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적혈마검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기세를 받고도 한 치의 밀림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대견하다 칭찬해주고 싶었으나, 아무리 발악한다고 하여도 거기까지일 따름이었다.
“후우…….”
우수(右手)에 쥔 검을 옆으로 뻗은 그는 호흡을 길게 들이 내쉬었다.
혈천신교 내에서도 극히 소수만 사용할 수 있는 비기, 암천(暗天).
일순간 잠력을 폭발시켜 평소 몇 배가 되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강호에 이러한 기술은 많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신체의 원기를 소모하거나, 막대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그러한 것들이 주류로 필사(必死)의 상황이 아니라면 그리 각광받지 못했다.
하지만 신교의 비기인 암천은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부작용이 전혀 없을뿐더러 원기도 소모하지 않았다.
신체를 여러 약품과 시술로 가다듬었고, 그 내부에 원기 대신 소모될 무언가를 이미 축적시켜 놓았다.
신교 내의 고수가 모두 암천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전력이 몇 배는 올라갔겠지만, 아쉽게도 암천의 준비를 위하는 데에도 막대한 지출과 필요한 적성이 있었다.
그야말로 만에 한 명꼴로 나오는 것이었기에 귀한 존재라 할 수 있는바.
진무혼은 암천의 적성 덕분에 빠르게 고수가 될 수 있었고, 끝내는 칠혈성의 수좌인 적혈마검이란 자리를 꿰찼다.
꽈드득-.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등과 목 위로 이제는 시커메진 선명한 존재감들 드러냈다.
마검 위에 피어올라 있던 검붉은 빛은 완연한 흑색에 뒤덮였고, 깊은 밤의 어둠을 잡아먹으며 점차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
천우희는 가라앉은 눈으로 진무혼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만만치 않은 고수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온몸의 핏줄이 시커멓게 달아오름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증가한 기세는, 아무리 그녀라도 함부로 가늠하기 힘든 것이었다.
진무혼이 검을 옆으로 뻗었을 때, 천우희는 신도(神刀)를 치켜세웠다.
스산한 기운이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일순간 그 주위에서 싸우던 이들 역시 움직임을 멈추고 긴장감 어린 얼굴로 지켜볼 정도로 무거운 중압감이 내려앉았으니.
파앗-!
찰나 둘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놓쳐 헛바람을 내뱉었지만, 천우희와 진무혼은 더없이 명확하게 상대의 궤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쉬이익-!
선공을 가한 것은 진무혼 쪽이었다.
실전에서 암천을 사용한 것은 정말로 오래된 일인바.
그렇기에 그는 넘치는 여력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이전에 천우희가 그랬던 것처럼 신나게 날뛰었다.
“…….”
마검의 끝이 섬뢰처럼 찔러 들어왔다.
막을 수 있었지만, 직전에 부딪혔던 충격이 뇌리에 선명한바.
그렇기에 신도의 면을 비스듬히 세워 그것을 흘려보내려 했다.
쿠웅-!
하지만 그것과 스친 것만으로 딛고 선 바닥에 균열이 퍼지며 적지 않은 여파가 그 뒤를 따랐다.
‘일부러 그랬군.’
천우희는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조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을 놀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휘릭-.
마검이 신도의 면을 타고 오르며, 마치 연어가 강물을 거스르듯 순리를 역행했다.
천우희 역시 그것에 대응해 제 손안에서 도의 손잡이를 한 바퀴 돌렸지만, 후발제인의 묘리를 살리지 못했다.
쿵-!
일순간 장원이 울릴 정도의 광음이 울려 퍼졌다.
천우희는 자신의 도를 역수로 쥔 채 뒤로 주르륵 밀려난 상태. 겨우 그 여력을 해소한 뒤 고개를 들자, 잘게 떨려오는 신도의 진동이 느껴졌다.
‘신도가 아니었다면 방금 전의 공격으로 부러졌다.’
일점으로 꽂힌 공격은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작신도가 아니었더라면 도가 부러지며 자신 역시 꼬챙이에 꽂힌 고기 신세가 되었을 터.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지만, 멈추어 서 있을 틈은 없었다.
