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첫날 강의가 모두 성공적으로 끝났다.
주호는 제 개인 집무실에 앉아 휘하 교관들의 보고서를 받았고, 수강 명단을 확인하며 그 위에 서명을 적어갔다.
“일급 교관이 된 것이 좋긴 좋군.”
작년을 생각한다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양의 업무였다.
자신은 운이 좋게 잡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다른 사급 교관들은 잦은 야근이 기정사실로 되어 있지 않았는가.
일급 교관들의 귀찮은 업무는 그 보조 격인 이급이나 삼급 교관들에게 배정되기 마련.
그렇기에 주호는 느긋한 모습으로 차를 내리며 여유를 즐겼다.
똑똑-.
그러던 중 누군가 그의 집무실에 방문했다.
주호가 문을 여니 익숙한 얼굴의 교관이 신기하단 표정으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일급 교관의 집무실인가. 신기하기 짝이 없군.”
“명단 제출 건입니까.”
“그렇네. 작년에 자네가 했던 것처럼 각각 비무를 해보느라 조금 늦었네.”
“고생하셨군요. 어땠습니까.”
“흠.”
담우양은 주호가 내온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남궁휘 관생은 말할 것이 없었네. 행실은 가벼워 보이나, 남궁이란 이름이 그리 경망스러운 것은 아니지. 뒤에서 스스로 재능을 갈고닦으며 고단한 노력을 한 것이 검에 묻어 나오더군.”
“극찬이군요.”
“노력한 자에게는 그만한 찬사가 뒤따라 하지 않겠나. 하여튼 차석이라는 성적이 아깝지 않았네. 물론, 작년의 이들보다 아쉬운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작년이 특이한 유형이 아니었겠습니까.”
주호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작년엔 사신문의 계승자부터, 천마신교의 소교주, 화산의 소신룡 등등 하나같이 휘황찬란한 이름이었지 않은가.
간혹 특출난 이들이 하나둘 정도는 나오긴 했지만, 그 정도는 학관 역사상에서도 이례적인 일일 터.
차라리 올해가 평균에 부합되는 수준일 것이다.
“당소혜 관생은 자네 부탁에 따라 보류했고.”
“감사합니다. 천유 그 녀석이 하도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실전의 이해 강의 바로 직전, 당천유가 그에게로 찾아왔다.
처음엔 살짝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당소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주호 역시 받아들였다.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인다고 하지만, 몇 년 동안이나 무형지독에 피폐해진 몸이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녀가 수강하는 다른 강의의 교관들에게도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네 동생은.”
“…….”
주호는 살짝 긴장했다.
나름대로 재능도 있어 보이고 스스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라버니로서의 시선.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보일 수 있었기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 나오려던 말도 들어가겠네.”
“하하.”
주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를 보며 담우양은 작게 웃음을 토해내었다.
“옛적부터 동생 이야기를 하면 표정이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이건 중증이로군.”
“그래서, 향이는 어떻습니까.”
“어떻고 자시고 할 것이 있겠나. 누구 동생인데.”
어깨를 으쓱이며 말해오는 담우양의 모습에 주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누구 동생인데.”
“무공을 익힌 지 채 반년이 되질 않았다지? 그런데도 그런 수준이면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 기본기가 탄탄한 것뿐만이 아니라 보는 눈이 남달라.”
“눈이 남다르다?”
“주변에 자네를 비롯해 고수들이 많아서 그런지 시야가 넓네. 아직 한번밖에 검을 나눠본 적이 없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네. 아니, 간간이 아쉬운 감정을 삼키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 너머까지 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그것까지는 주호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사뭇 자랑스럽다는 기색이 그 얼굴에 배어 나오자 담우양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팽우혁 관생 그 친구인데.”
“예. 입관 수석이었죠.”
주호는 이미 주예향을 비롯해 다른 이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감히 내 동생을.’
보는 안목은 제법 칭찬해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담우양 역시 마찬가지인 심정인 듯 짧게 턱을 당겼다.
“재능은 확실히 있네. 교관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무안하지만, 부러울 정도야. 과거의 나보단 확실히 뛰어나지. 하지만.”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군요.”
“지닌 실력에 비해 콧대가 너무 높더군. 명가 특유의 자존심이 그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더군. 딱히 나무라는 것이 아니네. 그것 또한 무인이 지닌 특성 중 하나가 될 것이니. 허나 위를 바라보는 무인에겐 치명적인 요소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요. 제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단초가 되는 것이지요.”
“나와는 정반대의 경우였지.”
담우양은 쓴웃음을 지으며 작년 초를 떠올렸다.
팽우혁이 제 잘남의 취해 있다면, 자신은 제 부족함을 탓하고 있었다.
주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것이 꼬리를 물고 물어 구렁텅이에 빠져들었을 터.
“담형은 그래도 잘 해내셨을 겁니다.”
“쑥스러운 이야기를 했군. 참, 업무는 다 끝났는가. 첫날이니만큼 간단히 친목회라도 열려고 하는데.”
“바로 말입니까?”
“다들 남은 일이 있으니 적어도 반 시진 이후가 될 것 같네. 약속이 있는가?”
“반 시진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그러면 그때 정문에서 보세.”
담우양이 집무실을 떠나갔을 때, 주호는 자리를 정리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약속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었기에 조금 쉬려던 찰나, 그의 눈으로 탁자 한쪽에 놓인 서찰이 들어왔다.
“이걸 잊어버렸군.”
