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허공에 검을 띄워 올리고 있던 주호가 멋쩍어질 정도로 길었던 그것은 일행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당천유에 의해 깨어져 나갔다.
“…무슨 장치 아닙니까?”
그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검 주위를 훑었다.
뒤이어 위천강 역시 가늘게 뜨며 그것을 건드렸고, 이내 손 위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자 조그마한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이 무슨.”
후기지수들의 반응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남궁연은 사뭇 자랑스럽다는 듯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고, 천후는 당연하다는 듯하면서도 신기해하고 있었다.
선우연과 철대환은 그저 멍하니 놀랍다는 눈치로 그것을 바라보았고, 의심이 많은 축에 속한 위천강과 당천유만이 더듬거리는 손길로 검 주위를 연신 훑고 있을 뿐이었다.
“교관님 무위를 생각한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오로지 악비산만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콧김을 크게 뿜어냈다.
마치 자신이 한 일처럼 의기양양해 보이는 그런 모습에 선우연이 쓴웃음을 지을 찰나, 주호는 팔짱을 풀었다.
“다들 격공섭물은 알고 있겠지?”
“허공을 격하고 무언가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까.”
철대환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격공섭물은 그리 높은 경지가 아니다. 절정 고수라면 제 한 치 앞에 있는 물체를 어렴풋하게 움직일 수 있고, 초절정 경지에 있는 고수라면 이처럼 유려하게 변화를 줄 수 있지.”
주호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것을 따라 검이 허공을 선회하며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히 고절한 무학의 묘리 같은 것도 필요 없다. 경지가 상승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이치 같은 것이니.”
“저희도 할 수 있는 건가요?”
호기심이 깃든 남궁연의 물음에 주호는 잠시 생각했다.
“할 줄 몰라서 그렇지, 막상 한 번 해본다면 어렵진 않을 것이다. 기준을 절정에 둔 것도 경지와 일맥상통하는 깨달음 때문이니.”
그 말에 다들 깊은 감탄을 흘렸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쉬이 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명문 출신일지라 하더라도 깨달음과 경지란 요소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바.
오히려 그런 이들일수록 더 폐쇄적인 경향이 컸다.
“그렇다면 이기어검술은 무엇입니까? 이것도 격공섭물의 일종 아닙니까?”
선우연이 손가락 끝으로 검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주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묘리를 품고 있던 그저 검을 빨리 움직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막상 그 경지에 오르고 보니 실상은 생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흔히 검의 끝은 심검(心劍)이라고들 하지. 베고자 하는 의지, 의념만으로 날을 세울 수 있으며 그 날카로움은 어느 명검에 못지않은.”
“심검.”
위천강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말로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단어가 아니던가.
사실상 전설 속에서나 거론되는 경지였지만, 그것이 주호의 입에서 거론되자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나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진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기대 어린 시선에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단철량이나 남궁한 정도 되는 고수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추측 영역에 불과한 경지였다.
그렇기에 다들 아쉬운 탄식을 내뱉을 찰나, 선우연의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이기어검술이 아니라 단순한 격공섭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다들 시선을 보내왔다.
주호 정도의 고수라면 그런 고절한 수법을 보여도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지만, 이기어검이 아니라 단순한 격공섭물이라는 것인가.
그 말에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손을 뻗었다.
“그전에 이기어검이라는 것이 어디에 중점이 두어진 것인지 알아야 한다.”
신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청룡신공의 내력이 그 위에 깃들자 시퍼런 강기가 솟아올랐다.
선명할 정도로 푸른 그것에 지켜보고 있던 관생들이 모두 감탄을 흘렸다.
“알다시피 강기라 불리는 것이다. 검기, 검사, 강기. 모두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것으로 유형화된 진기가 의와 념에 따라 깨달음의 경지로서 형태로 구현된 것이지.”
쉬이이익-!
신검이 허공을 베어 갈랐다.
초식이 깃들지 않은 단순한 횡 베기였지만,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기세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쏘아진 강기는 멀리 가지 못한 채 허공에 별 무리처럼 반짝이며 흩어져버렸다.
잠시간 그것에 눈길을 빼앗겼던 후기지수들은 다시 정신을 차린 채 주호를 바라보았다.
“강기는 보통 절정의 끄트머리에서 초절정의 초입부터 그 형태가 자리 잡는다. 너희 중 가장 뛰어난 이가 초일류의 완숙에 이르렀지. 아직 먼 경지긴 하나, 지금의 성장세를 본다면 그리 요원한 것도 아니다.”
“그렇습니까.”
선우연은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제 손을 주억거렸다.
검기상인의 경지에 이르러 검기 발현에 성공했을 때만 하더라도 흥분에 겨워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기억이 있는 듯 모두 고개를 같은 표정이었다.
“허나 강기니 검기니 이런 것들은 모두 외적인 요소다. 검이란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그 형태만 흉내 낼 뿐이지.”
“흉내 낸다는 것은……?”
“신검합일과는 반대되는 맥락이다. 검을 신체의 연장선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체로 보는 것이다.”
신검 위로 피어 올라있던 시퍼런 강기가 사그라들었다.
