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마교의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정천학관은 예정대로 일정을 진행했다.
정문이 활짝 열리며 공식적인 개관을 선포했고, 수많은 관생이 부푼 마음을 지닌 채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첫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에 자리하고 있던 팽우혁은 소리 없는 신음을 흘리며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술기운에 상대의 수준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 채 비무를 신청했고, 제대로 뭘 하지도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다음 날 잠자리에서 깨어난 직후 남궁휘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부터는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괜찮네. 그런 일도 있는 법이지. 그렇다고 해서 당 소저와 주 소저가 자네를 싫어하기라도 하겠는가.”
“그래도.”
“이제부터라도 잘 보이면 되는 것 아니겠나. 누구나 실수는 하네. 중요한 것은 그다음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그런 것인가?”
팽우혁은 근래 부쩍 가까워진 남궁휘의 위로에 얼굴을 폈다.
처음엔 조금 번거로운 이라고 생각했거늘, 거리가 가까워지니 제법 좋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당 소저. 여기입니다!”
그때, 남궁휘는 막 강의실에 들어온 당소혜를 발견했다.
그렇기에 손을 들고 그녀를 부르자, 당소혜와 함께 주예향이 그들의 자리로 다가왔다.
“이틀만이죠? 잘 지내셨나요.”
“하하, 그간 뵙지 못해 쓸쓸했습니다. 주 소저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당소혜와 주예향은 그들 옆에 자리했다.
팽우혁은 그녀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인사를 건네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끙끙거리고 있을 찰나, 당소혜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 괜찮아?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난 괜찮다.”
팽우혁은 건재하단 뜻으로 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술자리에서의 비무는 실수였다.
다시 제대로 싸운다면 그리 허망하게 지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굳이 변명하는 듯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기에 입으로 내뱉진 않았다.
“…주 소저, 좋은 아침입니다. 그때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흥이 올랐던 탓에.”
팽우혁은 애써 용기를 내어 주예향을 향해 말했다.
어쭙잖은 변명보단 정면 돌파가 자신의 성미에 맞았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마음씨 착한 주예향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것을 받아준바. 팽우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는 남궁연을 비롯한 선배들에게 들었던 조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아직 강의가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눴지만, 주위에서 느껴지는 어수선한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마교의 이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마교.”
당소혜의 말에 주예향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주호 옆에 붙어 다니며 적잖게 주워듣는 것이 있었다.
사신문의 존재, 그리고 청룡이니 주작이니 하는 것은 필시 평범한 요소가 아니었다.
물론 마교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주호가 발설하지 말라며 경고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눈치껏 말을 아꼈다.
“마교인가. 대천산의 마귀들이 내려왔다지? 팽가에서도 전언이 있었네. 그래도 학관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조심해야 해. 작년의 일도 있었잖아?”
팽우혁의 말에 당소혜는 어깨를 으쓱였다.
교류대회 당시 예상치 못한 마교의 습격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본바.
아직 학관 내에 그들을 기리는 분향소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그 때문에 무림맹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들었소. 무슨 일이 있으면 그쪽에서 즉각 움직일 테니 저번과 같은 일은 없을 테지.”
남궁휘가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넷 사이의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고, 강의 시간이 가까워져 옴에 따라 그 관심사는 마교에서 강의로 향해갔다.
“실전의 이해. 분명 향이 네 오라버니가 교관으로 있는 강의였지.”
“응. 설마 오라버니 밑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랐네. 아, 그래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교관님이라고 불러야지.”
“그건 그렇지. …그래도 주 교관님이라면 혹시 모르겠네. 향아, 라고 하면서 아는 체를 할지.”
당소혜의 말이 제법 그럴듯했기에 주예향은 쓴웃음을 지었다.
“듣기로는 실전의 이해 강의는 직접 사사 받을 교관을 선택한다고 하오.”
“저도 들었어요. 남궁 공자께선 생각해두신 교관님이 계신가요?”
“여럿 있지만, 아무래도 검절께 직접 가르침을 청하고 싶소. 같은 검의 길을 걸어가기도 했고, 남궁세가와도 여러 인연이 있으니.”
남궁휘는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더군다나 세가의 어른들은 물론, 남궁연에게까지 불려가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가.
-주 교관님께는 세가의 은인이시니 항상 극진한 예의를 차리도록 하세요. 실례를 범하게 된다면 그건 남궁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랍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진지한 태도를 보아하니 어쩌면 둘 사이가 예사롭지 않은 관계라는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남궁휘의 말에 당소혜 역시 제법 좋은 생각이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미리 여쭈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네. 향아, 혹시 네 오라버니께 들은 게 있니?”
당소혜는 딱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주호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지옥 같던 삶에서 구함을 받았다.
거기에 훤칠한 외모와 고강한 무공, 그리고 호쾌한 성격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경쟁상대가 너무나 쟁쟁했기에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글쎄,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주예향으로서는 생각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릴 찰나,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팽우혁이 두 눈을 빛냈다.
‘이건 점수를 딸 기회다.’
