마도의 기운이 합쳐져 회색에 이르렀고, 눈부신 빛무리가 그 일대를 뒤덮는.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전신의 감각이 섬짓해지는 광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 주호의 목표는 청룡신공의 대성이었지만, 더 위의 경지가 있다면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다른 무공과 달리 혼원일극신공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균형이 어긋나있습니다.]
상태창에 기재된 수십, 수백 가지의 무공은 열람을 희망하면 그 뿌리부터 구결까지 자유롭게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혼원일극신공을 선택했을 때는 어째서인지 같은 말만 반복하며 거절의 의사를 보일 뿐이었다.
‘균형. 청룡신공과 같이 상반되는 이 기운을 다룰 무공을 익혀야 하는가.’
내공의 운기를 끝낸 주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역시 같은 신공 반열에 드는 천마신공이었지만,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자신의 몸으로 천마신공을 익히려면 최소 비슷한 경지 이상의 고수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천마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였다.
헛웃음을 내뱉은 그는 수련을 위해 자리를 털며 일어날 찰나, 문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연이더냐.”
“교관님.”
남궁연의 등장에 칙칙했던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진 듯했다.
마치 한 떨기 수선화가 흐드러지듯 화사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주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수련하시는 중인데 방해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표정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구나.”
“티 났나요?”
새침한 척 표정을 바꾸는 그녀의 모습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용건이 무엇이더냐.”
“용건이 있어야만 찾아올 수 있는 건가요?”
남궁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빤히 주호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자 이내 툴툴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께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며칠 뒤에 맹에서 기밀 회의가 있는 것 아시죠?”
“들었다. 세가 연합의 가주들과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모인다지.”
어쭙잖은 이들이 아니라 정말로 정도 무림을 이끌어 나가는 태산북두들의 모임이었다.
듣기로는 이례적으로 소림의 방장과 무당의 장문인까지 참석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그 무게감이 한층 달라졌다.
“세가 연합 측의 참고인으로서 참석하지 않겠냐고 여쭈어보라고 하셨어요. 이건 제가 생각해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데…….”
“검제께서?”
그 말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