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밤이 깊었다.
겨울은 끝자락에 이르러 봄이 동도했지만, 해가 떨어지면 날씨는 아직 싸늘했다.
더러는 입김을 불면 싸늘한 한기가 새어 나올 정도였으니, 추위의 잔향을 알 법했다.
특히 감숙은 북부 지방에 위치해 다른 곳보다 봄이 늦었다.
아직 겨울에 쌓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술에 취해 웃고 떠들던 사람들 역시 시간이 늦으면 집으로 되돌아갔다.
쉬시시식-.
그 가운데 수십의 인원이 어둠을 달려나갔다.
일백의 주작단이었다.
그들은 각각 스물씩 나뉘어 다섯 개의 조를 이룬 뒤 하나의 목표를 향했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 간혹 귀가가 늦어져 그 광경을 목도한 이들이 있었지만, 잘못 보았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 찰나 이미 그곳엔 텅 비어버린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척.
목표지에 다다르자 앞서 가던 천우희가 눈짓했다. 그러자 부단주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넓게 퍼진 주작단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기향장(䅩香場).
향기가 남아 있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다만, 잔향은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일 따름이니.
사도칠패가 폭뢰를 숨겼다는 첩보가 들어온 곳이었다.
“…….”
천우희를 필두로 한 주작단은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렸다.
초하룻날이라 달빛이 적었기에 습격하기 안성맞춤인 상황.
하지만 적들도 폭뢰를 보관하고 있다면 엄중한 경계 속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조사대로 몇몇뿐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은밀히 수색을 나갔던 수하가 보고를 올렸다.
느껴지는 기척은 몇몇 없다고 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의심이 일렁이는바.
천우희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사도칠패 되는 세력이니 최소 절정 이상의 고수를 호위로 내세웠으리라.
혹은 그 끄나풀인 마교나 혈천신교의 세력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습격 전은 서로를 읽고 읽어내는 수 싸움에 가까운바.
가장 좋은 결과는 사도칠패가 지닌 폭뢰를 터트려 이곳 자체를 말살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탈취해 관아에 은밀히 제보하고, 황실이 직접 나서게 만들었다면 대성공에 가까웠다.
사도맹은 이미 산서와 검마의 일로 황실의 눈총을 받는 상황. 건수가 잡힌다면 옳다구나 하면서 거센 질타를 가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폭뢰를 운용한 것이 사도칠패를 주축으로 한 세력이라 한다면 친맹주파가 사도칠패를 척결해내거나 배척하는 좋은 명분을 주었다.
반발이 없진 않겠지만, 황실의 입김이 들어간다면 무림맹을 비롯한 구파일방과 세가 연합이 합세했다는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단주님, 지부장 쪽에서 도주로를 전부 봉쇄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알겠다.”
그때, 다른 쪽에서 도착한 주작단원에 천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기향장 타격에 나선 것은 일백의 주작단이었지만, 그 주위로 펼친 포위망은 사신문 감숙지부의 무인들이 나서준바.
패잔병을 뒤쫓기에는 충분할 전력이리라.
“…….”
천우희가 가볍게 손을 까딱이자, 일개 조씩 순차적으로 몸을 날렸다.
제일 먼저 장원에 담을 넘어온 이들은 신속하게 경비를 돌던 무사들을 제거했고, 다른 이들도 넘어올 수 있도록 주변을 경계하며 안전을 확보했다.
“…외원 쪽엔 사람이 없습니다.”
기향장의 규모는 어지간한 장원 몇 개를 합친 크기였다.
외원과 내원 역시 나뉘어 있기에 그들은 순식간에 외원을 수색했지만, 사람이라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안쪽에서 기다리겠다는 건가.”
천우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노골적으로 인원을 비워놓았으니, 필시 함정을 꾸며놓았으리라.
하지만 이쪽까지 들어온 이상 후퇴할 수 없기에 경계하며 천천히 내원으로 진입했고.
파아앗-!
그와 동시에 사방이 환히 밝혀지며 곳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흑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일백. 아니, 못해도 그 두세 배는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풍기는 기세조차 만만치 않은 것이, 옆에 서 있던 부단주가 복면 안쪽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길, 똥 밟았습니다.”
“어쩌겠어. 밟은 이상 철저하게 짓밟아야지.”
천우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기에 쓴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둘렀다.
“전투준비.”
그녀의 나지막한 말에 다들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보이며 닥쳐올 적들에 대비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 쓸어버리고 폭뢰를 확보한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흑의인들 가운데로 살짝 붉은 기가 섞인 흑발을 지닌 남자가 걸어 나왔다.
“…….”
어둠 속에서도 그 흉광이 번뜩인다. 남자는 이내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파리가 꼬이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더 커다랗군. 무림맹인가? 아니면…….”
끝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쪽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천우희는 도를 쥔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잡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겨우 알아냈다고 생각한 정보가 의도적으로 노출된 것이나,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어 가늘어진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복면을 쓰고 있지 않은바.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외모와 차림새의 특정을 보아하니 그 정체를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적혈마검(赤血魔劍).’
혈천신교의 칠혈성이라 불리는 이들 중 한 명으로, 이전에 주호가 쓰러뜨렸던 청혈도제와 같은 수준의 고수였다.
꽈아악-.
천우희는 천천히 주작신도를 쥐어 올렸다.