주호는 후기지수들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높이 세워 올렸다.
“이기어검의 요지는 어검에 있다. 검을 다스린다는 것.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파아아아앗-.
“검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히 한다는 것이지.”
눈부신 빛이 그 위로 서리기 시작했다.
검강이나 검기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변화였다.
“그 요소 하나하나 전부, 먼지 한 올까지 손안에 쥐었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어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열하는 빛이었다.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빛이 검 위를 뒤덮으며 제 존재감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이기어검. 그 앞의 두 글자는 격공섭물과 같은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뒤의 두 글자가 중심을 지키지 않는 이상 그저 비검술(飛劍術)에 불과한 잡기가 될 뿐이니.”
쉬이이익-!
“그 묘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이기어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줄기 섬광이 그 가운데를 갈랐다.
후기지수들은 누구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자신 앞으로 닥쳐온 빛줄기에 움찔하며 뒷걸음질쳤을 뿐이었다.
“…….”
그중에도 위천강은 등이 흥건해질 정도로 흘렸다.
‘내가 제 무덤을 팔 뻔했구나.’
하루 이틀로 이러한 경지에 올랐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작년 자신이 습격했을 당시에도 아득히 월등한 격차가 있었다는 것일 터.
어쩌면 자신이 습격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해봤자 지금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수준보다 한참은 높은 무학이니.”
턱.
신검을 되돌린 주호는 그것을 검집에 수납했다.
그러곤 멍하니 있는 후기지수들에게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허나 이것 또한 너희 성장에 밑거름이 될 테지. 언젠가 다시 떠올리게 된다면 도움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슬쩍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명했던 그 색은 어느덧 저물어가는 태양에 의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담우양과 약속했던 반 시진에 가까워진바.
그렇기에 아직 멍하니 있던 이들에게 끝을 고했다.
“오늘은 첫날이니만큼 여기까지 하지. 다음부턴 작년에 했던 방식과 같이 진행하겠다. 그럼 다들 좋은 저녁 되도록.”
주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나고 한참 뒤가 돼서야 누군가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 턱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군.”
선우연의 말 직후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들 힘이 빠진 듯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주저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지린 건 아닌가?”
“이번엔 솔직히 조금 그럴 뻔했네.”
위천강의 놀리는 듯한 말에 당천유가 쓴웃음을 흘렸다.
이기어검의 끝이 자신에게 닥쳐왔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주호의 표정을 보니 의도한 것은 아닌 듯했지만, 그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며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기어검이라니. 교관님이 분명 올해로 스물일곱이셨지?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군.”
푸념하는 듯한 그의 말에 천후가 슬쩍 고개를 돌려 주호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입신지경에라도 이르신 것이 아닌지 궁금하군.”
“입신지경? 신화경이라 불리는 그 경지 말인가?”
그 말에 선우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당대 신화경에 이르렀다고 알려진 고수는 몇몇이 있었다.
무림맹주 검선(劍仙) 단철량이 그러했고, 가까이에는 남궁연의 아버지인 검제(劍帝) 남궁한, 그리고 위천강의 아버지인 천마(天魔)까지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지긋한 나이에 그러한 경지를 이룩한 것이 아니던가.
그에 반해 주호의 나이는 이제 막 스물 중반이 넘었을 따름이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에이, 그래도 설마…….”
“아니, 교관님이라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방금 눈앞에서 보지 않았나. 그 신기(神技)와도 같은 검술을.”
선우연이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자, 악비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확실히, 교관님이라면 모르겠네요.”
남궁연 역시 고개를 들어 주호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교적 다른 이들보다 주호와 가까웠기에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검마와 충돌이 있었던 산서의 일까지 함께 겪었지 않은가.
검마(劍魔)라 한다면 강호 백대 고수 중 수위에 자리한바.
그 위로는 정말로 쟁쟁한 이름들밖에 없기에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혹시 교관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한 이가 있는가?”
“…….”
당천유의 말에 다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게 직관적으로 설명되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엔 아직 자신들의 수준이 얕았다.
“…이건 좀 자존심이 상하는군. 나름대로 호의를 베푸셔서 상위의 무리를 알려주신 것일 텐데 정작 그것을 알아듣질 못하다니.”
위천강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귀가 막혀있으니 답답할 따름이었지만, 천후가 짤막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교관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지금 당장 우리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밑거름이 될 테니 다들 머릿속 한구석에 기억하고 있으면 될 걸세.”
“…하긴, 그렇지? 아직 검강도 힘든데 이기어검은 언감생심이긴 했어.”
그 말에 위천강은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어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보고 있던 선우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끝나고 술자리라도 할까 싶었네만, 분위기도 이렇게 되었으니 수련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거랑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어떤 일이든 첫술에 배부르기 쉽지 않은 법이지 않은가. 조급해하지 말고 오늘은 좀 즐기세.”
“자네는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군.”
“명색이 풍류 공자가 아닌가. 바늘 가면 실이 가듯 당연한 법이지.”
“한결같은 그 모습에 마음이 놓이네.”
다급해 보이는 위천강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