쉬이익-!
진무혼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기 시작했다.
어둠 위로 시커먼 궤적이 이어졌다.
천우희는 다시금 도를 세워 그것을 빗겨낸 뒤, 이번에야말로 반격을 펼쳤다.
화르륵-!
백염의 불길이 허공을 베어 가르며 그의 턱 끝까지 쇄도했다.
하지만 단 한 치의 차이로 그에게 도달하지 못한바.
그 끝에서 여유롭게 서 있던 진무혼은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전과 같은 기세는 없군. 겁이라도 먹은 것인가?”
“겁을 먹어? 내가?”
천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세가 밀릴지언정 겁을 먹은 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진무혼은 마검을 유려하게 휘두르며 그 뒤를 가리켰다.
“글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해도, 그 뒤에 있는 이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
전장은 고착화된 상태였다.
서로 한 치의 밀림이 없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분명 혈천신교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판가름하는 요소는 분명 자신들의 싸움일 터.
“단장님! 저희는 개의치 말고 저 오만방자한 놈의 코를 짓눌러 주십시오!”
“대장전을 이겨야 싸움에서 이긴 게 아닙니까!”
천우희가 살짝 의기소침해졌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주작 단원들은 치열하게 싸우는 가운데서도 그녀를 향해 외쳐왔다.
“…정말, 이런 상황까지 넉살을 부리긴.”
천우희는 짐짓 제 수하들을 흘겨보며 도를 다잡았다.
말로는 여유를 보였지만, 이쪽을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몹쓸 상관이네. 결정적인 순간에 수하들의 걱정이나 받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래서,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는가?”
진무혼은 장난을 치듯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다만, 천우희의 반응이 이전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저렇게까지 판을 깔아주는데, 나도 전력으로 나설 수밖에 없잖아.”
“…여기까지 와서 허풍을.”
진무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기세를 가늠했다.
조금 전까진 살짝 흐트러진 것을 보였으나, 마음을 다잡았는지 다시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볍게 내지른 공격마저도 가까스로 막아낼 정도인데, 자신이 본격적인 공세로 나선다면 순식간에 결판이 날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한테 한 말을 여기서 다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척.
주작신도의 끝이 진무혼을 향해 겨눠진다. 그 손잡이를 움켜쥔 천우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작의 불꽃은 두 번 변해.”
주작도법
청염식(靑炎式) 폭류(暴流)
파아아아앗-!
이전에 없었던 격렬한 반향이었다.
새하얀 백염은 순식간에 시퍼런 색으로 뒤덮였고, 사방에 제 존재감을 흩뿌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불꽃에 진무혼의 두 눈으로 경각심이 깃들었다.
그는 농밀한 흑염이 휩싸인 마검을 힘껏 흩뿌리며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주작신도를 쳐내려 했지만, 이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두 눈을 부릅떴다.
사아아악-!
신도에 서린 청염이 마검의 흑염을 잡아먹었다.
어찌나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던지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겨 일순간 틈을 드러낼 정도였다.
“주작도법.”
거센 폭류가 두 줄기의 불길로 모여든다. 그것은 이내 거대한 화륜을 그려내며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으니.
“청염식 쌍륜(雙輪)-.”
쐐애애애액-!
두 줄기의 원이 진무혼을 향해 쇄도해갔다.
그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은바. 훌쩍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더니, 제 검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적류십이검(赤流十二劍)-.”
마검의 끝으로 흑광이 번뜩이며 적류십이검의 절초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 청염과 닿자 모두 허무하리만큼 기세를 잃고 시들어갔을 따름이었으니.
“소용없어. 청염은 모든 부정한 것을 태우는 불꽃이니까.”
“…네놈!”
그 지척까지 다다른 천우희가 속삭이듯 말하자, 이마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오른 진무혼이 역정을 내었다.
“이럴 순 없다! 암천의 힘을 태우는 불꽃이라니!”
캉-!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다시 검과 도가 서로를 마주했다.
하지만 그 구도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으니.
“…….”