검절의 위명은 이미 적잖게 들었다.
비록 그 출신은 평범한 상계 가문이지만, 정천학관에서 교관으로 있는 것을 보니 야망이 있는 사내이리라.
그렇다면 하북팽가와 연줄을 쌓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터.
도호께서 앞으로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한 고수라고 했을 땐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척.
강의 시간에 다다르자 교관들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수선하던 내부는 곧 긴장과 기대가 섞인 분위기로 가라앉았고, 마침내 실전의 이해 강의를 맡은 주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단상 위에 섰다.
조그마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삼백 쌍의 눈동자가 움직이며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주호는 그런 광경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최연소 교관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일 년 만에 단숨에 일급 교관의 자리까지 올라서다니.
“본인은 정천학관의 일급 교관으로 실전의 이해 강의를 맡은 주호라 한다.”
힘 있는 목소리가 강의실 안으로 퍼져 나가자, 좌중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절(劍節)이라 함은 근래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이름이 아닌가.
눈부신 무위로 마교의 마두를 쓰렸을 뿐만 아니라, 당소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화산의 매화검수와 일전을 치른 것은 후기지수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실전의 이해는 말 그대로 실전에 관해 가르치는 강의다. 대부분 실습으로 이루어지며, 주의 첫날엔 내가, 나머지는 배정된 교관들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그 말에 단상 밑에 있던 교관들이 한껏 자신의 존재를 뽐냈다.
“다들 알다시피 강의 첫날에는 수강생이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교관을 직접 선택하는 전통이 있다.”
이번엔 관생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교관들을 바라보았다.
학관의 교관으로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실력과 명성이 보장되었다는 것이었다.
명문이라 할 수 있는 문파의 출신부터, 개인의 힘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이름을 날리는 이까지 그 부류는 다양했으니.
“관생들은 각자 가르침을 받고 싶은 교관 앞에 서도록. 배정이 끝나면 무를 수 없고, 인원에 제한이 있으니 신중히, 서둘러 선택하길 바라지.”
선택은 관생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관의 재량이었으니.
어떤 교관은 같은 명문 문파의 출신 후기지수만 받았고, 어떤 이는 같은 무기를 쓰는 후기지수만 받았다.
또 어떤 교관은 같은 지역 출신인 동향의 후기지수만 받았고, 어떤 교관은 제 마음이 내키는 후기지수만 받았다.
그것 또한 학관의 전통이니 주호는 구태여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교관을 선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남는 인원은 어차피 빈자리를 채우게 되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작년에도 이러한 방식이었기에, 동일하게 진행하는 것이었다.
척.
그런 가운데, 주호 앞으로 다가온 이가 있었다.
“교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의 휘라고 합니다. 세가의 어르신들께 주 교관님을 극진히 모시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네가.”
자신을 소개하는 남궁휘의 말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남궁연에게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너도 서둘러 교관을 골라라. 말했듯 각 교관당 인원에 제한이 있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저는 교관님께 가르침을 사사 받고 싶습니다.”
주호의 말에 남궁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으로 팽우혁 역시 다가와 말을 보탰다.
“팽가의 우혁이라고 합니다. 저도 꼭 교관님께 사사 받고 싶습니다.”
장내의 이목이 순식간에 그들 쪽으로 쏠렸다.
관생뿐만 아니라 교관들 역시 당황한 눈치였으니.
실전의 이해 강의는 그것을 담당하는 일급 교관이 관생을 배정받은 역사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다들 주호의 반응을 궁금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남궁휘까지는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팽우혁의 경우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너인가.”
“…….”
그 서늘한 목소리에 팽우혁은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오한까지 서리지 않았나.
그도 그럴 것이 주호의 눈에 자신은 동생에게 집적거리는 것으로 보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의 밑으로 들어가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
주호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남사일에게 자신이 직접 가르치면 안 되느냐고 묻긴 했지만, 실상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자리한 팽우혁을 가만히 두고 넘길 생각 역시 없었으니.
“좋다.”
“……!”
그 말에 장내의 다른 이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러는 몸을 돌려 주호의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대신 조건이 있다. 촌각 동안 내 기세를 받고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어때, 하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으나, 마다할 이유가 없기에 팽우혁과 남궁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 대결이 아니라 기세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버텨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쿵.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왁자지껄 떠들던 이들이 입을 닫았고, 모두 고개를 돌려 한데로 시선을 옮겼다.
촌각(寸刻).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그 둘은 그것을 버텨내지 못했다.
“…으윽.”
팽우혁은 이를 악물고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막지 못했다.
단지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사지가 찢겨 나갈 것만 같았다.
저항하기 위해 내공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꼼짝도 하지 않는바.
그 탓에 기세가 몸에 닿을 때마다 난도질을 당하듯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끝내는 한 호흡도 버티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남궁휘에 이르러선 아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기까지 했으니.
“흠, 아쉽게 되었군. 둘 다 탈락이다. 서둘러 담당 교관을 정하도록.”
촌각조차 버티지 못한 그들의 모습에 주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