담우양이 오기 얼마 전 사신문으로부터 서찰이 도착했다.
표식을 보니 그리 급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업무를 끝내고 여유롭게 보자고 생각한바.
그렇기에 매듭을 풀어 내용을 읽자니, 이내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서찰은 백호 양인철이 감숙에서 보낸 것이었다.
천우희를 필두로 한 주작단이 사도칠패 측의 세력으로 매복하고 있던 혈천신교의 고수들과 충돌.
적잖은 피해가 있었으나 그와 백호단의 도움으로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그 과정에서 천우희가 혈천신교 측의 고수인 적혈마검과 교전이 있었으나, 훌륭히 쓰렸노라 고하는 승전보였다.
“적혈마검이라.”
작년 교류 대회 때 마주했던 칠혈성의 고수였다.
절정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당시 자신과 박빙을 이룰 정도의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양인철은 서찰 끄트머리에 추신으로 그녀가 지치긴 했으나 상처는 거의 없다며 무사함을 알려왔다.
본래 적혈마검을 쓰러뜨린 정도의 공적이라면 그녀 자신이 자랑스레 서신을 보내왔겠지만, 굳이 양인철이 소식을 알려온 것을 보니 그것에 적힌 것처럼 무탈하지만은 않은 듯싶었다.
예사롭지 않은 수준의 고수였으니 천우희도 꽤 타격을 입은 것일 터.
그래도 무사한 것에 다행이라며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면 그는 열양지기를 일으켜 서찰을 태워버렸다.
“…교관님?”
문가에서 들려오는 미성에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남궁연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가볍게 손을 휘저은 것으로 탄내를 흩어버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게 했구나.”
“아니에요. 교관님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죠.”
남궁연은 작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주호는 곧 밖으로 나갔고, 그녀는 그런 그의 옆으로 나란히 걸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선남선녀 같은 모습에 지나다니는 이마다 하나같이 부러운 눈으로 시선을 보내왔을 따름이었다.
곧 둘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연무장에 들어섰다.
실전의 이해 강의 중 항상 애용하던 곳으로, 이제는 이들의 전용으로 사용되다시피 하는 곳이었다.
“교관님!”
안쪽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이들이 주호를 발견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왔다.
그 면면이 전부 그에게서 사사 받던 후기지수들이었다.
“다들 첫날은 잘 보냈느냐.”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교관님께서 없으셔서 살짝 심심하기까지 합니다.”
“어쩔 수 없지. 이 년 차의 강의는 내가 담당하질 않으니.”
주호가 담당하는 실전의 이해는 일 년 차 관생만 신청할 수 있는 강의였다.
담우양과 같이 삼급 교관이 되었더라면 강의의 보조 교관으로 그들과 다시 재회했을 수도 있겠지만, 일급 교관의 이름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린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희는 이미 교관님 손맛에 중독되어버린 차라.”
위천강과 선우연이 씩 웃으며 말해왔다.
손맛 운운하는 이야기에는 살짝 어지러워져 왔지만,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시간 외의 강의를 신청하고 싶다고.”
“예.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희 전부 신청하고 싶습니다.”
“흠.”
후기지수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바라봐옴에 따라 주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교관에게 따로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학관 내에서도 드물지 않게 있는 일이었다.
주로 같은 문파 소속이거나,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이들이 자주 하곤 했다.
“…….”
좌중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작금 검절의 위세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최연소로 일급 교관에 오른 것도 모자라 세간에 그 명성이 자자하게 퍼지고 있지 않은가.
굵직한 문파들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발을 벗고 나서고 있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
요 일 년간의 친분을 방패로 내세워 부탁한 것이었지만, 거절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딱히 문제는 없겠지.”
“역시!”
하지만 주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그들은 모두 환호를 내질렀다.
“이제 저희도 만만치 않습니다. 교관님께서도 쉬이 보실 수는 없을 겁니다.”
악비산에 이르러선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제 가슴을 두드려왔다.
실제로 그들의 실력은 작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닌가.
천후, 위천강, 악비산, 남궁연.
이 넷은 이미 초일류의 완숙에 이르렀다.
특히 악비산과 남궁연의 성장세가 매섭기 그지없으니, 이내 앞의 둘을 따라잡아도 이상치 않아 보였다.
다른 셋 역시 초일류의 벽을 허물었고, 제각기 학관을 졸업해 강호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수들과 견주어보아도 손색이 없었다.
“그나저나 교관님이 어느 정도로 강하신 건지 궁금하군요. 저희야 다 엇비슷하지만…….”
자기들끼리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위천강이 살짝 궁금하단 눈치로 말했다.
“몇 달 전에 산서에서 사망한 검마가 있지 않은가. 나는 교관님께서 검마와 싸운다고 하여도 밀리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네.”
“하하하, 하긴 이때까지 교관님께서 보이신 무위를 생각한다면 그렇지.”
“사천에 갔을 때 매화검수장과 손속을 겨루셔서 이득을 보시지 않았는가.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다들 자신이 보아왔던 것을 토대로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추론했다.
그러던 와중 선우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기까지 했으니.
“나는 솔직히 교관님께서 이기어검 같은 걸 사용하신다고 하셔도 놀라지 않을 걸세.”
그 말엔 다들 동감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호 역시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고, 팔짱을 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그렇군, 딱히 어렵진 않다.”
그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신검(神劍)이 저절로 뽑혀 나왔다.
분명 누구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지만,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른 그것을 본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이내 경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