주호가 했다면, 자신도 쓰러뜨릴 수 있을까.
벽을 넘어선 뒤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지만, 상대는 그 훨씬 이전부터 경지에 올랐던 고수.
하지만 그녀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파아아앗-!
검은 물결이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지척까지 이른 맹목적인 살의에도 일백의 주작단원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바.
마침내 천우희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순식간에 폭발적인 전의가 터져 나왔다.
쉬이익- 쾅-!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데에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내는 순식간에 귀를 찢는 마찰음과 후끈한 열기로 뒤덮였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주작단 모두 선명한 열양지기를 발하는 무공을 익힌바. 순식간에 공기를 달구었고, 그 주위만은 한여름이라도 찾아온 듯 후끈한 바람이 뒤덮었다.
싸움은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촌각이 지났음에도 누구 한 명 죽지 않았고, 서로를 향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마찰음이 난무하는 전장 가운데 기이한 공백으로 뒤덮인 자리가 있었다.
스르륵-.
천우희가 손목을 까딱이자, 천에 둘러싸여 있던 주작신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뻘건 도신.
그 유려하고 선명한 모습을 본 적혈마검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적도, 주작신도? 그렇다면 네년은 주작인가.”
“마검 주제에 보는 안목은 높군.”
“…이쪽의 이름 역시 알고 있었나, 그것 또한 영광이군.”
적혈마검이 씩 웃으며 검을 쥐자, 이글거리는 핏빛 혈기가 그 위에 피어올랐다.
쿵-!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서로를 향해 동시에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을 뿐.
직전까지 둘이 서 있던 자리가 우그러지며, 그 기파가 순식간에 주위에 휘몰아쳤다.
“…컥-!”
가까이 있던 이들은 그것에 휘말려 옅은 내상을 입을 정도로 격렬한 충돌이었으니.
시뻘건 혈기와 선명한 불꽃이 부딪치며 밤의 어둠을 밝혔다.
쿵-!
첫 충돌 직후, 천우희는 크게 발을 내디뎌 진각을 밟았다.
그녀는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적혈마검과의 교전 시간이 지속될수록 자신들의 피해는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기에 찰나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승부를 보고자 초장부터 전력을 끌어올렸다.
주작도법
백염식(白炎式) 회륜결(回輪結)
세상을 태울 듯 선명히 타오르던 불꽃이 새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
그 기묘한 변화에 적혈마검이 두 눈을 크게 뜰 찰나, 그녀의 도신 위로 강기가 휘몰아치며 마치 불꽃이 일렁거리듯 거친 기세를 내뿜었다.
“흡-!”
주작신도의 끝이 폭발적인 속도로 휘둘러졌다.
나선의 묘리가 회전에 가미되어 극한의 속도를 끌어내는 도결.
함부로 그 정면에서 그것을 받아냈다간, 순식간에 휘말려버릴 우려가 있다.
그렇기에 단번에 그것을 눈치챈 적혈마검은 맞댄 도를 거칠게 뿌리치고 몸을 뒤로 물렸으나, 천우희는 한 번 잡은 목덜미를 끈질기게 물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탓, 타다닷-!
단 한 번의 충돌 직후, 적혈마검은 순식간에 열 보가 넘는 걸음을 밀려 버렸다.
집단 전투에 있어 수장의 싸움은 그 기세를 크게 좌지우지하는바.
천우희가 파죽지세로 상대를 밀어내기 시작하자, 주작단의 고수들은 모두 환호를 지르며 더욱 열정적인 모습으로 적들을 압박해나갔다.
“쯧.”
적혈마검은 혀를 찼다.
상대는 불나방이었다.
제 몸조차 태우며, 상대를 갉아먹으려는 수법이 눈에 훤히 들어오지 않는가.
우아하고, 고상한 싸움을 즐기는 그로서는 이런 번잡한 드잡이질은 피하고 싶었다.
‘기껏해야 무림맹이나 사도맹쪽 친맹주파 잡놈들이 나설 줄 알았거늘, 그들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사신문에게 덜미가 잡히다니.’
사신문의 고수들이 기향장을 습격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예상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이상, 순순히 내어줄 수는 없었으니.
쿵-!
적혈마검의 전신으로 큰 박동이 퍼져나감과 동시에 그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퍼런 힘줄이 어디 할 것 없이 선명하게 솟아올랐고, 검 끝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미증유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콰아앙-!
검붉은 빛을 발하는 마검이 처음으로 끝을 모르고 날뛰던 주작신도를 막아냈다.
“…….”
맞댄 검의 뒤로 느껴지는 묵직한 기세에 천우희의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이질적인 느낌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표정이 우습구나, 언제까지 천방지축으로 날뛸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쉬익-캉-!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천우희를 거칠게 떨쳐낸 적혈마검은 깊은숨을 들이 내쉬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다른 칠혈성과 달리 ‘신마’께 선택받은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으니.
그가 제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자, 그 위에 서린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비루한 존재여, 날개를 뜯길 준비는 되어 있느냐.”
농밀한 살기가 그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전장의 분위기가 일순간 움찔할 정도로 거센 것이었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선 천우희는 표정 하나 꿈틀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럼 네 모가지 정도는 내어놓아야 할 거야.”
기세 싸움은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 중에 속했다.