진무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찍어 누르기 시작하는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사실 청염식을 사용한 것은 그녀로서도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경지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어섬과 동시에 주작신공의 성취가 있었다.
그렇기에 청염식의 영역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으나, 아직 그 이해가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실전에서 사용할 수준은 아니었을뿐더러, 실패하게 된다면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모험 없이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는바.
그렇기에 그녀는 손에 든 주사위를 던졌고, 보기 좋게 성공했다.
비록 그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까득-.
진무혼은 두 눈을 부릅떴다.
무릎이 굽혀지며 힘에서 밀리는 것이 여실 없이 느껴졌다.
지금껏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상대에게 밀리자니 이리도 굴욕적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암천의 활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투둑, 투둑-.
순식간에 그 신체에 축적된 암천의 원료가 소모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기어코 원기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그 강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해 근육이 약한 부분부터 끊어지며 부작용을 보이기 시작했다.
“…윽.”
한계를 맞이한 것은 천우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염식은 현재 그녀의 몸에도 부담이 컸다. 그렇기에 입가에 실핏줄이 비치며 그리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알려왔다.
“으하하하-! 좋구나,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의 싸움이다!”
진무혼도 그것을 눈치챘다.
그 역시 제 상태는 아니었기에 이미 좌안의 핏줄이 터지며 피 칠갑이라도 한 듯 시뻘겋게 물들었다.
안면의 근육은 괴기스럽게 일그러졌고, 피부 자체가 괴사하며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평소 그가 즐기던 고풍스러운 싸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승리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파아아앗-!
흑염이 제 몸을 불사르며 몸집을 키워나가는 가운데, 청염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이 일렁거렸다.
“…….”
천우희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로 마지막 순간이었다. 지금만 버텨내면 확실한 승기를 가져올 수 있었으나, 병든 몸은 그녀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카아앙-!
날카로운 고성과 함께 주작신도가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진무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천우희는 아차 하며 황급히 몸을 뒤틀었지만, 이미 틈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윽고 마검의 끝이 천우희의 가슴을 향했을 때.
푹-.
피륙을 꿰뚫는 차가운 소리가 전장 한가운데 울려 퍼졌다.
그 섬뜩한 파열음에 치열하게 싸우던 이들의 이목 역시 몰렸으니, 그 한쪽 무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신음을 금치 못했다.
“…….”
진무혼은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천우희의 목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새하얀 창 한 자루가 제 가슴을 꿰뚫었다.
정말로, 정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평소였다면 어렵지 않게 반응하며 그것을 막아낼 터였지만, 극한으로 끌어올린 암천이 오히려 감각을 헤쳐 독이 되어버렸다.
“…커헉.”
진무혼이 시커먼 사혈(死血)을 토해냈다.
얼굴에 죽음의 기운이 완연하다. 그 자신은 이렇게 죽을 수 없노라 버티고 있는 듯했지만, 그 노력이 부질없게도 이내 두 눈을 까뒤집으며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와주실 줄 알았어요.”
천우희는 도를 지지대 삼아 버티며 장원의 벽 위에 나타난 존재를 바라보았다.
쉬시시식-!
그와 동시에 일단의 무리가 담을 넘어 장내로 진입했다.
모두 하나같이 새하얀 무복을 입은 것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이는바.
“백호단이다! 백호단이 지원을 왔다!”
“적의 대장이 쓰러졌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밀어붙여!”
백호(白虎) 양인철 휘하 일백의 백호단이었다.
백호단의 합세로 주작단의 사기가 하늘 끝까지 고조된 반면, 진무혼이 허무히 죽음을 맞이하자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탁.
양인철은 그런 가운데 가볍게 몸을 날려 천우희의 앞으로 내려앉았다.
“정말로, 아직도 서투르기 짝이 없구나. 내가 오질 않았더라면 어찌 됐겠느냐.”
“반격할 때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허허실실, 알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어서 몸이나 추스르거라.”
양인철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안타까운 눈으로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에 쓴웃음을 짓고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나머지는 부탁드릴게요. …수하들 앞이라 조금 무리했거든요.”
짧게 한숨을 내쉰 천우희의 몸이, 이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